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1>제26대 영양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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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하면 질렸을 법도 싶은데, 어째서 저렇게나 집요하게도 고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者.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25년(614) 봄 2월에 황제가 모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려를 정벌할 일을 의론하게 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자치통감》에서 보충하면 제4차 고려정벌을 입안한 것은 2월 계미일이고, 군사가 출병한 것은 무자일이다.
드디어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황제(黃帝)는 52번 싸우고 성왕(成王)은 27번 정벌해서, 덕이 제후에게 베풀어지고 영(令)이 온 천하에 행해졌다. 노관[盧芳]은 조그마한 도적이었지만 한 고조는 오히려 친히 쳤고, 외효(隗囂)의 남은 무리 때문에 광무제[光武]가 몸소 농(隴)에 올라 촉(蜀)을 바라보았으니, 어찌 사나운 무리를 없애고 난리를 평정하여 수고한 다음에 편안함을 구하려는 뜻이 아니었겠는가? 지금 고구려가 거만하고 공손하지 못하니 6수(帥)를 나누어 백도(百道)로 함께 나아가라. 짐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환도(丸道)에서 말을 먹이고[秣馬] 요수에서 군사를 사열하리라[觀兵]. 다만 으뜸가는 악만 없애고 나머지 사람들은 문책하지 않겠으니, 이를 선포하여 다 내 뜻을 알려라.”
《동사강목》 권제2하(下) 갑술년(신라 진평왕 36년,
고구려 영양왕 25년, 백제 무왕 15년: 614) 봄2월
집요한 것. 수 양제를 보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양반아, 이 양반아. 당신이 황제야? 성왕이야? 왜 그렇게 몰라? 이제 전쟁 좀 그만 하라구, 앙? 괜히 전쟁 잘못 하다가 나라 하나 아예 말아먹고 싶은 거야 정말? 이기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고통 정도는 마땅히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백성들 몰아붙이고 개죽음시키는 정치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말 밥맛이다.(자기 자식새끼는 어떻게든 안 보내려는 군대에 힘없는 집 자식더러는 가라고 부추기는 정치꾼도 있는데 뭐....)
《동사강목》에서는 또다시 《북사》의 기록을 참조해서, 3월 계해에 유궁(楡宮)에서 황제 헌원에게 마제(馬祭)라는 것을 지낸 뒤에모반한 자의 피를 북에 바르고 출정을 했다고 적었다. 전쟁 나가기 전에 주둔지에서 군신(軍神)에게 지내는 제사가 마제다. 혹은 마조신(馬祖神)을 제사지낸다고도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조에 지금 동대문 밖에다가 마조단(馬祖壇)을 설치해놓고 말의 조상이라는 천사성(天駟星)을 제사지냈다. 말을 전쟁과 연관지어 생각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 바로 마제인데, 이때의 중국 군신은 과거 동이 구려의 군주 치우를 정벌했다 전하는 황제 헌원이다. 헌원의 힘을 빌어 치우의 나라를 멸할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거지.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가을 7월에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懷遠鎭)에 행차하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고 도달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지쳐 있었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5년(614) 7월 계축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혼란스럽던 수의 내정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고려 원정을 준비하기에 앞서, 마조제를 올리러 양제가 탁군에 도착한 3월 임자, 그 앞에 "사졸들이 길에 줄지어 섰는데 그 죽은 자가 즐비하더라[士卒在道, 亡者相繼]". 마조제를 지내고 모반자의 피를 북에 바르던 날에도 "죽는 자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亡者亦不止]".
이밖에, 《자치통감》에서는 4월부터 5월, 6월까지 석 달에 걸쳐 수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반란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미 고려 정벌을 추진하던 정월부터, 부풍(扶風)에서 당필(唐弼)이 이홍지(李弘芝)를 당왕(唐王)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순식간에 10만 명이나 되는 무리가 그에게 가담했다. 여름 4월에는 유림(榆林)의 태수였던 성기동순(成紀董純)이 팽성(彭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장대호(張大虎)와 창려(昌慮)에서 맞서 싸웠고, 5월 경신에는 연안(延安)에서 유가론(劉迦論)이 스스로 대세(大世)라는 연호까지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모인 무리가 수만 명. 좌효위대장군으로서 관내토포대사(關內討捕大使)가 된 굴돌통(屈突通)이 상군(上郡)에서 반란군과 충돌했을 때 그 사망자 숫자는 앞서 창려에서 장대호의 반란군과 충돌했을 때 반란군측 사상자와 합쳐보면 2만여 명에 이른다.
한편 양제의 어가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 따위는 아랑곳없이, 탁군을 출발해 5월 갑오에 북평(北平)을 거쳐 가을 7월 계축에 회원진에 이르렀다. 기록된 것만 합치면 이것이 꼭, 4차 침공이었다. 이미 수의 군사들은 고려를 상대로 전쟁할 마음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황룡(黃龍) 동쪽으로부터 해골이 줄지어 널려있고, 군사의 열의 아홉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고려를 치라고 떠미는 것은 개죽음 더 자초하게 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네 번이나 전쟁을 하기에는 고려도 지쳐있었는지, 회원진에 주둔하던 양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지난번 고려로 망명해왔던 곡사정을 함께 돌려보내며 화친을 청했다고 《삼국사》 및 《수서》는 전한다.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遣使乞降, 囚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그에 따라 곡사정을 돌려 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절부를 가진 사신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5년(614) 7월 갑자
《삼국사》의 기록 가운데 수나 당과 전쟁을 벌인 부분은, 대부분 《수서》나 《자치통감》에서 주어만 바꿔서 전재한 것이 많다."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다[我兵逆戰]"는 기록도 "고려는 군사를 일으켜 맞서 싸웠다[高麗擧兵逆戰]"는 구절에서 '高麗擧兵'을 '我兵'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서 "우리 군사도 많이 지쳐 있었다[吾國亦困弊]"고 한 구절도 《자치통감》에서는 "고려도 많이 지쳐 있었다[高麗亦困弊]"고 적은 것을 '高麗'에서 '吾國'으로 바꾼 것인데, 원사료가 된 《자치통감》이 어디까지나 중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려가 표현된 대로 정말 많이 지쳐있었는지 아니면 중국 입장에서 보기에 그렇게 보였다는 건지는 모른다는 얘기다.
하긴 그렇게 물자 쏟아붓고도 못 이기고 지친 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처맞고도 오히려 쌩쌩한 고려의 모습에 기분이 더러울 만도 하겠다. 양제가 내호아를 불러들이려고 했을 때에도 내호아는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하면서 나는 못 간다느니 끝까지 평양을 포위하여 영양왕을 사로잡아 돌아가겠다느니 하다가 절부를 갖고 온 장리(長吏) 최원숙의 권고(협박 내지는 사정)에 결국 명을 받들기로 한다.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8월에 황제가 회원진에서 군사를 돌렸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5년(614) 8월 기사
대원왕은 끝내, 양제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단지 고려가 화친을 청했다는 그 사실 자체으로 만족하면서수로 돌아가야만 했던 양제였지만, 이때 우리는 물론 저들도 미처 예상 못한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양제가 화살을 맞은 것이다.
고구려 사신이 수군 진영에 갈 때였다. 어느 고구려 사람이 몰래 소노(小弩)를 품에 감추고 사신을 따라 수 황제가 있는 처소에 이르렀다. 양제가 사신을 접견하고 글을 받아 읽을 때 쇠뇌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양제가 놀라고 두려워 얼굴빛을 잃었다. 군중(軍中)이 요란한 틈을 타서 쇠뇌를 쏜 그 사람은 빠져나가 버렸으므로 그를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곧 군사를 돌리게 하며 좌우에게 말하였다.
“짐이 천하의 군주로서 친히 작은 나라를 쳐서 승리하지 못했으니, 이는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겠구나. 이제 이 자(고려의 자객)를 보니, 분명 형가(荊軻)나 섭정(聶政)같은 무리일 것이다.”
곧 군사를 돌렸다[還軍].
《동사강목》 갑술년(신라 진평왕 36년, 고구려 영양왕 25년,
백제 무왕 15년: 614)
그러니까 고려 사신이 수에서 도망쳐온 곡사정을 돌려보내면서 화친을 청하는데, 사신 중 한 명이 몰래 쇠뇌를 숨겨갖고 들어가서, 양제를 쏘아 맞혔다는 거지(석궁 테러?). 안정복 영감의 스승이신 성호 이익 선생의 《성호사설》 '노중양제' 편에도 이 이야기를 실어놨는데, 진 때의 자객으로서 연환(鉛丸)으로 진시황을 쳐서 종지뼈를 부쉈다는 고점리(高漸離)의 이야기를 진사(秦史)에서 생략한 사례를 들어, 아마 비록 양제가 가슴에 화살을 맞았어도 죽을 지경에까지에는 이르지 않았던 까닭에 중국인들이 일부러 이걸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고 성호 선생은 말씀하셨다. 하긴 그랬으니 고려 사신도 무사히 당까지 갈수 있었겠지.(형가나 섭정도 모두 고점리처럼 진시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들의 이름. 자세한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 자객열전 참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고려고기(高麗古記)》란 책에서 보고 적었는데, 안정복 영감이 《삼국유사》에서 이 이야기를 뽑아 《동사강목》에 수록하면서는 "천하 사람들에게 바다 동쪽 멀리 떨어진 이 나라에도 이처럼 기이하고 위대한 일이 있었음을 알리고자 이 이야기를 수록하노라."며, "옛날 장량과 함께 박랑사에서 진시황제에게 철퇴 집어던졌다는 자객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이야기와 더불어 오래오래 전해져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코멘트를 달아놓으셨다.
(그런데 연개소문 사극에서는 이게 나왔던가? <환단고기>는 많이 인용하던데.)
[冬十月, 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告大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勑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겨울 10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우리 사신과 곡사정을 데리고 대묘(大廟)에 고하고, 이내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장수에게 명하여 무장을 엄하게 하고 다시 후일의 거사를 꾀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5년(614)
양제는 회원진에서 퇴군해서 돌아온 뒤, 고려로 도망쳤다가 잡혀온 곡사정을 11월 병신일에 금광문(金光門) 밖에서 죽였다. 그리고 그 시체를 솥에 삶았다. 뼈는 발라서 불에 그을려다 조리돌리고, 그 고기로는 관리들 모아서 파티를 했다는 후문이....(으, 끔찍하다.) 때려야 되는 고려는 정작 몇 대 때리지도 못했으면서 엄한데다 화풀이를 실컷 한 거지.
아무튼 네 번에 걸친 고려 원정의 실패로 수에게 남은 것은 쓰라린 패배와 거의 고갈되다시피 한 물자, 그리고... 흉악해진 인심.오늘날 사학자들은 수를 몰락시킨 결정적인 원인으로 고려 원정의 실패를 주목한다. 《자치통감》도 "처음 개황 말년만 해도 은성(殷盛)했던 나라에서 조야(朝野) 모두 고려에만 몰두하니, 유현만이 안된다며 《무이론(撫夷論)》을 지어 꼬집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그 말이 이루어졌다[初, 開皇之末, 國家殷盛, 朝野皆以高麗為意, 劉炫獨以為不可, 作撫夷論以刺之. 至是, 其言始驗]."라며 고려 원정이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결국 수조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에돌아 비판하고 있다. 《남ㆍ북사》의 저자였던 당의 학자 이연수는 양제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요동이 군현에 들지 않은 지는 오래 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매년 정월 초하루[元正]에 조회하고 조공을 그른 적이 없는데, 문덕(文德)으로 회유하지 못하고 갑자기 무력[干戈]을 발동해서, 안으로는 부강을 믿고 밖으로는 땅 넓히는 것만 생각하여, 이기려고 원망을 사고 노여움으로 군사를 일으키니, 옛날부터 이러고도 안 망했다는 말을 못 들어봤다.
전쟁 잘못 일으켰다가는 참. 이겨봤자 본전이고 지면 괜히 망신이라, 양제는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고려를 쳤다가 결국 쪽도 못 얻고 망해버렸더란다.
다시 생각건대, 이때에 수 황제의 악정이 극심하고 온 천하가 어지러웠으니, 만일 고구려의 영양왕 원(元)이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기(才器)를 간직하여 국세가 쇠잔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안으로는 을지문덕 등 여러 신하를 등용하고 밖으로는 신라ㆍ백제와 연합하고 말갈의 무리와 합세하여, 수의 뒤를 쫓아가 죄를 드러내어 토벌하고 의려(醫閭,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약칭)에 웅거하여 천하에 격서를 전하여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었으련만, 고구려의 원 같은 용렬한 인물이야 오직 죽음에서 빠져나와 목숨 보존할 꾀도 짜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니, 어떻게 이 일을 쉽게 말할수 있겠는가? 애석할 뿐이다.
안정복 영감의 말은, 이 이긴 기세를 몰아서 그냥 그대로 백제, 신라와 말갈과 연합해 중국으로 쳐들어갔으면 수를 아주 멸망시켜버렸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 왕은 겨우 제 살 길이나 찾을 잔꾀밖에 생각할줄 모른 용렬한 군주라는 것. 유학자답게 좀 꼬장꼬장한 면도 있긴 하지만, 사실 수와의 전쟁에서 고려가 거둔 엄청난 승리(백만 대군을 상대로 이겼잖아)를 생각한다면,거기서 더 밀어붙이지 않고 그만두었던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긴 한다. 그래도, 후방에 신라와 백제라는 적을 두고서(수에게 앞장서서 국서 올려서 고려를 정벌해달라 요청하고 후방지원을 약속하던 것들) 수 하나를 위해 전군을 모두 움직일수만은 없는 고려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안정복 영감의 말은 좀 과하게 몰아붙인 면이 없지 않겠지만...
단재 선생도 안정복 영감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고,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도 영양왕이 수에서 망명해 온 병부상서 곡사정을 돌려보내어 양제에게 퇴각 명분을 주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지어버린 것은, 고려 안에서 국내성파 출신으로 고위 벼슬을 하고 있던 주화파 신료들이 자신들의 영지와 노동력을 쏟아붓기를 더이상 바라지 않았고, 그들의 의견을 영양왕이 채택하면서 평양성파 출신으로써 수와의 전쟁에서 숱한 공을 세운 여러 주전파 무장들이 활약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후대의 요(遼)나 금(金), 원(元), 청(淸) 같은 여러 정복 왕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활한 중국 대륙을 우리 차지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틀어졌다는 것인데,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다르다. 거란족과 여진족, 몽골족은 모두 그들이 선비족처럼 한족에 동화되어버릴 것을 두려워해서 가능한 한 동화되지 않으려 온갖 애를 썼다. 남면관제니 북면관제니, 맹안 모극제니 하는 것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원은 아예 한족은 최하위 천민으로 대우하며 고위 벼슬은 몽골족과 색목인에게만 명한 채 한족에게는 기회도 주지 않았다. 청조도 그들의 문자까지 제정해가면서 한족과 동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몽골족을 빼면 다 한족에게 동화되어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한민족의 역량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광활한 대륙이나 풍성한 물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癸卯, 高麗僧惠慈歸于國.]
계묘(15일)에 고려의 승려 혜자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2, 추고기(推古紀, 스이코키) 23년(615) 11월
혜자는 서기 615년, 수 양제가 쇠뇌에 맞고 군사 돌린 그 이듬해에 고려로 돌아왔다. 사실 혜자를 제외한다면 왜로 갔던 다른 고려 승려들이 언제 고려로 돌아왔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고려가 수의 100만 대군을 크게 깨뜨리면서 수가 휘청거리며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혜자도 왜에서 들었을 거다.(그 해 9월에 수에서 귀국한 견수사를 통해서.)
처음에는 수와 맞설 동지를 찾아 백제와 왜를 끌어들이고자 했고 그러한 고려의 '불교외교'의 일환으로 불교를 전한다는 명분으로왜에 와서 활약했던 혜자의 역할이 이제 다했음을, 그의 귀국 기사는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 전쟁에서 이겼고 국난도 극복했겠다. 이 참에 여세를 몰아서 영양왕은 자신이 즉위 초년부터 꿈꾸었던 왕권강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려 했다. 그리고 왕권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서 불교를 등에 업으려 했고, 혜자는 영양왕의 필요에 따라 다시 고려로 불러들여졌다. 그렇게 혜자는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고려로 귀환했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1>제26대 영양왕(7)|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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