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5>제26대 영양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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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2>제26대 영양왕(8)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8
<평양성 북문의 최승대. 평양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조선조부터 명승지로 알려졌지만, 이곳은 고려 때에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군사 망루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어느 전쟁의 이야기.
우리가 우리 손으로 외적의 침공을 맞아 싸워 이긴 이야기.
[嬰陽王<一云平陽> 諱元<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王薨, 太子卽位.]
영양왕(嬰陽王)<또는 평양(平陽)이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원(元)<또는 대원(大元)이라고도 하였다.>이고 평원왕의 맏아들이시다. 풍채가 뛰어나고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셨다. 평원왕께서 재위 7년에 태자로 삼으셨고, 32년에 왕께서 돌아가시자 태자께서 즉위하셨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평원왕의 태자로서, 계보대로라면 온달 장군의 처형(妻兄) 되시는 분이신 대원왕(영양왕). 형제관계를 논하자면 아래로는 한 명밖에 없는 누이동생이 직접 고르고 혼인해서 새로 대형(大兄) 벼슬을 얻은 온달 장군ㅡ그의 매제를 비롯해서, 훗날 영류왕이 되는 건무(建武), 고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버지 되시는 태양(太陽) 두 아우가 있다.
[隋文帝遣使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수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로 삼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의복 한 벌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원년(590)
기분나쁘긴 해도 지금은 아직 수와 맞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터다. 순순히 영양왕은 수 문제의 책봉 칙지와 함께 보내진 수의 옷을 웃는 얼굴로 받았을 것이다.(그 웃는 얼굴 뒤로는 칼을 감추고서)
[二年, 春正月, 遣使入隋, 奉表謝恩進奉, 因請封王, 帝許之, 三月, 策封爲高句麗王, 仍賜車服. 夏五月, 遣使謝恩.]
2년(591) 봄 정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표(表)를 올려 사은하고 왕을 봉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고, 3월에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3년(592) 봄 정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보통 대원왕 하면 수와의 전쟁, 그 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무(武)의 이미지만이 강조되고 있지만, 사실 대원왕 시대에 어떤 식으로문화발전이 진행되었고 그것이 어디로 전파되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시는 분이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한 나라를 평가하는 데에는 군사력만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력도 함께 평가해야 할 것이니, 군사력은 시간이 지나면 느슨해져서 사라질지 몰라도 문화력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백범 선생께서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도 문화력을 더 갖고 싶다고 하신 이유는 거기에 있다.
여름 4월 경오 초하루 기묘(10일)에 구호풍총이황자(廐戶豊聰耳皇子, 우마야도노도요토미미노 미코)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섭정하게 하여 만기를 모두 맡겼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원년(593년)
이 무렵 왜국을 다스리던 것은 33대 왜황 추고(推古, 스이코). 그녀는 자신의 조카 구호풍총이(우마야도노도요토미미)를 태자로 삼아 섭정하게 했는데, 이 사람은 태어날 때 어머니가 외양간 문 앞에서 산고 한번 없이 그냥 낳았다고 《일본서기》는 전하고 있다.태어날 때부터 말을 했으며 성지(聖智)가 있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한번에 열 명의 송사를 처결하는데 한번도 오판이 없었다는, 장래의 일도 쉽게 꿰뚫어보았던 불세출의 인재. 훗날 일본 역사에서 '성덕태자(聖德太子, 쇼토쿠 태자)'라 불리게 될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이 불교국가로 거듭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 왜 조정은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배불파였던 모노노베 일족이 숭불파 소아(소가) 일족과 벌인 싸움에서 제거되고, 구호(廐戶, 우마야도) 왕자와 함께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소아마자(소가노 우마코)는 국구(國舅)라는 지위를 이용해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급기야는 왜왕 숭준(崇峻, 스슌)을 시해하고서(왜왕 숭준의 어머니는 소아마자의 누이동생으로 마자와는 처남 매부 사이였음) 왜왕 용명(用明, 요메이)의 여동생이자 왜왕 민달(비다쓰)의 왕비였던 액전부황녀(額田部皇女, 누카타베노 히메미코)을 즉위시킨다. 이가 바로 왜왕 추고(스이코). 일본에서 최초로 여자가 왜왕이 된 사례였다. 왜왕 추고(스이코)는 여자인 자신을 옆에서 도와 정치를 행할 동지로 조카 구호(우마야도) 왕자를 택했고, 이로서 왜국의 조정은 소아마자(소가노 우마코)와 구호(우마야도) 왕자, 그리고 왜왕 추고(스이코)가 함께 이끌어가는 삼두정치 체제를 갖추게 된다.
2년(594) 봄 2월 병인 초하루에 황태자 및 대신에게 조(詔)하되 불교를 일으켜 융성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여러 신(臣, 오미)와 련(連, 무라치) 등이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갚고자 다투어 불사를 지었다. 이를 데라(寺)라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2년(594년)
왜왕 추고(스이코) 2년에 발표된 이른바 '불법승(佛法僧) 삼보흥륭(三寶興隆)의 조(詔)'. 이것은 당시 왜국 불교가 발전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구호(우마야도) 왕자는 그러한 불교진흥정책의 핵심에 서있었다. 왕자의 이름이기도 한 구호(우마야도)는 '외양간'이라는 뜻이다. 어머니가 외양간에서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데 혹시...?) 이는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호왕(廐戶王, 우마야도왕)은 왜에서는 법왕, 또는 대왕으로도 불렸는데, 고려에서 광개토태왕을 영락태왕이라고 한 것이나 신라에서 진흥왕이 스스로를 철륜성왕(鐵輪聖王)이라 칭한 것처럼, '불교의 법에 귀의한 왕'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 구호(우마야도) 왕자를 옆에서 도우며 그에게 불법의 도리를 가르쳐준 인물이 바로, 고려의 승려 혜자였다.
5월 무오 초하루 정묘(10일)에 고려의 승려 혜자(惠慈)가 귀화하여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이 해에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이 왔다. 이 두 승려가 불교를 포교하여 나란히 불법의 동량이 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3년(595)
이때의 '귀화'라는 말은 지금처럼 완전히 다른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본적은 그대로 유지하되 동시에 다른 나라를 위해서도 일한다는, 요컨대 '이중국적 외교'로서의 성향이 짙었다고 한다. 혜자는 고려의 승려인 동시에 왜의 신하, 구호(우마야도) 왕자의 자문으로서 고려와 왜국 두 나라 사이에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각자의 입장을 반영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혜자라는 사람의 기록은 우리 나라에는 없고 일본에만 있어서 실존했는지 여부도 의문스럽다는 사람도 있다. 고려의 승려라는 것만 알 뿐, 언제 태어났는지 고려에서 어떤 신분이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왜국에 '귀화'했다는 점과 거기서 20년 동안을 머물렀다는 점을 볼 때 고려에서 그리 높은 신분은 아니었을 거라 추측해볼 뿐. 그가 왜국으로 간 이유는 전에도 말했듯 왜국에서 불교 수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물부(모노노베) 씨족의 멸망 이후로 완전히 꺾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보다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려는 왜의 의지가 고려에 전해진 탓이기도 했다. 한창 대륙 문화에 눈뜨기 시작하던 왜국이 대륙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은 한반도의 삼국,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를 통하는 것이었다. 선진문물을 수입할 길을 얻기 위해서도 왜국은 한반도의 고려나 백제와 수교를 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왜국의 불교수용 의지나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의 성과로 혜자라는 승려가 고려에서 왜국으로 파견되었다. 수와 신라 양쪽에 적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태왕이 백제와 왜국에 대한 동맹관계를 성립하고자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일종의 '불교 외교'인 셈이다. 그렇게 왜국에 파견된 혜자는 왜국에 '귀화'했다.
4년(596) 겨울 11월에 법흥사(法興寺, 호코지)가 준공되었다. 마자대신(馬子大臣, 우마코노오오오미)의 아들 선덕신(善德臣, 젠토쿠노오미)를 사사(寺司, 데라노츠카사)로 임명하였다. 이 날에 혜자와 혜총 두 승려가 처음으로 호코지에 들어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4년(596)
아스카의 법흥사(호코사). 법흥사(호코사)는 고려의 정릉사나 금강사의 가람배치를 따라 1탑 3금당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권신(權臣) 소아마자(소가노 우마코)의 아들이 사사(데라노츠카사)로 있던 절이다. 오사카의 사천왕사(시텐노지)와 함께 일본 비조(飛鳥, 아스카) 문화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왜왕 추고(스이코) 원년에 불사리를 초석 밑에 봉안하고 찰주를 세워 절의 기둥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무릇 4년만에 완공되었다. 고려의 승려 혜자는 왜국에 머무르던 백제의 승려 혜총과 함께 이곳에서 불법을 전했다.
법흥사(호코사)의 고려식 가람배치는 혜자가 오기 전 이미 혜편의 활약으로 왜국에 널리 퍼져 있던 고려 불교가 왜의 가람배치 구조에까지 영향을 드러냈음을 말해준다. 당시 '적국'이었던 고려와 백제, 두 나라의 승려가 한 절에 함께 들어갔다는 것을 두 나라가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있었던 증거인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승려들한테는 사실 국적이라는 개념이 그리 중요한 요소로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출신으로서 596년에 이름을 날린 승려 중에는 승랑이나 혜자, 혜총 말고도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천태종(天台宗)을 공부하고, 개조(開祖) 지자(智者)로부터 천태교단을 받은 파약(波若, 562∼613)이라는 승려가 있지만 기록이 너무 적어서 여기서 전(傳)을 다 지을 수는 없다. 박노자 교수의 칼럼에서 읽은 것을 소개하면 그는 598년 고려의 선제공격으로 제1차 여ㆍ수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에 있었다. 당시 수의 천태종 승려들은 수의 고려 원정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고려 조복(調伏)' 기도를 올렸다. 천태교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파약도 일단은 고려에서 온 사람이라서 차마 자기 나라를 멸망시켜달라 기도하는 데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겠지. 파약은 이들을 떠나 옛날 스승 지의가 참선수행하던 천태산 화정봉에 올라가 16년을 고행했다.
파약 자신의 행적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라의 승려 원광과는 사뭇 다르다. 원광은 승려이면서도, 고려를 공격해줄 것을 수에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기꺼이 지었다. "살생을 꺼리는 것이 불문의 가르침이지만, 왕의 땅에 태어나 그 땅의 곡식을 먹고 사는 몸으로 감히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원광의 논리였다. 물론 걸사표를 지을 그때 원광은 수가 아니라 본국 신라에 있었던 차이도 있고(파약이 당시 수가 아니라 고려에 있었다면 또 어떻게 처신했을지 모를 일이다) 신변위협이든 조국에 대한 충성이든 섣불리 고려로 귀국하려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고려의 간자(첩자)로 몰려서 죽을 수도 있었다.(고려와 수 사이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라서 양국 사이의 적개심 내지는 반발심이 강했을 시기였다.)
파약이 613년에 국청사에서 쉰둘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을 때, 사람들이 파약을 장사지내는데 그의 시신이 갑자기 눈을 떴단다. 사후경직인지는 모르지만 이를 두고 사람들은 파약이 생전에 마음의 개안(開眼), 즉 깨달음을 이루었음을 죽어서 그 시신으로나마 증명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고려와 한창 전쟁을 벌이는 때라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고려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전쟁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징집되고, 그들 각자의 생업에 종사할 기회를 잃었다.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 불만을 품는 사람도 있었을 거고 보란 듯이 고려라는 나라에 그 불만을 풀어댄 사람도 있었을 거다. 고려만 없었으면 이런 전쟁도 일으킬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 사람은 뭔가에 불만을 품으면 그 뭔가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불만을 풀어대고 싶어한다. 그게 크든 작든 상관없이. 고려의 승려가 수의 땅 안에 있다는 것은 한창 고려와 전쟁을 치르는 수로서도 적잖이 민감한 문제였을 거다. 마음만 먹으면 간자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승려, 종교인들이다. 당연히 수 내부에 있는 다른 고려인들의 동향도 파악해야만 했다. 요원을 임명하든 현지 관리에게 감시를 맡기든 중앙 조정으로부터 '집중감시'되는 인물이 자기가 사는 동네에 있다면 꺼림칙하겠지? 파약이 고려인 승려라는 점에 주목해 그를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었던 상황인데도 끝내 사람들이 파약을 죽이지 않고 《고승전》의 여러 고승들의 이름에 '곁가지로나마' 올려두었고, 그가 죽은 뒤에 시신을 장사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은 파약이라는 인물이 승려로서 누렸던 위상이 현지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5>제26대 영양왕(1)|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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