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kkucult.culturecontent.com/story/story_text.asp?id=CP0432151004&type=4&item=1&cid=4&pno=1&pid=CP0432151007
발해의 천도과정
1. 발해를 연 구국(舊國)시대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8
2. 구국에서 현주로, 현주에서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9
3. 상경에서 동경으로, 그리고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0
4. 발해 천도의 배경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1
5-1. 상경성의 규모의 확대와 구조의 변화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2
5-2. 상경성의 구조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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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발해 천도의 배경
발해는 무왕대에 대내외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732년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대내적으로 지배체제의 미비, 대외적으로 발해의 지원세력인 돌궐의 세력 약화 및 당나라와 결탁한 신라의 위협 등의 이유 때문에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 즉위한 문왕은 대당관계의 개선을 통해 대외적 안정을 꾀함과 동시에 당나라의 율령제를 근간으로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추진하였다. 756년 무렵의 상경 천도 이후부터 중앙통치기구와 지방제도가 마련되기 시작하였으며, 774년 대흥(大興)에서 보력(寶曆)으로의 개원(改元)은 이러한 추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대외노선의 변경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체제 정비는 지배세력의 재편을 수반하였다. 785년 무렵 동경 천도를 즈음해서 연호는 보력(寶曆)에서 다시 대흥(大興)으로 복구되었다. 그리고 문왕 사후에 족제(族弟)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는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동경 천도와 연호 복구는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 과정에서 소외된 정치세력의 반발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문왕대 체제정비 과정에서 성장한 ‘국인(國人)’세력이 대원의를 살해하고, 문왕의 적손(嫡孫) 대화여(大華璵)를 성왕(成王)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상경으로 환도하였다.
네 차례의 발해의 천도과정에서 각각의 도읍 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구국(698년) → ② 현주(732년 전후) → ③ 상경(756년 무렵) → ④ 동경(785년 무렵) → ⑤ 상경(794년)
이상과 같이 발해 전기의 도읍기간은 동경(東京)을 제외하고는 구국(舊國), 현주(顯州), 상경(上京) 모두 30년 정도라는 공통성을 보인다.
각 시기의 대내외적인 정세에 따라 발해가 천도했으리라는 해석과 함께 도읍 기간이 모두 30년간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발해 지배층이 특정한 의도하에 정기적으로 천도를 행하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발해는 무왕대와 문왕 전반기에 주로 동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발해의 영역은 크게 보면 평양(平壤) 일대와 요동 지역을 제외한 고구려 영역과, 북류(北流) 송화강(松花江) 이동(以東)과 동류(東流) 송화강(松花江) 및 흑룡강(黑龍江) 이남(以南) 지역이다. 즉 과거 고구려보다 동북방으로 영역이 치우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이래로 반농반렵(半農半獵)을 중심으로 하는 말갈족(靺鞨族)의 거주지였다. 그런데 발해의 지배층은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자생적으로 발전해 온 것도 아니고, 또 사회경제적으로 반농반렵적 특성을 가진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데는 많은 난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 전기의 빈번한 천도는 지배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자체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파악된다. 선왕(宣王)․대이진대(大彛震代)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된 발해의 지방통치제도에서 핵심이 되는 5경 가운데 3경이 발해 전기의 수도였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상경으로 환도한 이후 다시는 천도가 없었던 사실은 문왕대부터 추진된 체제정비가 내분기를 거치면서 선왕대 이후로 확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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