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adada.tistory.com/354#<12> 제3부 가야인의 삶 ①그들은 누구인가
가야가 살아온다 <12> 제3부 가야인의 삶 ①그들은 누구인가
가야의 원류
야의 원류를 캐려면 우선 ‘예맥(濊貊)’이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 ‘사기’ 등에 나오는 예맥족은, 한국에서 청동기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논란이 있다. 예와 맥은 같다는 견해, 예족과 맥족은 다르다는 견해, 둘은 비슷하나 엄밀하게는 구분된다는 주장도 있다. 예맥이 어떤 계통의 종족인가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퉁구스계라고도 하고 알타이계, 고아시아계, 몽고계라고도 하고, 적당한 잡종이라고도 한다.
한민족을 말하는 ‘한(韓)’의 기원에 대한 논란도 만만찮다. 고조선의 준왕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한(韓)을 칭했다는 견해(이병도), 한강 이남의 예맥족을 북쪽 퉁구스 계열과 구별하기 위해 한족(韓族)이라 이름했다는 견해 등이 맞서 있다.
한민족이 찾던 엘도라도
야 이전에 변한이 있고, 그 전에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한다. 하지만 ‘타임터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선(先) 가야인의 실체를 더듬는 작업은 매우 어렵다. 역사는 길고 기록은 적기 때문이다.
학계의 연구성과들을 종합하면 대체로 이렇다. 한반도 초기국가 형성기의 이주민 집단은 크게 고조선 계통과 부여·고구려 계통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기원전 4세기말~기원전 3세기초 고조선이 중국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서쪽지역을 상실했을 때 1차 이주가 일어났다. 이후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를 장악하자 준왕 일파의 남하가 있었고 위만조선 멸망후 한 군현이 설치되면서 또 한차례 이주가 진행됐다. 고조선의 정세 변화와 맞물려 부여·고구려 계통의 이주민도 나타났다.
이들 정치집단이 언제, 왜, 어디로 남하해 가야 땅으로 들어왔는지는 아직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가야땅에는 일찍이 지석묘(고인돌)를 만들며 살았던 토착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08년께 서북한 지역 위만조선이 망하고 정치 군사적으로 세력을 갖춘 유이민들이 남하, 현지 세력과 결합해 스피디한 문명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고학적으로 지석묘가 토광 목관묘로 바뀌는 과정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며 “이런 변화는 당시 동북아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지적했다.
울산대 백승옥 연구교수는 “변한인의 모태인 한(韓)의 근원에 대해선 아직 학계에서 정리된 게 없다”면서 “분명한 것은, 가야지역 토착 청동기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북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김해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최초의 흔적은 기원전 25세기께로 고조선 건국과 비슷하다”면서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 패총을 증거로 들고 있다.
학자들은 “남해안과 영남 일원은 고대에도 자연·지리적으로 천혜의 삶터였을 것”이라면서 “북방 유이민들이 이런 곳을 마다할리 없고 토착민과의 경쟁,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 가야문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풍성한 고고학적 자취
가야지역에 토착세력이 있었다는 불멸의 증거는 지석묘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지석묘는 경남 김해와 함안, 창녕, 고령 등 가야지역 곳곳에 널려 있어 삼한시대(고고학계선 원삼국 시대라 부름) 변진 소국의 사회상을 읽는 단서가 되고 있다.
가야지역의 지석묘는 남방식인데, 창녕군 장마면 유리, 일명 ‘덤바우’로 불리는 지석묘와 함안 도항리 도동 제3호 지석묘는 위치 및 형태가 독특하다.
창녕의 유리 지석묘는 5개의 고임돌을 받친 무게 36곘에 이르는 거석으로, 구릉지의 높은 곳에 만들어져 막강한 정치권력의 존재를 상정케 한다.
함안지역에는 전국 2만여기의 지석묘 중 180여개가 산재해 있다. 이 중 도동 제3호 지석묘는 여성의 성기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혈과 태양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동심원 등이 그려져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지석묘는 국내에서 이것이 유일하다.
가야인의 원류는 삼한시대의 유적 유물을 통해서도 부분적인 갈피를 잡을 수 있다. 대표적 유적지로는 경남 사천의 늑도, 창원의 다호리, 울산 하대, 김해시 양동이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울산 하대와 김해 양동 유적은 삼한사회가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을 각각 보여준다.
가야 묘제의 전시장이라 불리는 김해 양동유적은 잃어버린 가야와 가야인 연구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곳의 연대는 기원전 2세기~서기 5세기로 추정됐는데, 청동기-초기 철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시기별 유물들은 국제성을 띤 세련된 가야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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