<주몽을 까발려주마> 3편 혼인빙자 사기꾼 주몽(?)
눈나라 총리 2006-12-31 00:32

아 올리려고 한 일요일 밤이 12월 31일이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선약을 잊고 올린다고 썼다. 졸라 죄송하게도 하루 당겼다. 하여간 달린다.

졸본부여세력을 졸본으로 통일하고 북부여를 부여로 통일합니다. 다만 졸본도 부여 중에 하나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또 추가로 고구려시조는 확률적으로 주몽보다는 추모가 더 옳습니다. 고구려사람들의 직접 기록인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추모라 기록되어 있지 주몽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몽이라는 말은 12세기에 고려시대 사가들의 기록이니 당연히 직접 당사자인 5세기에 고구려인들의 기록을 우선시해야 됩니다. 

연재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3편 혼인빙자 사기꾼 추모(주몽)?
4편 사기 당한 소서노와 백제건국
5편 유리명왕은 추모성왕의 아들이 아니다.  ......... 


<아들과 싸우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아버지> 
우리나라에 스타워즈같은 시나라오가 나왔으면 좋겠다. 추모(주몽)의 아빠는 누굴까. 일단 북부여의 왕 해모수나 동부여의 왕 금와 두 명중에 하나 일 것이다.


<북부여의 왕 해모수가 다물군 대장이라 음~ 드라마니까 넘어가자>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추모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는 역사적 실체가 없다. 그 후 어떻게 되는 지 전혀 기록이 없다. 게다가 동부여가 금와 아버지 때 즉 북부여의 해모수 출현 전에 동쪽으로 이동하는데 그런 근거가 되는 역사적인 유물의 이동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부여에서 졸본 고구려에 유물적 이동로는 귀걸이 등 역사 유물에서 충분히 밝혀졌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해모수의 아이를 금와가 거둘 리가 없지 않은가? (금와가 유화부인 좋아서 뽕뽕할려고 라면 아기 추모는 조용히 처리했을 것이다. 아마 어디 산에 부모 모르고 컸겠지.) 따지고 보면 주몽신화에서 해모수만 빼고 금와를 북부여라고 생각하면 신화나 역사적으로 깔끔해진다. 아버지는 금와니까


<내가 니 아비다 이 자식아>

그럼 왜 사가들은 억지로 해모수를 만들었을까? 
모 초강대국의 시조 아빠니까 뽀대가 나는 하늘에 사는 신이나 해로 바꾸어야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와는 태자로 유리명왕시절 고구려를 너무 괴롭힌 대소를 지명했기 때문에 추모의 아버지라고 해도 기록하기가 머쓱했을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추모의 아버지 이름이 없다. 그래도 좀 사람들이 금와를 추모의 아버지로 생각하니 안 되겠다 싶어서 해모수를 만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오.>

서자인 추모는 금와의 후계자에서 탈락하자.(아마도 기회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새 살림 차리겠다는 마음으로 친구이거나 동지인 오이, 마려, 협보와 부여내 불평세력들을 이끌고 남하기 시작했다. (추모가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여내에 외면 받는 집단을 이끌고 갔을 것이다.) 여기서 서자 추모는 왕위계승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상당히 왕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는 것을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다.


<추모의 남진은 만주와 한반도에 고조선 멸망이상에 대충격을 일으킨다.> 

이 당시에 이루어진 대규모 남하 5개중 3개가 추모와 직간접으로 관련되어있다. 즉 유리명왕계 세력의 2차 졸본남진, 소서노세력의 백제남진등 예맥족(부여계통)의 대남하를 촉진시켰다. 이로써 우리민족에 최전성기였던 삼국시대는 개막된다. 하지만 정작 추모는 부여에서 왕위 계승권이 없던 왕자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금와는 도대체 추모의 남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본 위원은 정말 궁금하다. 부여내 불평세력을 이끌고 가니 후련했을까? 아들이 나라하나 차렸다고 자랑스러워했을까? 하지만 고구려가 아버지인 부여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판단을 못했을까? 다만 금와왕 당시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본인의 그냥 개인적인 생각인데 당시 부여는 인구나 세력 과밀이어서 누군가는 나가 주어야 됐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추모와 유리의 대규모 남하가 그렇게 쉽게(물론 대소의 방해가 있었지만)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추모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알았을 것이다.) 당시 졸본은 자궁에 착상한 수정란이 무지막지하게 세포 분열을 일으키듯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각 세력들이 조그만한 영지를 가지고 분열되어 있었다. 즉 어찌 보면 차지하기 어려운 동네이지만 내면은 알짜배기에 무주공산 이였다.

 
<바로 이곳이다.> 지금은 유적 빼고는 별 볼일 없는 동네지만 기원전 1세기에는 예맥족 지역중 가장 활동적인 에너지가 있었던 곳이다. 

졸본은 위만조선내에서 수백 년간 졸본만의 문명을 건설했다. (졸본만의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북한학계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발생한 졸본세력을 고구려라고 주장한다.) 고조선 멸망 이후 전한의 식민통치기구인 현도군을 이 근처에 설치했지만 30여년 만에 송씨가문을 중심으로 스스로 힘으로 이들을 추방했다.


<대한독립만세> 
하지만 우리의 힘이 아닌 외세의 힘에 의한 독립이었고 결국 동서냉전의 현실 속에 분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졸본 세력은 해방 정국에 좌우익분열처럼 분열되어있음에도 성공적으로 현도군을 몰아냈다. 졸본사람들의 자긍심과 자주정신은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한지 최대적인 현도군이 사라진 후에 영지와 힘를 유지하면서 서로 독립을 고수했고 통합은 요원했다.(마치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한 후 그리스 도시국가의 급속한 분열 같이) 송양왕이 졸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지만 연타발 같은 중소세력들은 제멋대로였다.

 

통합에 힘이 부족했던 송양은 졸본세력의 실력자였지만 지도자는 될 수 없었고
 
결국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졸본의 세력을 고스란히 추모에게 바치고 만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뺀 격인데 하지만 유리명왕의 등장으로 그는 졸본 토착세력 내에서 화려하게 재기한다. (뭐 추모성왕 시절에도 비류지역 왕급이었으니까 찬밥대접도 아니었다.) 

국제사정도 매우 좋았다. 고조선 멸망후 예맥계통의 국가인 부여는 대소 등장 이전까지는 졸본진출에 소극적이었다. 아무래도 금와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이 건국한 고구려를 친다는 것이 머쓱했을 것이고 추모와 달리 외세에 맞아서 현도군을 물리친 졸본세력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관심법에 조예가 깊으신 황제 궁예>어쩌면 추모 남하가 부여의 진출일 가능성도 있다. 양길이 부장 궁예에게 명주(현재 강릉)치라고 한 것처럼 

한무제 사후 전한은 구고조선 영토에 힘을 쓸 수가 없었고 (1탄 참조: 모르면 내블로그 가서 복습해라) 끈 떨어진 한사군은 졸본이나 각 지역에 예맥족의 대반격에 모두 사라지고나 유명무실해졌고 한반도 남단에 삼한은 고조선유민들의 대규모 남하와 철기문명의 확산으로 대혼란에 빠져있었다.


<추모는 국제환경을 읽을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여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졸본에 갈만한 이유가 계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하여간 추모의 부여세력이 남하한 뒤에 졸본에 중급실력자 연타발과 손을 잡고 그의 딸내미인 소서노와 결혼을 한다. 물론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정략결혼(?한때 나폴레옹이 짝사랑도 했지만)처럼 소서노는 과부에 나이도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추모는 이로써 졸본내에 연타발 세력을 고스란히 접수하게 된다. 과연 연타발이 추모가 향후 혼인빙자사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하지만 추모세력이 매력은 많았다. 일단 추모는 강대국인 부여라는 국가 시스템에 중추에 있었던 왕자다. 유리명왕의 즉위과정과 유리명왕의 정복전쟁과 통치시절을  볼 때 오이, 마려, 협보도 부여라는 거대한 국가에서 교육받았던 인재들이다. 각 세력이 어느정도 발전된 국가도 이루지 못한 졸본에서 그런 인제를 찾기는 정말로 어려웠을 것이다. 졸본을 두고 각축전을 하고 있는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급실력자 연타발은 이러한 엘리트집단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졸본 내에 다른 세력인 송양이나 경쟁 세력과 손을 잡으면 .......

연타발은 정말로 암울할 것이다. 그래서 무리한 것이다. 자신의 딸까지 엮어 주면서 어르고 달래며 추모를 자신의 세력 안으로 끌어온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연타발은 자신의 집안에 호랑이를 불러 들인 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부여를 버리면서까지 왕이 되기 위해서 야망에 불타던 추모는 언제부터인가 장인 연타발에 머리 꼭대기에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사료 비중을 비교해 볼 때 중급 세력 연타발이 사라지고 졸본에서 신흥세력인 추모성왕이 전면에 들어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연타발 가문은 서서히 추모의 고구려 건국의 재료가 되어버린다.


<연타발가문은 비극적으로 추모성왕의 맛있는 먹거리가 되고 말았다.>
딸내미도 주지. 돈도 주지. 땅도 주지. 그런데 연타발은 보증서를 잘못 끊었다. 이것을 갚는다는 보장은 없었던 것이다.


* 4편 사기 당한 소서노와 백제건국은 다음주 목요일날 12시에 올리겠습니다. (저도 일해야 되고 이런 글 쓰려면 사료조사도 해야 되어서) 그냥 심심풀이로 글 올렸는데 호응도 있으니까 제대로 쓰겠습니다. 공부도 해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는데 요즘 힘들지만 모두 내년에는 좋은 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드세용~~~~ 바이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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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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