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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24> 제4부 가야의 힘과 미 ⑦ 가야토기 재현
국제신문
① 대가야 옛땅에서 고령요를 운영하고 있는 백영규씨. 그는 가야토기는 희망과 절망을함께 안겨줬다릳고 말했다. ② 김해 진례에서 가야토기를 재현하고 있는 강효진씨. 그는제대로 된 재현을 위해 아직 할일이 많다고 말했다. ③ 영산 송강요 의 유현종씨가 재현한 가야토기형 생활도자기들
끊긴 맥 누가 잇나
가야의 옛땅에 신라-고려-조선이 차례차례 들어섰지만 가야도공의 맥이 이어졌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맥은 끊겼는가. 아니다. 가야가 망한 지 1천4백여년. 끊어진 맥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가야의 고지(故地)인 김해와 고령, 창녕에는 흙과 씨름하며 혼불을 지피고 있는 가야도공의 후예들이 있다. 너무 힘이 들어 손을 털고 돌아선 이도 있고, 아직 제대로 된 재현품을 만나지 못했다며 계속 열정을 불태우는 이도 있다.
백영규(白永奎·66)씨는 경북 고령지역의 대표적 도예인이다.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 대가야의 옛땅에서 ‘고령요’를 운영하고 있는 백씨는 50여년간 전통도예를 고집하고 있다.
백씨는 지난 90년초부터 10여년간 가야토기에 ‘미쳐’ 지냈다. 그가 고생고생해서 재현해낸 토기는 100여종. 발형기대, 통형기대, 광구장경호, 유개고배 등 재현되지 않은 가야토기가 없을 정도였다.
“질박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미가 가야토기의 특징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심성이 이랬을 겁니다. 내화도(耐火度)가 강해 일부는 실생활 용기로도 사용되었다고 봐요.”
90년대 후반 백씨가 ‘손맛’을 낼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가야토기에 한껏 근접했다’는 평을 들었다. 일부 일본인 관광객과 국내의 스님들은 백씨의 재현품을 사가기도 했다.
그러나 가야토기를 기껏해야 장식품·기호품 정도로 여기는 풍토속에서 백씨는 생활고에 직면했고 결국 두손을 들었다. 지난 2000년 마음먹고 추진했던 ‘가야토기장’ 기능보유자 지정이 무산되자 그는 다시 분청사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원 한푼 되지 않는 가마에 무슨 수로 계속 불을 때느냐”고 반문하는 백씨는 “왜 아쉬움이 없겠는가, 여건이 되면 다시 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가야의 찬란한 토기문화 재현은 이 지점에서 멈춰 있다.
김해토기의 조용한 부활
김해시 진례면 송정리에서 ‘두산도예’를 열고 있는 강효진(姜孝鎭·52)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가야도공의 후예다. 경남 산청 출신으로 옹기장이였던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도예를 배운 그의 뒤를 두 아들과 딸이 다시 잇고 있다.
지난 94년 김해시가 ‘두산도예’를 가야토기 재현 업체로 지정하자 강씨는 가야의 혼을 찾는 지난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토기재현 10년째를 맞는 지금, 강씨의 작업은 미진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무형의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선 끊어진 김해토기의 맥을 이은 것은 가장 큰 성과였다. 토기 제작공정 연구 및 경험축적, 한·일 고고학도들에 대한 실습마당 제공, 그리고 토기의 관광자원화에도 한걸음 다가섰다는 평도 따른다.
강씨는 “아직 멀었다고 본다. 토기의 색상과 모양 등 눈에 보이는 부분은 어느 정도 따라갔는데, 단단함이나 가벼움같은 것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말한다.
재현 과정을 체크해 온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는 "소성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외관도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세부적인 형태나 문양, 제작기법은 더 연구가 있어야 하겠고 제작공정을 데이터화하는 문제가 과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토기제작의 노하우와 경험이 축적된 만큼 이제 이를 심화하는 2단계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잠자는 토기를 깨워라
비화가야의 옛땅인 경남 창녕군 영산면 신제리. 구마고속도로 영산IC에서 나와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2㎞ 정도 내려가다 도천면사무소앞 네거리에서 우회전해 1㎞ 가량 들어가면 유현종(劉鉉鍾·45)씨의 ‘송강요(松剛窯)’가 있다.
한때 ‘토기형 생활도자기’를 붙잡고 끈질기게 씨름했던 유씨는 ‘가야토기’라는 말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거 어려워서 못해요. 채산성을 맞추려면 엄청난 투자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누가 챙겨줘야 말이죠.”
경기도 여주출생으로 김해 진례에서 10여년간 도자기를 굽다 지난 95년 영산에 새 둥지를 튼 유씨는 도예연구소를 차려 토기연구에 매달릴 정도로 토기형 생활도자기 생산에 열정을 쏟았다.
토기 표면에 금동운주무늬 등을 음각한 다기세트, 커피잔, 머그잔 등은 옛멋과 현대미를 접목시킨 독특한 향토관광상품으로 초기에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좋은 태토를 확보할 목적으로 광업권 확보를 꾀하던 유씨는 당국의 무관심과 비협조에 실망해 가야토기 현대화 작업을 조용히 접었다.
유씨는 “가야토기는 굉장한 문화자원이다. 잠자는 가야토기를 깨워야 한다. 지자체에서 하든지, 개인이 하든지 누군가는 이 문화자원을 보석으로 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야토기의 맥은 이어질듯 끊어질듯 위태위태하다. 오늘의 가야후손들은 가야토기의 맥을 확실히 이어 후대에 물려줄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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