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9>제26대 영양왕(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5>제26대 영양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0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6>제26대 영양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7>제26대 영양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8>제26대 영양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9>제26대 영양왕(5)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0>제26대 영양왕(6)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1>제26대 영양왕(7)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2>제26대 영양왕(8)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8
괴이하다면 괴이하달까, 특이하면 특이하달까. 내가 갖고 있는 취미 중에 좀 괴이한 것을 하나 들라면, 공중파에서는 이미 방영이 끝난 드라마를 찾아다니며 다시보기를 하는데, 어떤 편수, 특히 내가 마음에 들어하던 그 대목만 몇번이고 보면서 나중에는 소리만 들어도 어떤 장면인지 머리속에 어떤 대사와 어떤 모습이 이어질지 다 떠오르는 그런 경지까지 돼야 그만두는 것이다.
지나간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많지만, 특별히 한 대목만 계속 보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그나마 내 기준에서 생각해서 재미있는 대목만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별로 감흥을 얻지 못한 대목을 몇번씩 돌려보고 다시보고 하는 짓을 보통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철 지난 드라마의 명장면, 내 기준에서 마음에 드는 장면만 몇번이고 눈과 귀로, 입으로 외울 때까지 보고, 기분나쁜 대목은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역사란 마치 지나간 드라마와 같다. 어떤 일정한 기간을 두고 기록된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개개인이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특히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풍파에 휩쓸리는 대목은 다들 기억하고 싶지 않아한다. 역사나 드라마나, 모두가 보기 좋고 기분좋은 해피엔딩만을 기록할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할수 있다면 좋은 것만을 기억하고 행복한 일만을 되풀이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
[二月, 帝御師, 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等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2월에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여러 군대가 모두 모여 물가에 다다라 큰 진을 이루었으나, 우리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병이 건너오지 못했다. 황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 군사들이 크게 닥치니 수병으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맞서 싸웠다. 우리 군사들은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여, 수병은 언덕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전사웅(錢士雄) · 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다. 여러 군대가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다. 우리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수가 고려를 치는 일은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요수에 이르러,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래서 임시 다리를 만들게 했더니 하필 그게 강 저너머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로 짧아서 괜히 가까이 갔다가 화살만 더 많이 맞고, 졸지에 강도 한번 못 건너본채 수많은 군사를 잃고 말았다. 어찌어찌 강을 건너기는 했는데....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到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 建置郡縣, 以相統攝.]
제군이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을 포위했다. 이는 곧 한의 양평성(襄平城)이다. 황제가 요하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3월
수 양제의 군대가 그토록 함락시키려 기를 쓰고 공격했던, 그러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성. 요동성은 《삼국사》에서 말한바 오열홀(烏列忽)인데, 지금의 요양(遼陽)이라 한다. 지금은 성벽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성은 없어지고 성을 둘러쌌던 해자만 물길로 쓰인다는데, 뭐 세월 탓도 있고, 지네들도 그렇게 깨진 자리를 곱게 볼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없애버렸던 것이겠지.
천지가 비로소 화육(化育)하매 낳아서 길러 주는 덕이 이미 넓으며, 황제가 법도를 세우매 어지러움을 평정하는 공이 이에 크다. 그러므로 능히 사해(四海)를 경륜(經綸)하고, 만방(萬方)을 무육(撫育)하는 것이다.
짐이 하늘의 명을 이어받아서 크나큰 짐을 떠맡게 되었기에 아름다운 공업(功業)을 일으키고 크나큰 계략을 폈다. 이에 해가 비치지 않는 지방까지도 모두 성교(聲敎)가 미치고, 배를 타고서 갈 수 없는 지역까지도 모두 조회하러 왔다. 그런데 요좌(遼左)에 있는 섬오랑캐만이 홀로 하늘의 명을 거역하였으니, 악함이 숙사(夙沙)보다도 더 심하고 죄가 훈험(獯獫)보다도 더 깊기에, 짐이 선대(先代)의 뜻을 받들어서 몸소 정벌을 행하였다. 이에 육사(六師)를 정돈하고 친히 삼령(三令)을 지휘하였는데, 위로 종묘(宗廟)의 신령함에 의지하였으니, 실로 유명(幽明)의 은덕에 의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대로 주벌을 모면해 온 역적을 한번 북을 쳐서 크게 평정하였으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오랑캐를 만리 밖에서 깨끗이 쓸어버리고 지금 이미 개선하였다. 여름날에 미쳐서 따스한 기운이 퍼지니 순종하여 함양함이 마땅하고, 만물과 더불어 새롭게 되니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는 것이 옳도다.
군사(軍事)를 제공한 여러 군(郡)들은 모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고, 군역에 종사한 장정과 공장으로서 탁군(涿郡)까지 갔던 자들은 2년간 세금을 면제하라. 임유관(臨渝關) 서쪽까지 갔던 자들은 3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유성(柳城) 서쪽까지 갔던 자들은 5년간 세금을 면제하라. 통정진(通定鎭) 서쪽까지 갔던 자들은 7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도료진(渡遼鎭)까지 갔던 자들은 10년간 세금을 면제하라.
요좌의 백성들은 새로 황제의 교화에 젖게 되었으니,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의대부(正議大夫) 위문승(衛文昇), 수상서좌승(守尙書左丞) 유사룡(劉士龍) 등을 파견하여 순무하면서 존문(存問)하게 하고, 이어 10년간 세금을 면제하며, 즉시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서로 통섭(統攝)하라. 만약 기이하고 특이한 재능을 갖춘 자가 있을 경우에는 재주에 따라서 임용하되, 중국의 백성들과 같이 하여 화이(華夷) 간에 차별을 두지 말라.
양제로서는 고려 서쪽의 요충지인 이 요동성을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만 요동 지역을 장악할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꽤나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 대업 8년(612) 4월 병오일에 내린 조서를 보면 요하 동쪽의 고려 백성들에게 10년 조세를 면제해주겠다는 것 하며, 아울러 고려 땅에 얼마나 '깊이' 들어갔느냐에 따라서도 차등을 두어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처를 양제는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소득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고려 땅으로 얼마나 깊이 진군했느냐를 두고 상을 줘야할 정도였다면, 당시 수의 군사들이 얼마나 고려 땅으로 진군하기를 꺼렸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夏五月, 初, 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士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諸將, “高句麗若降, 卽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不敢赴期,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여름 5월이었다. 이전에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올 때 황제가 경계하여 말하였다.
“모든 군사 일의 진퇴를 반드시 짐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리고 제멋대로 하지 말라.”
요동(고려)은 자주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제군에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 제장에게 명하였다.
“고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어루만져 받아주고 군사를 풀지 마라.”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 사람들이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때맞춰 바로 가지 못하고, 먼저 사람을 시켜 급히 아뢰는데, 회답이 올 때는 성 안의 방어도 역시 갖춰져서 적절히 나가 항거하며 싸웠다. 이러기를 두세 번 거듭했지만 황제는 끝내 깨닫지 못했다. 그후 성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삼국사》 속에서는 요동성에서 양제에게 항복을 청하려다 응답이 없자 다시 들어가 싸우고, 항복하겠다고 수의 군대에 서신을 보냈다가, 또다시 응답 없으면 들어가 싸우고 그랬다고 했는데, 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세세한 것 하나까지 일일이 양제에게 보고해야만 하는 상황인지라, 요동성에서 항복해오는(양제로서는 힘 안들이고 요동성을 얻을수 있는 절호의 기회)것을 못 잡았다고 하는, 말하자면 '네트워크 체계의 오류' 때문에 요동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내가 보기에 요동성에서는 수양제에게 보고가 가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불리하겠다 싶으면 일단 항복하는척 편지를 보내고, 그러면 저들은 우리가 항복하는줄 알고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양제에게 이것을 알려 허락을 받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고,그러면 저들이 공격하지 않는 사이에 다시 전열 가다듬어서 성 고쳐쌓고 무기 수리해서 다시 싸우는. 안 그랬으면 저렇게 뻔한 짓을 두번 세번이나 반복할 까닭이 없지 않겠나.
[六月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耶?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耶?”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6월 기미(己未: 11일)에,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살펴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힐책하였다.
“그대들은 스스로 관직이 높아서 또 가문을 믿어서, 나를 멍청하고 나약한 놈 취급을 하느냐? 수도에 있을 때 그대들은 모두 내가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낭패볼까봐 겁내서였겠지. 지금 내가 여기 온 것은 바로 그대들 행한 바를 보고 그대들 목을 베려는 것. 그대들은 지금 죽는 것을 겁내면서 힘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그대들을 못 죽일 줄 아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얼굴빛을 잃었다. 황제가 이에 성의 서쪽으로 몇 리쯤 떨어진 곳에 머물러 육합성(六合城)에 거하였는데, 우리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얼씨구. 처음부터 군사들을 바보로 만든게 누군데. 왕이 병법도 모르면서 장수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사사건건 끼어들면 패인이 될수도 있다. 《손자병법》도 안 읽었어?
[左翊衛大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 ○○數百里, 浮海先進,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를 수백 리에 뻗쳐서 바다를 건너 먼저 패수(浿水)에서 들어와,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 군사와 서로 맞닥뜨리자 진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렸다. 호아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달려오려 했으나,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말리면서 제군(諸軍)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호아는 듣지 않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다. 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 속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군사를 내어 호아와 싸우되 일부러 패하였다. 호아가 뒤쫓아 성으로 들어와 군사를 놓아 약탈하느라 다시 대오를 갖추지 못했다. 숨었던 군사들이 나오니 호아가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했다. 돌아간 병졸은 불과 수천 명이었다. 우리 군대는 뒤쫓아 배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대는 이에 후퇴하였다. 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바닷가 포구로 돌아가 주둔하면서, 감히 다시는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6월
평양성 60리 되는 곳에서 고려군을 깨뜨린 기세를 몰아, 수의 군대는 그대로 평양으로 밀고 들어와 평양의 나성, 즉 외성(外城)에 이르러 약탈을 자행했고, 그때 외성의 어느 빈 절에 몰래 숨어있던 고려군이 나와서 겨우 수천 명만 남기고 다 죽였다.
고려의 수도인 평양 안에 승려가 없는 텅빈 절이 있었고, 그곳에 고려군이 군사를 숨겨두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 불교 세력의 퇴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불교 승려들이 군사로서 일어나 싸웠던 소위 '승병(僧兵)'의 존재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흔적은 아닐까 한다. 《인왕경》, 《금광명경》의 가르침에 의거한 '호국불교'의 가르침에 의해,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무기를 들고 일어나 싸우는 것이다. 내호아의 군대가 평양의 나성을 약탈했고, 그 군대를 쳐서 깨뜨린 군사들이 숨어있던 그 장소가 하필 '절'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高元弟建武募敢死士五百人邀擊之]
고원(高元)의 아우 건무(建武)가 결사대[敢死士] 5백 명을 모아서 요격(邀擊)하였다.
《수서(隋書)》 권제64, 열전제29, 내호아
참고로 《수서》 내호아열전에 기록된 바, 이때에 평양성에서 결사대 5백 명을 이끌고 내호아의 군사들을 쫓아버린 주역은 대원왕의 제왕자(弟王子) 건무(建武). 훗날 고려 제27대 영류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인물이다.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 右禦衛將軍張瑾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出碣石道, ○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出增地道, 皆會於鴨○水西.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 · 槍○幷衣資 · 戎具 · 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掘坑埋之, ○行及中路, 糧已將盡.]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나오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나오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檢校右禦衛虎賁郎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瀘河) · 회원(懷遠)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 동안의 군량을 주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석 섬 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렸다.
“군량을 버리는 놈은 베겠다.”
때문에 사졸들은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행군이 겨우 중도에 미쳤을 때 군량이 이미 떨어지려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별별 짓을 다해도 요동에서 발이 묶여서 앞으로 더 나아갈 방법을 못 찾으니, 양제는 마침내 별동부대를 구성해 고려의 수도 평양으로 보낸다. 고려군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요동의 땅을 우회해 가서, 고려의 심장부를 먼저 부숴버리겠다는 생각이었으리라.
허나. 별동대라는 것은 특수부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예 '특공대'쯤 되는 것들인데, 하는 꼴을 보니 도무지 '특공대'는 고사하고, 송나라 부대나 안 되면 다행일까. 이 무렵 군사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과, 쓸 무기, 갑옷, 방패를 모두 자기가 직접 준비해서 전쟁에 나갔는데, 이 외에도 전투병력의 물자를 뒤에서 보급할 보급부대가 항상 따라다녔다. 수의 200만 대군도 들여다보면 반 이상이 순수한 전투병력이 아닌, 후방지원을 위한 보급병력이다.
그러나 막상 보급이 끊겨버리면 전투병력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고려의 군대가 여기저기 샛길로 비집고 가서 수 군대의 보급을 후방에서 끊어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일찌기 수 문제가 고려를 쳤을 때에도, 고려의 수군이 때아닌 폭풍을 빌어 해상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고려로 더이상 진군 못하고 퇴각해야 했던 일이 있다.
13세기 몽골 군대가 그 당시 세계 각지의 군대에 비해 우위를 점할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보급'의 문제를 정복지에서의 '약탈'로 충당해서, 언제 끊어질 위험이 있는 후방 지원을 구태여 따로 받을 필요도, 무거운 보급품을 지고 다니느라 기동성이 떨어질 염려도 없었기 때문이며, 성을 지키며 보급로를 차단하는 고려의 청야수성 전술에 번번이 깨지기만 하던 당의 군대가 고려의 청야수성을 깨뜨릴수 있었던 것도, 그들 후방에서 신라의 군량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져보면 군사의 숫자나 화력만큼, 물자 보급도 원활해야만 전쟁할수 있는 것.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이라도 결여되면 군대는 유지될수 없다. 수 문제가 처음 고려를 원정했을 때에도, 때아닌 폭풍을 틈타 고려의 병마원수 강이식이 주라후의 보급부대를 격파해버렸던 적이 있으니, 수로서는 언제 고려가 자신들의 보급로를 끊고 압박해올지 걱정이 되었을 터. 그러니 보급 부대가 지고 날라야 할 식량을 아예, 전투할 군사들이 직접 갖고 다니라고 미리 1백일 먹을 식량을 나눠준 것 같은데, 이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식량뿐 아니라 무기까지 들고 있으니 부담은 더 클수밖에 없다.(젠장할, 수학 못 하는 것이 여기서 또 티 나네) 식량에 무기까지 합쳐 모두 3섬이라고 했으니, 1말의 열 배인 1섬을 약 180L로 잡았을 때 3섬은 540L. 1L=1kg이라 했을때 적어도 540kg 가량의 무거운 짐을 병사 한 명당 짊어지고 가야 했다는 말이 된다.(참고로 요즘 우리나라 군대의 군장은 25kg.) 그래 이 무거운 걸 지고 갈 방법이 없어 결국 땅에 내버리고 묻어버리고 하니까 나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쫄쫄 굶고 하다못해 무기를 버리더라도 식량만 안 버렸으면 저렇게 굶지는 않았을텐데(공자님도 식량은 무기 다음으로 버리랬는데...), 하필 또 이 고려의 청야수성이라는 것이, 성밖의 곡식이며 우물같은 적군이 보급을 얻을수 있을만한 물건은 모두 없애버리는 전술이다보니 저것들은 먹을 것 없어서 한 마디로 엿된거지.
[遼東之役, 仲文率軍指樂浪道. 軍次烏骨城, 仲文簡羸馬驢數千, 置於軍後. 既而率眾東過, 高麗出兵掩襲輜重. 仲文回擊, 大破之. 至鴨綠水, 高麗將乙支文德詐降, 來入其營.]
요동(遼東)의 역(役)에서 중문(仲文)은 군사를 이끌고 낙랑도(樂浪道)를 지휘하였다. 군이 오골성(烏骨城)에 이르니 중문은 여윈 말과 나귀 수천을 가려 군의 뒤에 두었다.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을 지나자 고려가 출병하여 운반하던 군수품을[輜重] 엄습하였다. 중문이 회격(回擊)하여 크게 깨뜨리고 압록수에 이르니 고려의 장수 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그 군영으로 들어왔다.
《수서(隋書)》 권제60, 열전제25, 우중문
오골성 동쪽에서 고려군과 맞닥뜨렸다는 이야기는 《삼국사》에 나오지 않는다.
[焉骨山在國西北, 夷言屋山, 在平壤西北七百里. 東西二嶺, 壁立千仭. 自足至頂. 皆是蒼石. 遠望巉巖, 狀類荊門三峽, 其上無別草木, 唯生靑松, 擢幹雲表, 高驪於南北硤口, 築斷爲城、此即夷藩樞要之所也.]
언골산(焉骨山)은 나라의 서북쪽에 있는데 이언(夷言)으로는 옥산(屋山)이라고 하니, 평양의 서북쪽 7백리에 있다. 동서로 두 개의 영(嶺)이 있고 절벽이 서있는데 천 길이나 되고[千仭]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창석(蒼石)이다. 멀리서 참암(巉巖)을 보면 장히 형문(荊門)ㆍ삼협(三峽)과 같은 류라, 그 위에는 특별한 풀과 나무는 없고 푸른 소나무가 자라는데 그 뻗어나온 줄기가[擢幹] 구름 위에 떠있다[雲表]. 고려는 남북의 협구(硤口)를 축단(築斷)하여 성을 이루었다. 이는 곧 이번(夷藩)이 추요(樞要)하는 바다.
《고려기(高麗記)》인용
《한원(翰苑)》번이부(蕃夷部), 고려
《한원》에 나오는 언골산(焉骨山) 말인데, 어쩌면 저건 오골산(烏骨山)의 오자가 아닐까 하고 개인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라고 내세우기에는 부끄럽지만 우선 언(焉)과 오(烏)의 글자가 비슷하게 생겼고 평양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7백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것이 지금 우리가 비정하고 있는 오골성의 위치(봉황성)와 얼추 맞아 떨어지며, 현재 봉황성의 지형 또한 깎아지른 절벽이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고려 현지에서 옥산(屋山)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오골'과 '옥'의 음이 서로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에다 성을 쌓는 일이 많아서 한산(漢山)을 한성(漢城)이라고 적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산'과 '성'의 의미가 서로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산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을 '골'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려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경우 '옥산(屋山)'이란 '옥성(屋城)'으로도 적을 수 있고, 또한 '옥홀(屋忽)'로 적을 수도 있다. 옥홀을 다시 '옥골(屋骨)'로 적게 되면 오골성의 '오골'과 '옥골'은 발음상 별로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언골산의 정체가 오골성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오골성을 지나 수의 군사들은 압록수에 닿았다. 지금의 압록강이다.
[馬訾水、高驪一名淹水, 今名鴨淥水, 其國相傳云, 水源出東北靺鞨國白山,色似鴨頭, 故俗名鴨淥水,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 高驪之中, 此水最大, 波瀾清潔澈, 所經津濟皆貯大船, 其國恃此以爲天塹. 今案, 其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也. 刀小船也. 船, 毛詩曰, 詎河廣, 曾不容刀也.]
마자수(馬訾水)는 고려(高驪)에서는 엄수(淹水)라고도 한다. 지금의 이름은 압록수(鴨淥水)다. 그 나라에서 서로 전하기로는 이렇다. 물의 근원은 동북쪽 말갈국(靺鞨國)의 백산[白水]에서 나오는데 색깔이 오리의 머리와 비슷하다 해서 속명으로 압록수(鴨淥水)라 하고, 요동에서 5백리 떨어져 있으며 국내성 남쪽을 지나 또 서쪽으로 한 줄기 강과 합치는데 곧 염난(鹽難)이다. 두 강이 합쳐져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안에서 이 강이 가장 크고, 물결은 맑고도 깨끗하니, 띄우고 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저대선(貯大船)이라, 그 나라에서는 이곳을 믿어 천참(天塹)으로 삼았다. 지금 상고해보니 그 물은 폭이 3백 보(步)로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450리에 있다. 작은 배(船)를 띄울 수 있다. 선(船)은 《모시(毛詩)》에서 『詎河廣曾 不容刀也』라 말한 그것이다.
《고려기(高麗記)》인용
《한원(翰苑)》번이부(蕃夷部), 고려
압록수라는 강은 지금의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일까.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도 서긍의 《고려도경》처럼 진대덕이라는 당의 사신이 직접 고려의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지은 일종의 '견문록'인데, 그 목적은 고려의 주요 요새들의 위치와 지세, 주변 지리를 염탐해서 당조에 보고하기 위한 것으로 구태여 당시 사람들이 헷갈리라고 원래와 다른 지명을 적어놨을 리가 없다. 그런데 《고려기》당시의 고려 사람들이 지금의 압록강을 마자수라고 불렀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려의 장수 을지문덕. 고려와 수의 전투에서 지워지지 않을 대승을 거둔 위대한 역사의 주역이자, 고려가 자랑하는 용장이다.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 선대의 계보를 알 수 없다.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겸하여 글을 알고 지을 수 있었다.
《삼국사》 권제44, 열전제4, 을지문덕
《삼국사》는 을지문덕의 출자를 알수가 없다고 했는데, 조선조의 홍양호라는 사람이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는 평양의 석다산(石多山), 그러니까 조선조에 증산현(甑山縣)이라 불렸던 곳이 을지문덕의 출생지라고 했다.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 외교권을 빼앗긴 이듬해(1906)에 나온 잡지 《서우(西友)》제1호의 인물고에서는 그를 평양군 석다산 사람으로 기술했다. 후대의 자료라서 확실하지는 않고 민간전승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삼국사》의 자료수집 능력이 굉장히 형편없다는 것은, 신라 최치원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삼국사》에서는 최치원의 선대 계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최치원 본인이 직접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견일'이라고 밝힌 것이 그가 지은 《대숭복사비》 비문에 나오거든. 문집 《계원필경》에도 나오고. 명색이 역사책을 쓴다는 양반이 간단한 사전조사도 안 해놔서 그런 것도 제대로 모르고 '그 출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라고 했으니 또 돌겠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을지문덕의 사적이 《요산당외기(堯山堂外記)》라는 책에 자세히 나온다고 했는데, 부식이 영감은 대체 《요산당외기》라는 책이 뭔지 알기나 했을까?
《혁명기(革命記)》에는 을지문덕의 '을(乙)'을 '울(尉)'로 적었지만 《북사》와 《수서》에는 '을'자로 나오고, 《자치통감》은 두 책을 따라서‘을’자로 썼다. 그의 이름이 울지문덕(尉遲文德)이라고도 표기된 것에 대해서, 혹자는 그의 선대가 원래 흥안령 동쪽 흑룡강 지류에 살다가 고려에 귀화한 탁발(拓拔) 선비족의 일파가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편 단재 선생은 지금도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돈(頓)씨의 족보를 들어 을지문덕의 '을지'를 벼슬 이름이라고 <조선사 연구초>에서 서술하신 바가 있는데, 지금도 《돈씨가보(頓氏家譜)》에서는 을지문덕이 원래 을(乙)씨로서 옛날 유류왕과 고국천왕 때의 을소와 을파소가 그 선조였던 것을 을지문덕 때에 개명했으며, 고려 때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세 사람이 묘청의 난 때 공을 세워 돈산백이란 봉함을 받은 것이 오늘날 목천 돈씨의 유래가 되었다는 기록을 실어놓고 있다. 이 기록이 정말 사실이고 돈씨가 정말 을지문덕의 후손이라면 굉장한 일이겠지만(아마 지금이라도 당장 을지문덕의 성인 '을지'씨로 개성해야 할 걸.) 족보에 기록된 걸 모두 믿을 수는 없는 일. 여기서는 그냥 그런 '썰'도 있다는 것만 적어둘 뿐이다.
단재 선생은 '을지'를 벼슬의 이름으로 보셨는데, 일본 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도 비슷한 주장을 한 것 같다. 그는 《진서(晉書)》숙신전에 나오는 '을력지(乙力支)'를 '일치'로 읽었는데, 퉁구스족의 말로 '사자(使者)'를 가리키는 말이 '일치'라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이 주장을 단재 선생이 <조선사 연구초>에서 일부 인용하시면서, 고려의 벼슬 가운데 하나였던 울절(鬱節) 즉 주부도 '일치'이고 '사자'의 뜻이며, 옛날 마한에 있었던 '읍차(邑借)'와 같은 종류의 '벼슬'이었다고 말씀하셨다.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그 진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은 그 허실을 보려 한 것이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을지문덕은 스스로 '생간(生間)'을 자청해서 수의 진영에 들어가 적진을 직접 염탐하고 돌아왔다. 《손자병법》에서는 '간첩'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적의 부대를 공격하던지 성을 공략하던지, 적국의 요인을 암살한다든지 할 때에는 반드시 미리 아군의 첩자를 시켜 대상 지역의 수비장수, 보좌관, 심부름꾼, 문지기, 호위병의 이름이나 인적 사항까지도 다 알아내야 한다고 손자는 말하고 있다. 그래 수의 장수들은 그걸 모르고 을지문덕이 항복하러 왔다는 말에만 속아 자기네들 지친 걸 훤히 다 보여주고, 을지문덕은 '아, 그러셨쎄요?' 하고 돌아가고....
[于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文德不顧, 濟鴨淥水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우중문이 앞서
“만약 왕이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도록 하라.”
는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중문이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서 굳이 말리므로, 중문이 마침내 그 말에 따라 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얼마 후에 그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문덕을 속여 말하였다.
“다시 이야기하고 싶으니 다시 오시오.”
그러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중문과 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 속으로 불안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우리가 미쳤니. 볼거 다 봤는데. 양제에게 질책받을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놓아보낸 을지문덕이 사실은 항복을 청하러 온 사자가 아니라 첩자였음을 나중에야 '아차' 알아채고 불안했던 거겠지.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古之良將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時帝以仲文有計○,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渡水追文德.]
술은 군량이 떨어졌으므로 돌아가려 했다. 중문은 정예군으로 문덕을 쫓으면 공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술이 이것을 굳이 말리니 중문이 성내며 말했다.
“장군은 10만 군사에 의지하고도 작은 도적을 깨뜨리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려 하는가? 또한 중문은 이번 걸음에 본래 공로가 없을 것을 알고 있었소. 왜냐면 예전의 훌륭한 장수가 능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이때 황제는 중문이 계획이 있을 것으로 여겨, 여러 군대로 하여금 지휘를 묻고 품의하게 했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때문에 술 등은 어쩔수 없이 그의 말에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물을 건너 문덕을 쫓았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의 군대에서는 장수들간의 의견다툼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이렇게 자기네들 장수가 엉망이었느니, 갑자기 폭풍을 만나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다느니 하는 식의 기록들은, 자신들이 고려라는 조그만 나라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한족들의 자기도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述一日之中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문덕은 술의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짐짓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도망가니, 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이미 여러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의 의논에 떠밀려, 이리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문덕은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며 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대를 돌리시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로 찾아가 뵙겠습니다.”
술은 사졸들이 피로하고 쇠약해져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또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해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움을 헤아리고, 마침내 그 속임수에 따라 되돌아갔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먹을 것도 없어서 굶주리는 부대를 적의 코앞까지 끌고 온 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유능한 지휘관은 능동적인 위치에서 적을 끌어들이지 피동적으로 적에게 끌려가지는 않는다."
"아군의 뜻대로 적을 끌어들이려면 작은 이익을 미끼로 적을 유인해 적이 스스로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게 해야 한다."
《손자병법》 허실편에 나오는 말이다. 주도권을 장악하고 아군의 행동에 자유를 보장한다는, 전쟁을 지도하는데 중요한 원칙의 하나로 훗날 당 태종의 군사(軍師) 이정도 극찬했던 100% 참명제. 을지문덕은 이러한 병법의 가르침대로 수의 군사들을 유인했고, 어떻게든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던 수의 군사들은 승승장구 평양성까지 이끌려, 살수를 건넜다. 그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건넌 그 살수가, 한번 건너면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황천의 강'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 신이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天文]를 꿰고
妙算窮地理 기묘한 책략은 땅의 이치[地理]를 통달했구료.
戰勝功旣高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은데,
知足願云止 만족한줄 아셨으면 이제 그만두시지요.
중문이 답서를 보내 달래니(?), 문덕이 또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고, 술에게 말하였다.
“군사를 돌려 가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직접 뵙겠다.”
술은 군사들이 피로하고 고달파함을 보고 더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평양성이 험하고 단단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움을 알고는 마침내 그 거짓(항복)을 핑계삼아 돌아가는데, 방진(方陣)으로 편성하여 행군하였다.
《삼국사》 권제44, 열전제4, 을지문덕
이것이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 《동명왕편》의 작가 이규보가 "구법(句法)이 기고하여 화려하게 꾸민 흔적이 없는" 후세 사람들은 감히 흉내도 못 낼 명작이라고 평가했던 그 시이니라. 한미 FTA 협상 때 우리측 협상단이 미국 협상단에게 영문번역해서 보내기도 했던 그 시. 중국 도교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지족(知足)', 그것은 곧,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것'.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나쁘게 말하면 '네 주제를 알고 지껄여라'는 말과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꿈에 대해 신나게 말하는데 그 앞에서 "네 주제나 알고 그런 소리 떠들어"라고 하면 기분이 더러울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우중문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한자를 쓰다 보니까, 자기 본뜻을 '원색적으로'전달하기는 쉽지 않았겠지?
신이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꿰고
(참을 만큼 참았어)
기묘한 책략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구료
(갈때까지 갔어)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은데
(이제 많이 놀았잖아)
만족한줄 아셨으면 이제 그만두시지요
(그만하고 당장 꺼져).
이 정도는 돼야 진짜 번역미가 나지.
뭐, 바보가 아닌 이상 그래도 명색이 수의 장군이나 되는 작자들이, 이 시가 자기들에게 무슨 말을 전달하려고 쓴 것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더구나 도교의 가르침까지 인용해놨는데. 알아차렸던 걸까? 을지문덕이 일부러 자신들을 이 사지(死地)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을. 말 그대로 별동대다. 군사들은 자신들의 식량이며 무기를 모두 행군하면서 조금씩 내버리고 온 터라 많이 지쳐있고, 더구나 이 사실을 을지문덕이 안 이상 고려군 측에서는 반격해올 것이다. 요동의 주력군과도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이 굶주린 병사들을 데리고 진 치고 있다가 고려군의 공격을 받기라도 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끝장. 결국 수의 별동대 30만은 퇴각을 결정한다.
허공(許公)이 즉시 평양성 첫머리에 이르자, 고려(평양)에서 즉시 항복하는 깃발을 성 위에 꽂고 닷새 뒤에 고려의 지도와 호구 문서를 들고 성문을 열고서 명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닷새가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에 허공이 자주 재촉하였으나, 끝내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 뒤 또 열흘이 지나서 고려(평양)에서 말하였다.
"배와 양식은 다 패몰(敗沒)돼서 군사들이 모두 돌아갔습니다. 공께선 지금 뭘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러고는 비로소 항거하는 깃발을 세우고는 굳게 성을 지키면서 군사를 나누어 험고한 요충지를 차지하였다. 이에 허공이 비로소 고려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는데, 날마다 방진(方陣)을 치면서 후퇴한 탓에 사면에서 한꺼번에 고려군의 습격을 받아 살상된 자가 아주 많았으며, 양식마저 다 떨어져서 요수를 건너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다.
《자치통감》 고이(考異) 中 '혁명기(革命記)'
북송의 사마광이란 학자가 저술한 편년체 역사서 《자치통감》. 모택동(마오쩌둥)도 침대 위에 놔두고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고대 황제들의 통치방식을 연구했다는 그 책이다. 제왕들의 '정통성' 유무를 따지는 것은 훗날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지을 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지을 때에 《통감고이(通鑑考異)》라는 것을 30권 지었다. 자기가 인용한 역사책이 어떤 것인지, 이것과 다른 기록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자신이 판단한 것을 모아 일종의 '별책부록' 형식으로 만들어놓은 거다. 《통감고이》에서 인용한 이 《혁명기》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수는 철저하게 고려에게 속아넘어간 꼴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통쾌한 장면이다. 저건 누가 봐도 고려가 수를 놀리는 꼴이잖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擊,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薩水,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繫述等, 癸卯引還.]
술 등이 방형의 진을 이루고 행군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사방에서 습격하니 술 등이 이래저래 싸워가며 행군하였다. 가을 7월에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반이 건넜을 때, 우리 군사가 뒤에서 후군을 쳤으므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군대가 모두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장수와 사졸들이 도망쳐 돌아가니 하룻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러 450리를 행군했다. 장군인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사를 쳐서 물리쳤다. 내호아는 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이끌고 돌아갔으며, 오직 위문승의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하를 건넜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가 이르렀을 때는 겨우 2천 7백 명이었으며, 쌓아둔 기계는 억만을 헤아렸지만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25일)에 끌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살수대첩(薩水大捷). 수의 30만 5천 군사를 살수에서 작살내고 겨우 2,700명만 살려 보냈다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승리의 하나. 훗날 고려 강감찬의 구주대첩과, 조선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우리 역사의 3대 대승리로 손꼽히게 될 위대한 역사의 한 장이다.
<수의 별동대 30만을 거의 궤멸시킨 고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때 수의 백만 대군 모두가 살수에서 물고기밥이 되었다는 것이나, 이때 고려군의 전술이 수공(水功), 즉 강 상류쪽에서 물을 막아두었다가 수의 군대가 반쯤 건널 무렵에 그걸 터뜨려서 싹쓸이를 해버렸다는 이야기인데, 이건 안주에 있는 칠불사연기설화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안주목조에 보면,
칠불사(七佛寺)는 북성(北城) 밖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였다.
“수(隋) 병사가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배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일곱 중[僧]이 강가에 와서 여섯 중이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니, 수의 병사가 보고 물이 얕은 줄 알고 군사를 지휘하여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내에 가득하여 흐르지 않아,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일곱 중처럼 일곱 돌을 세워 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52, 평안도 안주목
이라고 했다.(이건 저기 관촉사 은진미륵의 전설과도 흡사하다.) 우리 나라에서 살수대첩과 같은 전술을 쓴 것이 실제 기록으로 등장하는 것은 강감찬 장군 때의 일인데, 삽교천에서 쇠가죽으로 강 상류를 막아두었다가 거란군이 지날 때에 갑자기 쇠가죽을 뚫어 한꺼번에 많은 물을 쏟아부어 거란군의 절반을 싹쓸이해버렸다는 것은 《고려사》 강감찬열전에도 실려있는 이야기다.
실상 이때 고려군에게 대파당한 것은 수의 별동대, 즉 30만 5천 명이고, 나머지는 저기 요동성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수의 군대가 모두 백만이었는데, 이때의 싸움으로 별동대가 전멸당하자 수 양제가 결국 전의(戰意)를 잃고 나머지 군대를 모두 데리고 퇴각했으므로, 사람들이 살수의 싸움 한 번으로 백만 대군을 몰아내버렸다고 한 것이, 언젠가부터 살수의 싸움 자체에서 백만 대군이 모두 죽었다고 와전이 된 거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그렇다고 이 전쟁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쇠가죽을 막아서 터뜨렸는지 어쨌는지는 오늘날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손자병법》에 '물'하고 관련해서, 적이 물을 건널 때에는 조급하게 물속에서 적을 쳐부수지 말고 적의 병력 절반이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는 했다. 물을 다 건너기도 전에 아군을 보지 못하도록 물가에 너무 붙어서 싸우지도 말고, 적이 전진하지도 후퇴하지도 못하는 중간 지점까지 올 때를 기다려서 싸우라는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도 어쩌면 그걸 알고 있었을지도.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이 살수의 위치에 대해서 청천강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정복의 지리 고증을 따른 것이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살수고(薩水考)에서, 《삼국사》 대무신왕 27년(AD.44)의 기록,
“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살수 이남은 한(漢)에 붙였다.”
라고 한 것과, 광무제 말기인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때의 국토가 동쪽으로 창해(滄海, 동해), 남쪽은 살수(薩水)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보고, 안정복 영감은 청천강을 살수로 비정했다.(낙랑이 평안도에 있다고 보고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이때의 전투ㅡ 살수대첩에 대한 기록에서도, 안정복 영감은 수의 우문술(宇文述)이 압록강에서 전진해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군진을 설치했다는 것, 우문술 등이 도로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고려군이 뒤에서 그 후군(後軍)을 쳤다는 기록을 들어서, 살수는 지금 평양의 북쪽에 있었으며 안주의 청천강임이 분명하다고 거의 확신에 가까운 고증을 했었다. 아직 이 설이 우리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이 청천강이 실은 압록강에 있는 태자하 강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후)고려조에 이르러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백상루라는 누각이 지어졌는데, 조선조의 개국공신 조준이 명(明) 사신을 맞이한 자리에서 이곳 안주 백상루에 올라 청천강을 내려다보며 시 한 수 읊었던 것이 《동문선》에 실려 전한다.
薩水湯湯漾碧虛 넓고 넓은 살수(薩水) 물결이 허공에 넘실거리는데
隋兵百萬化爲魚 수(隋)의 백만 군사 물고기밥 되었구나.
至今留得漁樵話 지금도 고기잡이며 나무꾼들이 이야기하긴 한다만
不滿征夫一笑餘 나그네들 비웃음거리도 못 되는 것을.
<안주 백상루. 이곳에서는 청천강을 한눈에 내려다볼수 있다고 한다.>
이 백상루가 있는 안주읍성은 고려 때에 처음 쌓았고, 조선조 1753년 읍성으로서의 면모가 갖춰졌으며, 이때 백상루도 함께 개수되었다. '관서 8경(景)'의 하나로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 불리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해왔다. '백상루(百祥樓)'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6.25때 폭격으로 박살난 것을 복원하여 지금은 1977년에 본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400m 옮겨 세운 것이다.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智牟, 入隋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厲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처음 백제왕 장(璋: 무왕)이 사신을 보내 고려를 칠 것을 청하자 황제가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시켰다. 장은 속으로는 우리와 몰래 짰었다. 수의 군대가 장차 출동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수에 들여보내 출병할 시기를 알려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모일 시기를 알렸었다. 수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양단책을 썼다. 이 정벌에서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그리고 백제. 비록 수 양제가 고려를 친다고 할때에 돕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정작 백제가 수를 도왔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도 '안으로 몰래 우리(고려)와 통했다', '말로는 수를 돕는다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쳤다'라는 기록처럼, 백제로서는 그 싸움의 결과가 어떨지 뻔히 알고 있었던지, 아니면 정말 어떻게 될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돌아가는 상황 봐서 결정한다는 의도로 그랬을 지도.
백제는 고려와는 동족이기는 하지만 또한 서로가 윈윈(win-win)으로 각자 서로 왕 한 명씩 죽여가며 첨예하게 싸우던 원수지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무렵의 백제는 고려 말고도, 신라라는 골칫거리를 또하나 안고 있었기에, 고려와의 사이가 안 좋아지면 그것도 또 문제가 될 터. 새로 커진 신라와 싸우기 위해서는 고려와 소원한 사이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른바 여제동맹(麗濟同盟). 정말 그런 동맹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대충, 어중간하게 고려와 백제는 신라와 수(당)에 대항해 맞서는 우호국같은 사이가 되었다.
[十一月己卯, 以宗女為華容公主, 嫁高昌. 甲申, 與於仲文等皆除名為民. 斬劉士龍以謝天下. 薩水之敗, 高麗追圍薛世雄於白石山, 世雄奮擊, 破之. 由是獨得免官. 以衛文昇金為紫光祿大夫, 諸將皆委罪于于仲文. 帝既釋諸將, 獨系仲文. 仲文憂恚, 發病困篤, 乃出之, 卒於家.]
11월 기묘에 종실 여자를 화용공주로 삼아 고창에 시집보냈다. 우문술은 본래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또한 그 아들 사급(士及)이 제녀(帝女) 남양공주(南陽公主)에게 장가들어[尙] 있었으므로 황제는 차마 벌을 주지는 못하고, 갑신에 중문 등의 직명을 모두 박탈하고 일반 백성으로 만들었다. 유사룡을 참수하여 천하에 사죄하였다. 살수의 패배로 고려는 설세웅을 추격해 백석산에서 포위하였는데 세웅은 奮擊하여 깨뜨렸다. 때문에 홀로 免官을 얻었다. 위문승(衛文昇)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되었으며, 여러 장수들 모두 우중문에게 죄를 떠넘겼다[委罪]. 황제는 마침내 여러 장수들을 용서하였으나 중문만은 끝까지 죄를 물었다[獨系]. 중문은 근심하고 또 분노하여[憂恚] 병을 얻었는데 몹시 심해지자[困篤] 나와서 자기 집에서 죽었다.
《자치통감》 권제181, 수기(隋紀)제5, 대업 8년 임신(612)
죄의 대가(?)는 무거운 것.... 우중문과 우문술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 뒤(어려운 말로는 '삭탈관직'이라고 하죠 이걸) 서민으로 전락했고, 양제의 말 생까고 을지문덕 보내주는 바람에 패전의 결정적인(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요인을 제공한 위무사 유사룡은 참수, 살수 싸움에서 살아남은 위문승만이 금자광록대부 벼슬을 수여받았다. 역시 뭐든 안 시킨 건 안 하는게 제일 좋다니까. 헛참.
[遼東之役, 以世雄為沃沮道軍將, 與宇文述同敗績於平壤. 還次白石山, 為賊所圍百餘重, 四面矢下如雨. 世雄以羸師為方陣, 選勁騎二百先犯之. 賊稍卻, 因而縱擊, 遂破之而還. 所亡失多, 竟坐免.]
요동의 역에서 세웅을 옥저도군장(沃沮道軍將)으로 삼았는데 우문술과 함께 평양에서 패적당했다. 돌아오다가 백석산(白石山)에 주둔했는데, 적들이 백여 리나 포위하고 사방에서 비오듯 화살을 쏘아댔다. 세웅은 야윈 군사들을 모아 방진을 짜고 경기(輕騎) 2백을 뽑아 앞장서서 쳤다. 적이 조금 물러나자 이 틈을 타서 휘몰아쳐 드디어 그들을 깨뜨리고 돌아왔다. 잃은 것이 많았으므로 죄를 받아 면직되었다.
《수서(隋書)》 권제65, 열전제30, 설세웅
"두 군이 모두 치욕을 당하고 장졸 중에는 후(侯)로 봉해진 자가 없었다."
사마천이 《사기》 조선열전에서 읊은 말이다. 한 무제의 명으로 조선을 공격한 장수들은 대부분 어떠한 훈공도 받지 못하고, 대부분 서인으로 전락하거나 처형당했다. 오늘날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이 비록 그 나라를 멸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싸움'으로 기억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수도 마찬가지였다.
[其後複征遼東, 以軍將指肅慎道. 至鴨綠水, 與乙支文德戰, 每爲先鋒, 一日七捷. 後與諸軍俱敗, 竟坐免.]
그 뒤 다시 요동을 정벌할 때 군장(軍將)으로서 숙신도(肅慎道)를 지휘하였다. 압록수에 이르러 을지문덕과 싸울 때 매번 선봉장이 되어 하루에 일곱 차례를 싸워 이겼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군과 함께 패하였으므로 좌죄되어 면직되었다.
《수서(隋書)》 권제63, 열전제28, 양의신
차라리 전쟁에 나가지 말지 그랬나. 그랬다면 저런 모욕을 당할 필요도 없었을 것을. 그놈의 전쟁이 대체 뭐길래 사서고생을 해갖고 그렇게 관직도 지위도 다 잃고 집안 망치고 자기 몸까지 버리는가.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다. 하기야 전쟁을 하든 말든 그건 내 알바 아니지. 이미 천년도 더 전의 이야기를 하면서 난 관전인으로서 사태추이에 대한 평가만 할 뿐이니까.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9>제26대 영양왕(5)|작성자 광인
'고구려 > 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1>제26대 영양왕(7) - 광인 (0) | 2012.02.01 |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0>제26대 영양왕(6) - 광인 (0) | 2012.02.01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8>제26대 영양왕(4) - 광인 (0) | 2012.01.27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7>제26대 영양왕(3) - 광인 (0) | 2012.01.27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6>제26대 영양왕(2) - 광인 (0) | 2012.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