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kkucult.culturecontent.com/story/story_text.asp?id=CP0432151002&type=4&item=1&cid=2&pno=1&pid=CP0432151007
발해의 천도과정
1. 발해를 연 구국(舊國)시대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8
2. 구국에서 현주로, 현주에서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299
3. 상경에서 동경으로, 그리고 다시 상경으로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0
4. 발해 천도의 배경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1
5-1. 상경성의 규모의 확대와 구조의 변화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2
5-2. 상경성의 구조 - 해동성국 http://tadream.tistory.com/303
2장. 구국에서 현주(顯州)로, 현주에서 다시 상경(上京)으로
698년 구국(舊國)에서 건국한 발해는 756년 무렵 상경으로 천도하기 이전에 한차례 현주로 천도하였다.
중경(中京)은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吉林省 和龍市 西古城)으로 비정된다. 성의 남쪽에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서북쪽에서 동남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은 두도(頭道) 평야의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으로, 두도평야는 해란강 유역의 평야 중에서 가장 크다. 주변에서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으로 유명한 용두산 고분군(龍頭山 古墳群)과 순금제 장식들이 발견된 하남둔(河南屯) 고분군, 북대(北大) 고분군들이 발견되었다.
성은 토성(土城)으로서 외성(外城), 내성(內城)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의 동서벽은 각각 약 729m, 남북벽은 각각 628m로 총둘레는 약 2,714m이다. 내성은 동서의 길이 약 190m, 남북의 길이 약 310m로 총둘레는 약 1,000m이다. 내성의 중․북부에서 모두 5개의 건축지가 확인되었다.
발해가 구국에서 현주로 천도한 시점은 무왕시대로 추정된다.
무왕대는 발해가 주변으로 활발하게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하여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신라가 당나라와 결탁하게 되었다. 특히 726년 당나라가 흑수말갈에 라마주(羈縻州)를 설치하자, 발해 내부에서 흑수말갈 토벌을 둘러싸고 무왕 대무예(大武藝)와 그 아우 대문예(大門藝)간에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다.
결국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고, 무왕은 집요하게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하다가 732년 9월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할 때, 당시 발해의 수도가 규모가 협소한 구국(舊國)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무렵을 전후한 시기에 현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무왕은 732년을 전후한 시기에 현주로 천도하였지만, 이후 즉위한 문왕은 756년 무렵 다시 상경(上京)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인 755년 11월에 당나라에서는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하여 이후 8년간 혼란의 상황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변경에만 설치된 번진(藩鎭, 節度使)이 내지로 확산되었다. 곧 변경번진(邊境藩鎭)에서 내지번진(內地藩鎭)의 시기로 전환된 것이다. 이 때문에 무왕이 현주로부터 상경으로 천도하게 된 데에는 안사의 난에 대한 대비라는 대외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안록산(安祿山)은 일찍이 당나라의 발해 방면 책임자로서 신라와 함께 발해를 견제하였기 때문에, 발해는 안사의 난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발해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이 대비책을 강구한 것으로 보아, 발해의 무왕도 안록산이 동진하여 발해를 공격해 올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발해가 건국 이래 60여년 동안 동북쪽으로 상당히 발전하였기 때문에 통치의 중심지를 동북쪽으로 옮길 필요성까지 제기되었다.
특히 발해는 무왕대에서부터 북진정책을 추구하여 흑수말갈 문제로 당과 충돌하기까지 했었다. 무왕의 북진정책을 이어받은 문왕대 초반에 불열(拂涅)․월희(越喜)․철리말갈(鐵利靺鞨)을 복속한 뒤에는 흑수말갈의 복속이 최대 과제였을 것이다.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은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 이후 10년간 대당교섭을 중단하였다. 문왕 즉위 이후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흑수말갈은 다시 741~752년간에 7차례 당에 입공하였다. 발해로서는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접근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경 천도 후 문왕 말기까지 흑수말갈의 대당조공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상경 천도를 통해 흑수말갈의 통제를 강화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볼 때, 상경 천도의 목적을 안사의 난에 대한 대비하려는 목적과 함께 당나라의 약화를 틈타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구국(舊國) → 현주(顯州) → 상경(上京)으로의 천도 과정에서는 발해의 영역 확장에 따른 대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