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0>제26대 영양왕(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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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涿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24년(613) 봄 정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군(涿郡)에 모으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로 삼으며, 요동의 고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이 양반.
[二月壬午, 詔 “宇文述以兵粮不繼, 遂陷王師. 乃軍吏失于支料, 非述之罪. 宜復其官爵.” 尋又加開府儀同三司.]
2월 임오에 조칙을 내렸다.
“우문술은 군량 지급이 이어지지 못하여 드디어 군대[王師]를 패하게 한 바, 이는 군리(軍吏)가 군량을 제대로 대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술의 잘못은 아니다. 마땅히 그 관작을 회복시키라.”
거듭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였다.
《자치통감》 권제182, 수기(隋紀)제6, 대업 9년 계유(613)
서민으로 쫓겨난 이듬해, 우문술은 다시 복직된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1차 전쟁 때에 했던 변명을 또 한다. 군량 수송 문제. 인간으로서 실수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한다면 그건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그냥 지 입으로 '난 바보다'라고 떠벌리는 꼴 아닌가?
[二月, 帝謂侍臣曰 “高麗小虜, 侮慢上國. 今拔海移山, 猶望克果, 况此虜乎?” 乃復議伐.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鼷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2월에 황제가 시신(侍臣)에게 말하였다.
“고려같은 보잘것없는 오랑캐가 상국을 깔본다. 지금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기는 일도 할 것 같은데 하물며 이 오랑캐쯤이야?”
그러고는 다시 정벌할 것을 의론하였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하였다.
“융적(戎狄)이 예에 벗어나는 문제는 신하가 해결할 일입니다. 천 균(鈞)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해서 쏘지 않는 법입니다. 어찌 몸소 천자의 지위를 욕되게 하면서 작은 도적을 상대하려 하십니까?”
황제가 듣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4년(613)
산 옮기고 바다 뽑는 것이 더 쉬울까, 아니면 고려를 무너뜨리는 것이 더 쉬울까? 수 양제의 2차 침공은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고, 양제는 패장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되돌아와선 패배의 치욕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으면서 혼자 분노를 삭혀도 모자랄 판에, 다시 고려를 치려고 한다. 사죄사절은커녕 평소 보내던 사신도 끊어버린 고려에게.
이번에는 수의 내부에서도 고려 정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전쟁에 명분이 있든 없든, 그걸 만회할수 있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승리하는 것. 까놓고 얘기하는 것이지만 1960년대 미국이 만약 베트남전에서(미국 내에서도 명분없는 부도덕한 전쟁이라며 비난 여론이 높던 그 전쟁) 월맹을 도와 호치민을 몰아내고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더면, 지금 세계가 그렇게 미국을 비난할수 있을까? 미군을 도와 군대를 파병했던 우리는 지금 '미국의 용병'이라는 욕을 어느 정도나 피할수 있었을까? 양제는 베트남 전쟁 무렵의 미국과도 같은 처지였다. 더 싸워야 할 명분도, 그럴 국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에게 한 것처럼 주변의 이족들이 수를 돕는 것도 아니었다. 양제 몰래 고려 사신과 내통하고 있던 돌궐은, 수의 군대가 살수에서 물고기밥 되던 그 해에 고려를 정벌하기 위한 기마군단 징발을 요구하는 양제의 요청도 거절했다. 고려에게 그렇게 숱한 갈굼을 당하면서 양제를 도와 고려를 치겠다고 한 백제도 두 나라 사이에서 저울재기나 하면서 결국에는 양제에게서 돌아서버렸고, 걸사표를 올린 신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여름 4월에 거가(車駕)가 요하를 건너서,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을 보내 평양으로 향하게 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4년(613)
《자치통감》에 보면 3월 병자에 "제음(濟陰)의 맹해공(孟海公)이 일어나 도적이 되어 주교(周橋)를 차지하고 지켰는데 무리가 수만에 달했고, 서사를 논하자며 사람을 꾀어다 죽이곤 했다[三月丙子, 濟陰孟海公起為盜, 保據周橋, 眾至數萬, 見人稱引書史, 輒殺之]."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원정에 시달리다 지친 자들이 도적이 되는 일은 이 무렵 수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바로 다음 날 정축에는 "정남(丁男)을 10만 명 뽑아 대흥성을 크게 일으켰다[發丁男十萬城大興]". 대흥은 곧 대흥성, 수의 수도였다. 다음 날인 무인에 양제는 민부상서 번자개(樊子蓋) 등의 신하와 월왕(越王) 동(侗)에게 동도의 방비를 맡긴 뒤 요동으로 향했다[帝幸遼東, 命民部尙書樊子蓋等輔越王侗, 留守東都]"고 《자치통감》은 적고 있다. 4월에 우문술과 함께, 상장군(上將軍)으로 복직된 양의신이 함께 평양을 공격했다.
[遼東之役, 以仁恭為軍將. 及帝班師, 仁恭為殿, 遇賊擊走之. 進授左光祿大夫, 賜絹六千段, 馬四十匹. 明年, 複以軍將指扶餘道, 帝謂之曰 "往者, 諸軍多不利, 公獨以一軍破賊. 古人云 『敗軍之將, 不可以言勇』 諸將其可任乎? 今委公為前軍, 當副所望也." 賜良馬十匹,黃金百兩.]
요동의 역에서 인공은 군장(軍將)이 되었었다. 황제가 군사를 돌릴 때 인공은 전(殿)으로서 적을 막아 싸우면서 도망쳐 왔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진수되었고 견(絹) 6천 단과 말 40필을 주었다. 이듬해(613) 다시 군장으로서 부여도(扶餘道)를 지휘하였는데, 양제가 그에게 일러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여러 군이 불리함이 많았는데, 공만이 홀로 한 군(軍)으로 적을 깨뜨렸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패한 군의 장수는 용(勇)을 논할 수 없다[敗軍之將, 不可以言勇]』하였으니 어찌 제장들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이제 공에게 전군(前軍)을 맡기니, 짐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라노라.”
좋은 말 열 필과 황금 1백 냥을 주었다.
《수서(隋書)》 권제65, 열전제30, 왕인공
패한 군대의 장수는 용(勇)을 논할 수 없다[敗軍之將, 不可以言勇]는 말은 《사기》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인데 쉽게 말하면 우리 속담에 '패자는 말이 없다'는 것과 같다. 예전에 살수의 싸움에서 고려군의 후방 추격을 막으면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왔다는 공(?)으로 좌광록대부로 봉해졌던 왕인공에게 양제는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다. 왕인공 역시 어느 정도 기대에 부응하기는 했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嬰城固守.]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 수만 명은 막아 싸웠다. 인공이 경기(勁騎) 1천을 거느리고 이를 쳐서 깨뜨렸다. 우리 군사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4년(613)
《수서》에서는 이때에 왕인공이 신성을 겹겹이 에워쌌고, 천자가 그것을 기뻐하면서 사인(舍人)을 보내 위로했다고 적었는데, 정작 이후로는 어떻게 더 싸움이 진행됐는지 기록이 없다. 그냥 에워쌌다. 그걸로 끝이다. 뭐 밑도끝도 없이 에워싸기만 하고 함락시키지도 못한 놈한테 사람까지 보내서 칭찬하고. 저거 또라이 아냐?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橦·雲梯·地道 四面俱進, 晝夜不息.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絙,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했다. 비루(飛樓) · 동차(橦車) · 운제(雲梯) · 지도(地道)로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우리는 임기응변으로 막았으므로 20여 일 동안 함락되지 않고, 적과 아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의 장대 길이가 15길이었는데, 효과 심광(沈光)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 보면서 우리 군사와 싸우는데 칼을 가지고 맞붙어 십수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는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떨어뜨렸는데,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광은 매달려서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임명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4년(613)
20일 동안 이어진 요동성 전투는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수 양제의 3차 침공은 수의 상황만 설명한 중국의 기록을 보고 쓰는 바람에 우리 군사들의 활약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뭐 이겼으니 그걸로 된 거지. 《삼국사》에서는 뺐지만, 《자치통감》에서는 효과 심광이 조산대부로 임명되었을 때 "양제가 항상 좌우에 두었다[恆置左右]"고 적고 있다.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土,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주머니 백만여 개를 만들어 보냈다. 흙을 가득 넣어 쌓아서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들었는데, 넓이가 30보나 되고 높이가 성과 가지런하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 공격하게 하였다. 또 바퀴 여덟 달린 누거(樓車)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서 성 안을 내려다 보고 쏘면서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성 안은 매우 위급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글이 오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또 고관의 자손들이 모두 현감이 거처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염려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4년(613) 6월
이때 반란을 일으킨 것은 양현감만이 아니었다. 《수서》나 《자치통감》에는 모두, 이때 양제의 총애를 받아 대신으로 임명된 자들의 아들들도 모두 이 반란에 가담했다고 적었다. 내부에서부터 양제는 신임을 잃어가고 있었다.
[兵部侍郞斛斯政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 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도망쳐 왔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4년(613) 6월 무진
《수서》에 보면 곡사정이 고려로 도망쳤을 때, 양제는 염비(閻毗)에게 명령하여 2천 기병으로 추격하게 했다 한다. 하지만 끝내 잡지 못했고, 고려로 도망친 곡사정은 박애성(拍崖城)에 가서 그곳 성주의 보호를 받았다. 염비는 곧바로 박애성으로 쳐들어갔지만,공격한지 겨우 이틀 만에 양제의 조서를 받고 퇴각했다. 박애성(拍崖城)이라는 성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려의 작은 성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기록에 나오는 유명한 고려의 성을 글자만 다르게 표기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박작성(泊灼城)이나 백암성(白巖城) 두 성 가운데 하나겠지만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다 적어둔다. 그리고고려로 도망친 곡사정은 수의 군사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고, 고려에서는 모든 정예병을 동원하여 양제를 추격해온다.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衆心忷懼, 無復部分, 諸道分散. 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噪.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躡,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鈔擊, 殺略數千人.]
황제가 밤(2경)에 여러 장수를 몰래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과 기계와 공격용 도구가 산처럼 쌓였고, 보루와 장막이 그대로여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이 떨며 두려워져 다시 부서를 나눌 새도 없이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는 즉시 이것을 깨달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안에서 북치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午時)가 되어 그제야 점차 밖으로 나갔으나, 수 군사가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수천 명의 군사를 내어 뒤를 밟아 쫓았으나, 수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항상 8, 90리의 거리를 두었다. 요수에 거의 이르러서 황제의 병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는 그제야 감히(?) 후군을 압박하였다. 이때 후군도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우리 군사는 쫓아가 습격해서 수천 명을 죽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4년(613) 6월 경오
그러나 그들의 후퇴는 고려군에 포착되어 후군(後軍)이 고려의 습격을 받고 거의 전멸했다. 병부시랑이라면 국방부 차관쯤 되는 벼슬인데, 그런 중요한 군사책임자가 고려로 망명해버렸으니 수의 군사정보가 고려에 유출되었을 것쯤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나마 수 양제로서 다행스러운 것은, 예부상서 양현감이 일으킨 반란이 손쉽게 진압되었다는 점이지만, 양현감은 양제의 쿠데타를 도왔던 공신인 양소(楊素)의 아들로서 양제에게는 제1측근이었던 자. 그런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양제 자신이 이미 수의 내부에서도신망을 잃어가고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두 달만에 양현감의 반란이 진압된 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국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속출한다.(사실 그 전에도 반란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들의 무리는 《수서》에 기록된 것만 보면 아무리 적어도 거의 1만 명을 더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10월에는 이들 반란군에 의해 동도가 포위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른바 수 말기의 반란기. 만리장성을 수리하고 대운하를 파고, 수도 대흥성(장안)뿐만 아니라 낙양과 양주에도 자신이 거처할 별궁을 짓고, 운하에 용주(龍舟)를 띄워 화려한 순행(巡幸)을 하면서도, 백성들이 혹사당하는 것은 몰랐다. 게다가 기근과 홍수까지 겹쳐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제는 고려 정벌의 헛된 야욕을 버리지 못했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0>제26대 영양왕(6)|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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