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188402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8>제26대 영양왕(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5>제26대 영양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0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6>제26대 영양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7>제26대 영양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8>제26대 영양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74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9>제26대 영양왕(5)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0>제26대 영양왕(6)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1>제26대 영양왕(7)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2>제26대 영양왕(8)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2848  

[十八年春三月, 高麗王貢上僧曇徵, 法定. 曇徵知五經, 且能作彩色及紙墨, 幷造碾磑, 盖造碾磑始于是時歟.]

18년(610) 봄 3월에 고려왕이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보내왔다. 담징은 오경(五經)을 알고 있었다. 또 채색 및 지묵을 만들고, 아울러 수력의 맷돌을 만들었다. 아마 수력의 맷돌을 만드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리라.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22, 스이코키(推古紀) 18년(610)

 

그리고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영양왕 22년ㅡ태세 신미(611) 2월 봄.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오는 고요한 요동의 초원에 전운이 감돈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22년(611) 봄 2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삼국사》에서는 뺐지만, 《수서》에 보면 양제의 조서 내용이 이렇게 나온다.

 

무(武)의 일곱 가지 덕(德)은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고, 정(政)의 여섯 가지의 근본은 의(義)를 가르침으로써 흥기시키는 것. 고려의 고원(高元)이 번국(藩國)으로서 예를 어그러뜨렸기에 장차 요좌(遼左)에서 죄를 물어 무력을 널리 펴고자 한다. 비록 다른 나라를 정벌하는 것이지마는, 인하여 사방을 순시할 것이다. 이에 이제 탁군에 가서 백성들의 풍속을 순무(巡撫)하겠다.

 

이건 뭐, 완전히 고려를 자기 지방 정권 정도로나 여기는 거 아냐.

지금 중국놈들 수준하고 수 양제하고 똑같다.


[夏四月, 車駕至涿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涿郡.]

여름 4월에 행차[車駕]가 탁군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2년(611)

 

안정복 영감은 《동사강목》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보충설명을 해놓으셨다.

 

수 황제[隋主]가 유주총관(幽州摠管) 원홍사(元弘嗣)를 시켜서 동래(東萊)의 해구(海口)에 가서 선박 3백 소(艘)를 만들게 하고,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집해 탁군에 모이게 했다. 또 강회(江淮) 이남의 배 타는 사람[水手] 1만 명, 활쏘는 사람[弩手] 3만 명, 영남(嶺南)의 창 쓰는 사람[排鑞手] 3만 명을 동원하니, 이에 사방에서 물처럼 모여들었다. 수 황제가 탁군의 임삭궁에 이르러서 하남(河南)ㆍ회남(淮南)ㆍ강남(江南)에 명하여 전차[戎車] 5만 대[乘]을 만들어 옷과 무기를 모두 싣고 병사들로 끌게 하며, 하남ㆍ하북(河北)의 백성을 징발하여 군수품을 공급하게 하니, 온 천하가 시끌벅적했다. 이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원병할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백제는 국지모(國智牟)를 보내어 동병할 시기를 알려 주길 청했다. 수 황제는 기뻐하여 후히 상을 주고, 기거랑(起居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백제왕과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동사강목》 권제2하(下), 신미년(신라 진평왕 33년,

고구려 영양왕 22년, 백제 무왕 12년: 611)

 

《동사강목》에서는 수의 문제와 양제에 대해서 시종일관 주(主)라고 부른다.

같은 '임금'을 가리키는 글자임에도 왕(王)이나 제(帝)보다도 급이 더 떨어지는 글자다.

'정통성'의 유무라는 것을 따져서 정통성이 있으면 '왕' 또는 '제'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주'라고 격이 떨어지는 글자를 써서 표기하는 것이

《동사강목》이 지향하는 '춘추대의'이기도 하다.

아울러 공자가 말한 '시시비비의 엄격한 구분', 춘추필법의 대의이기도 하고.

백제나 신라도 수를 돕겠다고 나오는 판국이니(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수로서야 좋겠지만....

 

[四方兵皆集涿郡, 帝征合水令庚質, 問曰 “高麗之衆不能當我一郡, 今朕以此眾伐之, 卿以為克不?” 對曰 “伐之可克. 然臣竊有愚見, 不願陛下親行.” 帝作色曰 “朕今總兵至此. 豈可未見賊而先自退邪?” 對曰 “戰而未克, 懼損威靈. 若車駕留此, 命猛將勁卒, 指授方略, 倍道兼行, 出其不意, 克之必矣. 事機在速. 緩則無功.” 帝不悅曰 “汝既憚行, 自可留此.” 右尚方署監事耿詢上書切諫, 帝大怒, 命左右斬之, 何稠苦救, 得免.]

사방의 병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양제가 합수령(合水令) 유질(庾質)을 불러 물었다.

“고려의 무리들이 우리 한 군(郡)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인데, 이제 짐이 이 많은 군사로 치니, 경은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못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치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폐하께서 친히 나가서 싸우지 말았으면 합니다.”

양제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짐이 지금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물러갈 수 있겠는가?”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위엄이 손상될까 걱정입니다. 만약 거가(車駕)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시고 용맹한 장수와 강한 군사에게 명하여 지시를 받은 다음 속히 달려가게 하여, 고려에서 미처 생각 못한 사이에 나가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일은 신속히 해야만 합니다. 때를 놓치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양제는 불쾌해져 말하였다.

“너는 벌써부터 가기를 꺼리는구나. 여기 남고 싶거든 그렇게 하라.”

우상방서감사(右尙方署監事) 경순(耿詢)이 봉사(奉事)를 올려 간절히 간하자, 양제가 몹시 노해서 좌우에 명하여 참수하게 하였는데, 하조고(何稠苦)가 구원하여 참수를 면하였다.

《자치통감》 권제181, 수기(隋紀)제5, 대업 8년 임신(612) 정월

 

합수령 유질과 우상방서감사 경순 두 사람의 말을 들었더라면,

양제가 그렇게 비참한 패퇴를 하는 지경은 면할 수 있었을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은 신속하게, 영양왕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틈에 밀어붙이라고.

병법에도 나오는 말인데 왜 양제는 굳이 고려 원정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하려고 했던 걸까.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荐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今. 睠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虔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稟正朔, 遂復矘攘琛賮, 遏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輶車奉使爰曁海東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徭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廻首面內, 各懷性命之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屆幽·朔, 弔人問罪, 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伐, 拯厥阽危, 恊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今宜授律啓行, 分麾届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以電掃. 比戈按甲誓旅而後行, 三令五申, 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鏤蟬 · 含資 · 渾彌 · 臨屯 · 候城 · 提奚 · 踏頓 · 肅愼 · 碣石 · 東暆 · 帶方 · 襄平等道, 絡繹引途, 摠集平壤.』]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고려의 보잘것 없는 무리들[小醜]이 밉살스러우며 공손하지 못해서,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가 거듭 주륙하여 소굴이 잠시 위태로왔으나, 난리로 막힘이 많자 부족이 다시 모여,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처럼 모여, 지금까지 번창하였다. 돌아보건대 저 중국의 땅이 잘리어(?) 오랑캐의 부류가 되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여 가득 차니, 천도(天道)가 음란한 자에게 재앙을 내려 망조가 이미 드러났다. 떳떳한 도를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린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악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은 것은 (헤아리기에) 날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조서를) 보내 엄히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간 반도(叛徒)들을 꾀어냄이 끝닿는 데 모르고,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烽候)를 괴롭히니,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하늘의 그물에서 빠졌으며, 이전에 사로잡아 죽일 것도 늦추어주고, 뒷날 복종하여 목베임도 당하지 않게 해주었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쌓아, 거란의 무리를 합쳐 바다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버릇을 배워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바깥에서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가장자리에서 함께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빼앗고 왕래하는 길을 막아, 죄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함이 미쳤으니, 정성을 바치고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수레를 탄 사신이 해동에 미치고, 정절(旌節)이 도달하려면, 번국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황제의 사신을 거절하여, 황제를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떻게 신하의 예라고 할 수 있느냐? 이래도 참는다면 무엇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냐?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국정의 기틀을 쥐고, 붕당끼리 결탁하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고 받음이 물건을 사고 파는 것과 같아서,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는다(?). 해마다 거듭된 재앙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쉬지 않아 요역이 기한이 없으니, 군량 운반으로 힘이 다하고 시체가 도랑과 구덩이를 메웠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우니 누구를 따를 것이냐?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견디지 못하였다. 머리를 돌려 안으로 보고 제각기 생명을 도모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들도 모두 혹독하다는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 삭주(朔州)에 이르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는 일이 두번 걸음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리하여 친히 6사(六師)를 거느리고 9벌(九伐)을 펴서, 위태함을 구제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며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교훈을 이으려 한다. 지금 마땅히 군율을 내려 출발하고 지휘를 나누어서 길에 이르러, 발해를 덮쳐 천둥같이 떨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쓸어 버리겠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여 일러둔 후에 출행하며, 거듭 알리고 타일러서 필승을 기한 후에 싸우라. 왼쪽 12군(軍)은 누방(鏤方) · 장잠(長岑) · 명해(溟海) · 개마(蓋馬) · 건안(建安) · 남소(南蘇) · 요동(遼東) · 현도 · 부여 · 조선 · 옥저 · 낙랑 등 길로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염제(鏤蟬) · 함자(含資) · 혼미(渾彌) · 임둔(臨屯) · 후성(候城) · 제해(堤奚) · 답돈(踏頓) · 숙신 · 갈석 · 동이(東暆) · 대방(帶方) · 양평(襄平) 등 길로 나아가서,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예예. 잘 알았사옵니다 양제 폐하.

미천한 동쪽의 나라 고려의 죄를 몸소 물으시고자 이렇게 밤늦게 워드... 아니지.

혀끝에 붓칠해가며 중국말로 써올려주신 저놈의 국서 참 더럽게도 기니

이 미천한 고려인인 제가 알아듣기 쉽게 해석해드리도록 합죠 녜.

 

수 양제가 고려에 대해서 물은 죄.

 

1) 밉살스럽고 싸가지 없는 고려의 보잘것 없는 무리들이,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고서, 한(漢)과 위(魏)가 그렇게 갈궜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모여, 냇물과 수풀처럼 번창했다.

 

→뭐, 한민족이 원래 생명력이 질기기는 하지.

발해와 갈석 사이라고 하면, 발해는 곧 지금의 요동과 산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고,

갈석은 당대 만리장성의 끝, 곧 지금의 산해관 부근.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요서'라고 부르는 그곳에 고려의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우글대면서,

'요수'와 '예수'의 경계를 잠식했다고 꾸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 양제의 말대로라면 '보잘것없는' 고려의 무리는 그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있었는데,

요수와 예수는 우리가 아는 랴오허 강이 아니라 저기 대륙쪽으로 더 들어가야 되려나?

이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지도보다 서쪽으로 더 넓어지겠다야.

만리장성 끝부분인 산해관과 발해 사이에 우리가 있으면서, 랴오허 강인 요수와

하북성 일대의 예수를 잠식해놓고 수에게 깝치고(?) 있었다는 말이니까.

요동 반도뿐 아니라 지금의 요서까지도, 이 무렵에는 고려가 차지한 땅이었다고.

 

2) 위대하신 대수 제국의 황제께서 조서 보내서 침략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싸그리 씹어서 무시하고 받지도 않고 황제폐하께 굽실거리지도 않고, 수의 도망친 배신자들을 계속 꼬셔서 데려가고, 변방에 우글거리면서 봉후(烽候)를 괴롭히면서 수의 대문 빗장과 딱다기를 시끄럽게 만들고 중국 백성들을 괴롭힌다.

 

→허허허허... 우리가 왜? Why?

어차피 우리가 안 쳐들어오면 그쪽에서 먼저 쳐들어오려고 했잖은가?

고대의 패턴을 봐도, 저들은 분열된 시대에는 그리 자주 못 쳐들어오다가

통일됐다 싶으면 항상 쳐들어왔고, 고조선도 결국 그런 식으로 멸망당했었지.

도망친 반역의 무리들이 가장 이웃한 나라로 망명해오는 것이야 뭐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3) 옛날에 수 문제가 1차 고려 정벌할 때 일부러 봐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수의 해군 수비병들을 죽이고, 말갈의 버릇을 배워 요서를 침범하였다.

 

→아, 단재 선생님이 말하신 게 그거였구려.

《조선상고사》에서 '글안병을 동원해서 수군을 쳤다'고 했는데,

그땐 몰랐는데 이제 이해가 되네. 양제님이 뭘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다.

수의 수군 수비병이, 거란과 합세한 고려군의 손에 죽었다고ㅡ

이상하지 않은가? 수의 군사들은 분명 난데없는 폭풍 때문에 배가 좌초돼서

고려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웃긴 사람들이야, 자기네들 입으로는 '폭풍 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다'고 했으면서,

여기서는 또 우리가 죽였대요. 완전 개쩔어. 


4) 청구(靑丘)의 바깥과 벽해(碧海)의 가장자리, 즉 서해 바다 건너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조공이라 가져오던 보물을 빼앗고 그들이 왕래할 길을 막아버린 죄. 그리고 수의 사신들이 백제와 신라로 가는 도로를 막고 사신들을 내쫓아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죄.

 

→이 무렵 백제나 신라가 고려에 위협을 느끼고, 수와 연계해

고려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다. 위진남북조라는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통일왕조로서 들어선 수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고려에 비해 조금 열세인 백제와 신라가 당해내기는 힘든 일.

 

더구나 신라ㅡ 해동의 삼국 가운데서 그래도 고려와 대등하게 싸울수 있는

백제라는 든든한 우방을 잃어버리고, 고려의 공격까지 받아

나라가 온통 흔들리기 일보직전의 아찔한 순간에 놓여있는 판국에,

그나마 새롭게 얻은 한강 유역을 통해 중국 대륙과 연계하여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들었고,

수에 걸사표를 올린 것은 어찌 보면 신라의 그러한 살아남으려는 '고독한 투쟁'이었으니.

그런 신라의 의도를 고려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고,

백제와 신라가 수에 사신을 보내는 의도가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잘 아는 고려로서는 저들이 짝짜꿍하고 잘 놀게 그냥 뒷짐지고 볼수는 없는 일.

 

신라도, 백제도 모두 살기 위해서 조공 바쳐가며 수와 우호하려 하고,

고려 역시 그런 신라와 백제를 어떻게든 잡지 못하면 이중, 삼중으로

전선을 형성해야 할 판국인지라, 수가 쳐들어오리라는 위협 무릅써가면서도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수로 가는 것만은 막으려고 하는 것.

결국 저마다 다 어떻게든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우리보고 그걸 하지 말라고 하면 어쩌느냐는 거다. 우리보고 죽으라는 거야 뭐야?

기본적인 생존권 몰라?

 

세상 모든 생명체는 자기 주어진 대로의 수명을 누리고,

그것을 침해하는 힘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고려는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 뿐.

그걸 갖고 외국인 수가 뭐라뭐라 지껄일 자격이 못된다는 말이다.

즉, 주제넘는 참견이다.

 

5) 고려의 법령은 가혹하고 세금은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들이 국정을 쥐고, 붕당끼리 결탁하면서 마치 물건 사고 팔듯 뇌물을 주고 받는다(?).

 

→고려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이 무겁다고?

역적들 식구 모두 멸족시키는 것과 도적질한 사람 못 갚으면 노비 삼는 것이 가혹해?

어느 나라나 형법 집행은 엄격한 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나라가 유지될수 없으니까.

한 사람이 내는 세금이 포목 다섯 필에 곡식 다섯 섬,

일정한 일이 없는 떠돌이는 3년에 한 번 열 사람당 고운 포 한 필.

재산따라 신분따라 상호(上戶)는 한 섬이고 그 다음은 일곱 말,

하호(下戶)는 다섯 말 내는 세금이 그리 가혹하고 무거운가?

오늘날에도 재산 정도에 따라서 세금을 물리는데?

세금은, 동서 고금 막론하고 그 양이 객관적으로 많든 적든

내는 당사자들한테는 다 똑같이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이라고. 알간?

 

힘센 신하와 호족들이 국정을 쥐고 붕당끼리 결탁한다는 것은,

아마 고려 내에서 왕의 권한이 약해지고 무신들의 권력이 강해진 상황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없긴 하다.

붕당이라고 하면 양원왕 때에도 외척 가문인 추군과 세군 두 집안이

저마다 자기 외손자 왕 만들려고 평양 대궐 앞에서 싸운 일도 있고,

또 《수서》나 《한원》에도 보면

 

[其國建官有九等. 其一曰吐捽, 比一品. 舊名大對盧, 總知國事, 三年一代, 若稱職者, 不拘年限. 交替之日, 或不相祗服, 皆勒兵相攻, 勝者爲之. 其王但閉宮自守, 不能制御.]

그 나라(고려)에는 9등의 관직이 있다. 그 처음이 토졸(吐捽)로서 1품이고 옛 이름은 대대로(大對盧)인데, 국정을 총괄한다. 3년에 한번씩 바꾸었지만 직책을 잘 수행하면 연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릇 교체하는 날 복종하지 않으면, 서로 군사를 일으켜 싸워서 이긴 자가 대대로가 된다. 왕은 궁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능히 제어하지 못한다.

 

라고 했다.

 

대신들이 최고 관직 하나를 놓고 서로 사병 일으켜서 추군세군처럼 싸우는데도

그걸 왕이 어떻게 못할 정도라면 고려의 왕권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한 것.

그래도 3년에 한번씩 바꾸고, 직책을 잘 수행하면 연한에 상관없이

종신취임도 할수 있다고 하는 것에서, 외국에서 걱정해야 할만한

엄청나게 살벌하고 피튀기는 유혈투쟁이 아니라

나름의 법칙과 불문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대부분은 자신들이 잘 알아서 길을 찾아나가게 되어있는 것으로

꼭 그렇다고 말할수도 없겠지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럭저럭 잘 잡혀가던 질서를 오히려 더 망쳐놓을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걸 니네들이 상관을 하냐고. 남의 집안일에.

 

원래 조공과 책봉의 원칙에서, 우리가 저들에게 조공이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갖다바치면

저들은 우리에게 '사여'라는 이름으로 물건을 다시 좀더 많이 주고,

그럴듯한 관직명을 만들어서 형식적인 '책봉'을 거치며,

이게 끝나고 나면 우리가 무슨 깽판을 쥑이든지 저들은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내정에 관한 한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얻는 것이다.

 

조선조 청에 대해 조공을 바치면서도 우리가 독립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조선에 표류했다가 돌아와서 쓴 <하멜표류기>에도,

"비록 타타르(청)에 예속되어있다고는 하나(조공과 책봉을 말한 것),

조선 국왕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라고 했다. 청의 황제는 저들이 '속국'이라 부르는 조선의 내정을

결코 간섭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가 수에 얼마나 조공을 갖다바쳤든 수는 고려에 대해 받는 만큼 사여를 더 해주면 되고

우리가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자기들을 까든 말든 내정문제를

결코 상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건방지게 고려 내정을ㅡ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고위벼슬을 무력으로 결정하는

고려의 어수선한 정세에 대해서 수가 감히 참견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자주권을 침해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수 양제가 말하는 우리의 죄를 열거하자면 대략 그러하나,

그게 우리가 저들에게 맞아 죽어야 될 이유는 못된다.

우린 어디까지나 스스로 지키기 위해 그랬을 것 뿐이고,

그걸 갖고 수가 기분이 나쁘더라도 뭐라고 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핑계 저 핑계 만들어내서 저렇게 고려를 무너뜨리려는 꼴이라니.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輸者倍之. 宜社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薊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胄纓拂旗○, 每團異色.]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桑乾水) 가에서 사제(社祭)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 제사지내고, 계성(薊城) 북쪽에서 마조성(馬祖星)에 제사지냈다. 황제가 친히 조절하여 군대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을 각각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隊)로 하고,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團)이 되게 하였으며, 보병은 80대로 하고 나누어 4단으로 하였으며,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그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정월 임오

 

백만 대군이란다 백만 대군.

수 문제가 북주에서 정변을 일으킬 때에도 10만 정도 군사를 썼고,

진을 무너뜨릴 때에도 50만이나 썼던가?

일찌기 평원왕 앞에서 문제가 고려를 진과 비교하면서

"너희 군사가 아무리 많아봤자 진(陳)에 대면 택도 없어."

하고 엄포놨었지. 그 고려보다도 막강하다고 말한 진을 칠 때에

아버지가 동원했던 군사의 두 배나 되는 숫자를(어쩌면 네 배일지도),

고려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동원한 수양제를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되려나.

세상에 이렇게 거대한 군대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읽은 책은 얼마 없지만,

세계 역사에서 겨우 조그만 나라 하나 무너뜨리려고

이만큼의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왜냐구?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것만큼 무지하게 위험한 전쟁 방법도 없거든.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 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매일 1군씩을 보내 서로 40리 떨어지게 하고 진영을 연이어 점차로 나아가니, 40일만에야 발진이 다 끝났다.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어영(御營) 안에 12위(衛) · 3대(臺) · 5성(省) · 9시(寺)를 합쳐서 나누어 소속시키고, 내외전후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뒤에 출발시켜 또 80리나 뻗쳤으니, 근고에 군대 출동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정월 계미

 

병법가 손자는 자신의 병법에서 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해 전쟁을 하려면 빠르고 가벼운 전투용 전차 천 대와 운반용 수레 천 대, 그리고 무장한 병사 10만 명을 출동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천리 길에 걸쳐 군량을 수송하고 물자를 보급해야 하니, 이렇게 하려면 전방과 후방에서 들어가는 경비, 국빈이나 사신과의 외교에 쓰이는 접대, 무기와 장비를 만들고 고치는 데에 들어가는 물자, 수레와 갑옷을 수리하고 보충해주는 데에 필요한 비용을 합쳐 하루에도 천금에 이르는 막대한 전비가 든다. 이런 전쟁 비용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10만의 대군을 출동시킬 수 있다."

그리고 전쟁에 들이는 비용이 많을 수록, 되도록 그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든

지구전으로 가지 말고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라고 손자는 말하고 있다.

지구전으로 가면 백전백패.

 

전쟁 치르면서 물자 수송 하느라 나라 재정 고갈되고 그것도 모자라

이기지도 못하면 그거 누가 책임지나? 백성들이 다 세금 내서 메꿔야 되거든.

그래서 전쟁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신중하고,

겁 많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겁이 많다는 것과 겁 잘 먹는다는 것은 미묘하게 다른)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을 피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한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자기들은 알거든. 많이 해봤으니까.

암만 피튀기며 싸워서 결과적으로 이겼다고는 해도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상처뿐인 영광'인거지. 양제가 저렇게 엄청난 군대 동원해서

고려를 치겠다고 나서는 데에는, 자기도 나름 생각하는 바가 있거나

전쟁 뒤에 어떻게 처결할 지를 머릿속에 다 구상해놨다거나,

그래서가 아닐까? 아니면 저렇게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온 짓을 왜 하겠냐구요.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