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kkucult.culturecontent.com/story/story_text.asp?id=CP0432151006&type=4&item=2&cid=5&pno=1&pid=CP0432151007
상경 - 상경성/동경성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4378
발해의 천도과정
1. 발해를 연 구국(舊國)시대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8
2. 구국에서 현주로, 현주에서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9
3. 상경에서 동경으로, 그리고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0
4. 발해 천도의 배경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1
5-1. 상경성의 규모의 확대와 구조의 변화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2
5-2. 상경성의 구조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3
1. 발해를 연 구국(舊國)시대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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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발해 천도의 종착지 상경성
2절. 상경성의 구조
주지하듯이 발해인 자신이 남긴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상경성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발해의 문물제도는 당나라의 그것을 모방한 점이 많고, 상경성의 경우도 그 구성이나 배치가 당나라의 장안성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장안성과 비교하여 상경성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궁성
궁성은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크기는 동벽 900m, 서벽 940m, 남벽 1,050m, 북벽 1,906m의 장방형이다. 궁성의 남벽과 북벽의 중앙에는 문이 있는데, 『영안현지(寧安縣誌)』에서 오봉루(五鳳樓)라고 한 것은 궁성의 남문이다. 궁성은 중심구역과 북쪽구역, 동쪽구역 및 서쪽구역 등 4개 구역으로 나뉜다. 이중 가장 중요한 곳은 중심구역으로 그 크기는 동서벽은 720m, 남북벽은 620m이다. 중국학계에서는 중심구역만을 궁성으로 본다.
중심구역은 다시 중구, 동구, 서구의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중구에 7개의 궁전터가 있다. 이중 제1∼제5궁전터는 『영안현지』에 오중전(五重殿)이라고 한 것이다. 이 다섯 궁전은 궁성남문과 북문을 잇는 동시에 외성 남북벽의 중문을 잇는 길 한복판에 놓여있다. 모두 궁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규모도 웅장하다. 특히 제1, 제2궁전터가 가장 웅장하고, 제4궁전터는 온돌시설을 갖추었으며, 모두 회랑에 의해 연결되었다. 서구는 남북으로 3개의 소구역으로 나뉘는데, 가운데 구역에서는 온돌을 갖춘 침전터, 남쪽 구역에는 수백점의 도기 파편이 나온 도기(陶器) 퇴적장이 발견되었다.
상경성의 궁성은 그 위치나 기능에 있어서 장안성의 궁성 가운데 태극궁(太極宮)과 비슷하다. 장안성의 궁성은 태극궁(太極宮), 동궁(東宮), 액정궁(掖庭宮)의 총칭이다. 이 가운데 태극궁이 황제가 거처하면서 국정을 논의하는 곳이고, 동궁과 액정궁은 각각 태자와 후궁의 처소이다. 여기서 태극궁의 구조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중국 도성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주례(周禮)』에 따르면 왕궁을 내조(內朝)․중조(中朝)․외조(外朝)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내조는 천자가 휴식하는 곳이며, 중조는 치조(治朝)라고도 하는데 천자가 직접 정사를 보던 곳이다. 그리고 외조는 군신이 정사를 의논하는 곳이다. 태극궁의 정전(正殿)은 태극전(太極殿)으로 궁성의 정문인 승천문(承天門)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승천문이 대체로 외조에 해당된다. 즉 경일(慶日)의 의식, 죄과(罪科)의 은사(恩赦), 또 외국사절의 접견 등을 행할 때, 황제는 이 문까지 나와 의례(儀禮)를 거행한다. 그리고 승천문 밖은 궁성과 황성을 가로지르는 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황제와 신하가 대치하는 조당(朝堂)이 설치되었다.
승천문 북쪽에는 태극문(太極門)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태극전(太極殿)이 있다. 이곳이 중조에 해당된다. 동서에 회랑이 있고 좌우에 연명문(延明門)을 설치하였다. 좌연명문(左延明門) 밖에는 문하성(門下省), 우연명문(右延明門)에는 중서성(中書省)을 두었다. 관서의 대부분이 황성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데 반해, 이 2성이 궁성 내에 존재한 것은 그 특수한 직장(職掌)에 의한다. 즉 2성은 황제와 밀착하여 나라의 대정(大政)을 집행하기 때문에 그 관청도 천자의 대전에 근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전 북쪽의 양의전(兩儀殿)은 내조(內朝)에 해당되며, 황제가 일상의 정무에 종사하는 장소이다. 이 궁전의 북쪽이 황제의 거주구역이 된다.
발해 상경성이 당나라 장안성과 유사한 구조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상경성의 궁성(宮城)의 배치도 장안성의 태극궁(太極宮)과 같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태극궁(太極宮)의 태극전(太極殿)에 해당하는 제1궁전터는 궁전의 정전(正殿)이자 발해 국왕이 중조를 거행하던 곳으로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양의전(兩儀殿)에 해당하는 제2궁전터는 내조, 承天門에 해당하는 궁성 중앙의 남문(속칭 五鳳樓)은 외조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경우 제1궁전터보다 제2궁전터가 더 규모가 크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한편 장안성의 동북쪽에는 대명궁(大明宮)이 있다. 이곳은 원래 금원(禁苑)의 일부에 설치한 피서지였다. 그러나 장안성의 궁성이 저습(低濕)하였기 때문에, 이곳이 황제들의 평소 거처가 되었다. 그래서 궁성을 서내(西內)라고 부르는 데 대해 대명궁(大明宮)을 동내(東內)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명궁에서 가장 큰 궁전이 서쪽의 인덕전(麟德殿)인데, 연회(宴會)나 외국 사절의 내조(來朝)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발해의 사신이 장안성을 방문했을 때, 황제를 접견하던 곳은 주로 대명궁(大明宮)의 인덕전(麟德殿)이었다. 태극궁(太極宮)의 승천문(承天門) - 태극전(太極殿) - 양의전(兩儀殿)의 구조는 대명궁(大明宮)에서 함원전(含元殿, 外朝) - 선정전(宣政殿, 中朝) - 자신전(紫宸殿, 內朝)에 해당한다. 그런데 서내(西內)의 경우 태극전과 조당 사이에 승천문이 있지만, 대명궁의 경우에는 함원전과 조당이 구별되지 않고 밀착되었다. 발해의 사신이 주로 견문한 곳이 대명궁이라면, 상경성의 궁성의 궁궐 배치도 태극궁보다 대명궁을 모범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상경성 궁성의 제1궁전터보다 제2궁전터가 더 규모가 크고, 두 궁전 사이에 문이 설치된 점에서 제2궁전터가 정전에 해당될 가능성이 더 크다. 즉 제1궁전터가 외조(外朝)에, 제2궁전터가 중조(中朝)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1궁전터와 궁성 남문 사이의 넓은 광장에 조당(朝堂)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한편 제4궁전터의 경우 기단이 다른 궁전들에 비해 낮다. 그 궁전은 중심에 있는 본채와 좌우의 곁채 모두 3개의 집으로 이루어졌고, 이 궁전터의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집이 있다. 여기에는 모두 온돌이 설치되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규모상에서 제1․2․5궁전터와 구별되므로 제4궁전터는 제3궁전터와 함께 왕이나 그 측근이 일상적으로 쉬던 침전(寢殿)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곳이 외조(外朝)에 해당된다.
한편 발해의 상경성이 당나라 장안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점 못지않게,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사실은 제4궁전터의 경우 온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상경성 안팎의 9개의 절터에서 사용된 기와의 모양은 궁전터의 그것과 같고, 그 대부분은 연화문(蓮華文)에 약간의 장식문을 가미하였는데, 이 또한 고구려 와당(瓦璫)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상경성 궁성의 구조는 당나라 장안성과 비교하여 유추할 수 있지만, 궁성이나 궁전의 명칭은 기록이 전무한 상황에서 알 수 없다. 다만 궁전의 명칭을 추정할 수 있는 사료가 발해 멸망기에 등장한다.
태조(太祖, 耶律阿保機)가 동쪽으로 (발해를) 정벌하니,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하였다. (발해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공격하였다. 돌려불(突呂不)이 제일 먼저 (성에) 오르니 발해가 평정되었다. 조서를 받들어 태조의 공덕을 영흥전(永興殿) 벽에 새겼다.(『遼史』 권75, 列傳5, 耶律突呂不)
요(遼) 태조(太祖)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나서 돌려불(突呂不)에게 태조의 공덕을 새기게 한 영흥전(永興殿)은 발해 상경성의 다섯 궁전 가운데 하나의 명칭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그리고 여기에 정복자의 공덕을 새겼다는 점에서 영흥전은 궁성 안의 정전(正殿)의 명칭일 것이다. 그런데 장안성의 궁성의 명칭인 태극궁(太極宮)은 중조(中朝)인 태극전(太極殿)에서 유래한 점을 감안하면, 발해의 경우도 유사하였을 것이다. 즉 상경성 궁성에서 중조(中朝)가 영흥전(永興殿)이라면 궁성의 명칭도 영흥궁(永興宮)이라고 불리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밖에 궁성 안에서 ‘보덕(保德)’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영흥전을 제외한 다른 한 궁전의 이름이 보덕전(保德殿)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영흥궁의 구체적 범위가 태국궁과 비슷하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궁성의 나머지 부분 가운데 동궁(東宮)을 동쪽 구역의 금원(禁苑) 뒤쪽으로 보기도 하고, 제8호 도로에 의해 궁성과 구분되는 별궁(別宮, 離宮)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궁성의 중심부분만 궁성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영흥궁(永興宮)의 동쪽은 동궁(東宮), 서쪽은 서궁(西宮)으로 보아 13∼20호 건축터와 28∼31호 건축터가 각각 이에 해당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2] 황성
황성은 제5호 도로를 사이에 두고 궁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크기는 동벽 447m, 서벽 454m, 남벽 1,045m, 북벽 1,050m로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황성은 동서로 3개의 소구역으로 나뉘는데, 동서 두 구역은 동서 413m, 남북 355m로 서로 크기가 같으며, 여기서 관청터로 추정되는 10개의 건축터를 발견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그 위치나 건물의 배치로 보아 발해의 중앙정치기구인 3성 6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청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반면 중구는 지세가 평탄하고, 유물이나 유적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구는 황성남문과 궁성남문을 잇는 길이며 동시에 궁성 앞 광장이기도 하다. 광장의 동서 너비는 222m이며 남북의 길이는 황성 남북의 길이와 같다.
발해는 중앙통치기구로 3성(政堂省, 宣詔省, 中臺省), 6부(忠․仁․義․智․禮․信部), 1대(中正臺), 7사(殿中․宗屬․太常․司賓․大農․司藏․司膳寺), 1원(文籍院), 1감(冑子監), 1국(巷伯局) 등을 설치하였고, 군사제도로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 좌우웅위(左右熊衛), 좌우비위(左右羆衛),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 등 10위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관서(官署)가 황성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10위는 궁성 및 황성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발해의 전성기 때의 궁성 및 황성의 모습은 다음 사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대화(大和) 6년(832) 12월 무진(戊辰)에 내양(內養) 왕종우(王宗禹)가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발해가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과 좌우삼군(左右三軍), 그리고 120사를 설치했다고 말하고 그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舊唐書』 권17下, 本紀 17下, 文宗 下)
832년(咸和 2)에 발해에 파견되었던 당나라 사신의 보고에 의하면 발해는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과 좌우삼군(左右三軍) 및 120사를 두었다. 당나라의 경우 장안성의 대명궁(大明宮)을 호위하는 군영을 좌우삼군(左右三軍)이라 하며,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은 삼군(三軍)의 하나이다. 좌우삼군은 북아삼군(北衙三軍)이라고도 부른다. 남아(南衙, 皇城)에 배치된 16위가 전국에서 번상(番上)하는 부병(府兵)에 의해 편성된 정규군인 데 반해, 이는 황제직속의 근위군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발해가 내분기를 극복한 이후 장안성을 본따 상경성을 수축하였다면, 도성의 수비나 관서의 배치도 장안성을 모범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이 좌우삼군(左右三軍)과 구별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 성격은 당과 마찬가지로 국왕 직속의 궁성수비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그림에 포함된 120사의 경우 황성에 배치된 관서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외성
외성의 규모는 동벽 3,358.5m, 서벽 3,406m, 남벽 4,586m, 북벽(凸형) 4,946m의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총둘레는 162,965m이다. 대체로 당의 장안성(동서 약 9.7km, 남북 약 8.7km)의 1/4이며, 일본의 평성경(平城京)과 평안경(平安京, 동서 약 4.5km, 남북 약 5.3km)보다 조금 작다.
성문은 동벽과 서벽에 각각 2개, 남벽과 북벽에 각각 3개 있는데 서로 일직선상에 있다. 성안에는 이 성문들을 연결하는 길과 그밖의 길을 합쳐 모두 11개의 도로가 있다. 즉 외성벽 안을 감돌은 제11호 도로를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도로는 모두 일직선으로 마주 향한 성문 또는 성벽 사이를 이은 까닭에 십자형(十字形)을 이루며 바둑판 모양으로 전체 성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중 너비가 110m로 가장 넓은 것은 흔히 당 장안성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연상시키는 제1호 도로(2,195m)이다. 이 도로는 외성 남벽의 가운데 문과 황성 남문을 연결하는데, 이를 통해 곧장 궁성으로 들어간다. 제1호 도로는 성을 동서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편의상 그 동쪽을 동반성(東半城), 서쪽을 서반성(西半城)이라고 부른다. 당나라 장안성이나 일본의 평성경․평안경은 이 길을 중심으로 각각 좌경(左京)과 우경(右京)으로 불렀기 때문에 발해 상경성의 경우도 당시에는 이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도로들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갈라진 외성의 각 구역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과 절, 시장 같은 것이 있던 里坊이 있다. 동반성 이방(里坊)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으나, 서반성 이방(里坊)의 배열상태는 잘 밝혀져 있다. 여기에는 41개의 이방(里坊)이 있는데 큰 것은 9개, 작은 것이 32개이다. 이방(里坊)의 크기는 동서 465∼530m, 남북은 큰 것이 350∼530m 작은 것이 235∼265m이다. 이방(里坊)은 다시 여러 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구획의 규모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동서 혹은 남북으로 질서정연하게 쌓은 벽에 의하여 나누어진 점에서는 모두 같다. 각각의 이방(里坊)에는 귀족, 관료, 일반 주민들이 거주하였을 것이다.
외성은 좌우대칭 구조로 이루어졌으므로 동반성에도 41개의 이방(里坊)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모두 82개의 이방(里坊)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궁성의 동쪽에는 2개의 이방(里坊)이 하나의 구획(동서 500m, 남북 780m)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궁성의 동문을 거쳐 궁성의 금원(禁苑)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 구획안에 비교적 규모가 큰 집자리가 15군데나 있는 점은 궁성안의 모습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곳은 별궁(別宮, 離宮)으로 보인다.
한편 서반성의 세로 제3열 북쪽에서 제4∼5이방(里坊) 사이에는 동서 길이 190m, 남북 너비 110m되는 장방형의 구획이 있는데, 여기서 5개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이 구획은 두 이방(里坊) 사이에 위치한 점이 다른 이방(里坊)과 다르기 때문에 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좌우대칭의 도시구획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서시(西市)에 해당되고, 동반성의 경우에는 동시(東市)가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10개의 절터가 발견되었는데, 두 곳(제8․9호 절터)은 외성 밖에 있다. 외성 안에 있는 절터 가운데 세 곳의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이 동경 팔련성 남벽 바깥에서 발견된 3개의 절터와 비슷하다.
이와 같은 상경성의 건설계획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이 적용되었다. 첫째 4각형을 기초로 하는 방안법, 둘째 왕권중심의 겹성제도[重城制], 셋째 축대칭수법, 넷째 2등분법이다. 특히 겹성제도는 도성의 대지선정에서 전반적으로 북으로 차츰 높아져 그 윗부분에 궁성과 황성이 배치하면서 도시전체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도록 하여 궁성이 도시전반, 주민 거주지 위에 ‘군림’하는 자세가 되도록 하였다. 또한 축대칭수법을 통해 외성의 남중문과 북중문을 통하는 남북중심축이 대칭의 중심으로 되고 있다. 이 중심축은 궁성의 5개 궁전과 궁성의 남북문, 황성 남문을 통과하고 있다. 겹성제도와 축대칭수법은 모두 왕권중심의 도시계획적 표현의 하나이다.
皇城 이남의 외성구획은 2등분법이 적용되어 제1호 도로에 의해 크게 두 부분으로 갈라진다. 동반성(東半城)과 서반성(西半城)을 동서와 남북 방향에서 다시 각각 2등분하면 4개의 정방형 구획이 얻어지는데, 이 구획들은 너비가 78m의 도로들(제2․3․4호 도로)에 의하여 갈라진다. 이 구획 하나하나는 도시계획상 구역을 이룬다. 정방형의 이 구역들을 동서방향으로만 2등분하면 동서로 긴 장방형 구획들로 나뉘어진다. 이 장방형의 두 변의 비는 약 1 : 2이다. 이 장방형 구획은 도시계획상 소구역을 이루며 소구역들 사이는 너비 28m의 도로들(제7․10호 도로)에 의하여 구분된다. 이 소구역들이 도시계획의 기본단위가 된다. 장방형 소구역들을 동서와 남북 방향에서 다시 각각 2등분하면 동서로 긴 장방형 구획이 각각 4개씩 얻어진다. 이 장방형구획의 두 변의 비는 약 1 : 2이다. 이 장방형 구획이 도시계획의 최소단위인 이방(里坊)을 이룬다. 이방(里坊)들 사이는 이방(里坊) 벽에 의하여 구분되었다. 여기에서 각 이방의 동서길이는 궁성의 절반너비와 같고 남북길이는 그 절반에 맞먹는다. 그리고 궁성과 황성 좌우구획에서도 동서방향에 대해서는 2등분법으로 하였다. 다만 남북방향에서만 한번 3등분법을 썼다.
상경성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궁성과 황성이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그 둘레를 돌로 쌓아 일반인의 거주지인 이방(里坊)과 구별한 점이다. 또한 이방(里坊)들 사이를 경계지은 이방(里坊) 벽(담장)은 돌로 벽심을 넣고 그위에 흙은 덮은 것인데, 현재 남아있는 돌심벽은 벽체부분이 너비 1.1m, 밑부분이 너비 1.8m나 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나라나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도성의 규모가 서로 다른 만큼 설치된 이방(里坊)의 숫자가 다르다. 즉 상경성에는 82개의 이방(里坊)이,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110방, 일본의 평성경(平城京)의 경우 68방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제사와 행정의 중추기관을 궁성 및 황성 한 곳에 집중하고, 민간의 가옥과 격리한 것은 북위(北魏)의 낙양성(洛陽城)이 처음이다. 그리고 낙양성에 대규모의 이방(里坊)이 출현하는 것은 대규모의 사민(徙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주민은 성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인민은 사방으로 외성에 버금가는 두꺼운 방장(坊墻)에 둘러싸인 방내(坊內)에 살면서 2개 혹은 4개의 방문(坊門)을 통해서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 교역행위는 시(東市와 西市)라고 불리는 특정의 방내(坊內)에서만 정오부터 일몰 때까지만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이런 도시구조의 목적은 주민통제에 있었다.
한편 일본의 경우 등원경(藤原京) 천도(694)에서 평안경(平安京) 천도(794)에 이르기까지 천도에 앞서 택지반급(宅地班給)이 실시되는 특징을 보인다. 택지반급(宅地班給)의 직접적인 대상은 주로 관인(官人)인데, 일본율령국가(日本律令國家)의 지배자층(支配者層)은 기내(畿內)의 유력호족(有力豪族) 출신이다. 택지반급은 이들에게 기내(畿內)의 본거지를 떠나 도성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며, 또한 호족의 지위를 벗고 도성에 생활의 기반을 갖는 귀족(貴族)으로 전신(轉身)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민(徙民)이라는 점에서는 중국에서 행해진 것과 공통성을 갖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이 관료제 형성의 일환으로서 실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도성은 권력집중(權力集中)의 장(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도성(都城)이 대규모의 사민(徙民)을 통해 이루어지고 아울러 권력집중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점은 발해의 상경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발해는 지방 통치를 위해 초기에 현지 지배자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중앙귀족으로 편입시켜 나가다가, 문왕 후기부터 선왕대까지는 지방관들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경성의 확대가 선왕(宣王)․대이진대(大彛震代)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치 않다. 도성의 확대 과정에서 대규모의 사민이 요구되고, 도성 내부에 관료와 인민을 통제하기 위한 이방(里坊) 구조를 갖추게 된 사실 등은 지방관의 파견과 함께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의 확립에 수반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궁성, 황성, 외성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규모의 현존 상경성은 발해 전기의 도성이었던 중경이나 동경과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상경성은 천도와 환도 과정에서 규모와 구조가 큰 변화를 겪었다. 즉 상경은 756년 무렵 천도하였을 때는 지금의 궁성 정도의 규모였으며, 중경이나 동경과 마찬가지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이러한 규모와 구조의 상경은 결국 문왕대부터 추진된 체제정비 과정과 맞물려 확대되어 간 것이다. 그 단서는 동경 도읍기에 외성의 설치가 계획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발해는 문왕 사후(793)에서 선왕 즉위(818)까지 내분기에 휩쓸렸기 때문에, 곧바로 상경의 규모를 확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내분기에서 상대적으로 안정기인 강왕대에 현존 상경성의 황성 규모로 확대되었고, 선왕 이후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외성을 갖춘 현존 상경성의 규모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와 아울러 내성이 궁성과 황성으로 구분되고 아울러 궁성 내부에도 새로운 궁궐도 조영되었다.
이러한 규모의 상경성은 당나라 장안성과 유사하게 궁성과 황성이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일반 주민의 거주지인 이방(里坊)과 구분되어 있다. 이러한 도성 구조는 통치형(統治型) 황제가 남면(南面)하여 주민들을 통제하는 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발해의 지배층이 지향한 지배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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