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kkucult.culturecontent.com/story/story_text.asp?id=CP0432151001&type=4&item=1&cid=1&pno=1&pid=CP0432151007

발해의 천도과정
1. 발해를 연 구국(舊國)시대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8 
2. 구국에서 현주로, 현주에서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9  
3. 상경에서 동경으로, 그리고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0  
4. 발해 천도의 배경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1  
5-1. 상경성의 규모의 확대와 구조의 변화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2  
5-2. 상경성의 구조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3


1장. 발해를 연 구국(舊國)시대




발해는 698년 동모산(東牟山)에서 건국하여 현주(顯州), 상경(上京), 동경(東京)을 거쳐, 794년 상경(上京)으로 환도하였다. 전근대 시대의 수도는 정치와 외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발해의 천도과정을 통해 고대제국의 형성과 발전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많은 유민이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말갈족과 함께 요서지역의 영주(營州, 현재 중국 遼寧省 朝陽)에 거주하였다. 발해의 건국을 주도한 대조영 집단도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 내지로 강제이주 당한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대조영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696년 5월 영주에서 계단인 이진충(李盡忠)의 반란을 계기로 일차로 요동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당나라는 이진충의 난을 진압한 후 대조영 집단을 토벌하기 위해 이해고와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천문령(天門嶺, 중국 吉林省 哈達嶺)에서 대패하였다. 이 무렵 거란(契丹)과 해(奚)가 돌궐(突厥)에 복속된 탓에 당나라는 더 이상 대조영 집단을 토벌할 수 없었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 집단은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목단강(牧丹江) 상류의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정착하였다(『新唐書』 권219, 列傳 144, 渤海). 
 
이곳은 현재 중국 길림성 돈화시 현유향 상산자촌(吉林省 敦化市 賢儒鄕 城山子村)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성산자산성은 산성으로서 수도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거주공간으로서 평지성(平地城)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성산자산성과 결합된 평지성은 종래 오동성(敖東城, 산성에서 북동쪽으로 15km)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영승유적(永勝遺蹟, 산성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牧丹江 너머)이 주목되고 있다. 이처럼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형태는 고구려식 방어체계를 따른 것이었다.
 
발해가 이곳에서 건국하게 된 까닭은 기본적으로 과거 고구려의 주요 지역(平壤城 일대, 遼東 지방, 國內城 지역, 夫餘城 지역)이 장기간 전란과 멸망 이후의 격동으로 피폐해지고, 그 주민은 대규모로 당나라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되어 호구(戶口)가 크게 감소함으로써 이들 지역에서는 새로운 국가체가 건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조영은 이곳 구국(舊國)에 수도를 정하고 발해제국을 건설할 기초를 닦아나갔다.

이후 발해는 이곳 구국에서 현주(顯州) → 상경(上京) → 동경(東京)을 거쳐 다시 상경(上京)으로 천도하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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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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