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음모’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희한한 인연’
정웅재 기자 jmy94@vop.co.kr 입력 2013-08-28 14:49:44 l 수정 2013-08-28 15:45:31 기자 SNS http://www.facebook.com/newsvop

국가정보원이 28일 이석기 의원 등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에게 '내란음모죄' 혐의를 적용해 압수수색에 나섰다. 내란음모죄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역사에는 등장한 바 없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 때인 1980년 정권이 꾸민 조작사건으로 인해 '내란음모죄'로 고초를 겪은 바 있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때는 몇 차례 더 등장하는데,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양심세력을 반공법으로 옭아매기 위해 조작한 것이 대부분이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당시 대공수사국장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대표적인 것이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단순한 시위지도기관을 국가변란을 목적(내란음모)으로 폭력혁명을 기도한 반정부조직으로 왜곡 날조한 사건이다. 

1974년 3월 들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시위가 빈발한 가운데 정권은 전국 대학의 반독재 연합시위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4월 3일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에서 소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현장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뿌려지자, 박정희 정권은 이날 밤 민청학련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며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민청학련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에 관련된 이들은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민청학련과 이것에 관련한 제 단체의 조직에 가입하거나, 그 활동을 찬동,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에게 장소, 물건, 금품 그 외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그 활동에 관한 문서, 도서, 음반, 그 외의 표현물을 출판, 제작, 소지, 배포, 전시, 판매하는 것을 일제히 금지한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되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학생의 출석거부,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그 외의 모든 개별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학생은 퇴학, 정학처분을 받고 해당학교는 폐교처분을 받는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4월 25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와 조총련계 및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 세력"이라고 했다. 이 사건으로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745명은 훈계 방면되고 253명은 비상군법회의에 송치됐다. 이철, 김지하 등 14명에게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내란음모 등)로 사형이 선고됐고, 정문화 등 16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최고 20년에서 최하 5년 징역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중형이 선고됐다. 

이후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 및 시위가 광범위하게 번져가고 국제여론도 악화되자 정부는 사건 발생 10개월 만에 인혁당 사건 관련자와 반공법 위반자 일부를 제외한 사건 관련자 전원을 석방함으로써 이 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스스로 폭로했다. 이철 등 사건 관련자들은 재심을 청구해 2010년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고 누명을 벗었다.

민청학련 사건 변론을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한인섭 교수와의 대담집 '인론변론 한 시대'에서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한마디로) 4월 3일 날 일제히 데모를 하려던 계획이 들통이 나서 긴급조치가 내려진 사건"이라며 "이때 등장하는 사람들을 인명색인을 만들면 197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인사말 하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인사말 하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이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새누리당 대표실을 찾아 황우여 대표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정치검사 맏형 김기춘, 
"공안정국 조성해 정권안보 버팀목 역할"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했던 중앙정보부의 당시 대공수사국장은 현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를 맡았다. 민청학련사건 외에 사법살인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인혁당사건(1974~1975), 3.1 명동구국선언사건(1976), 전국 대학생 유신반대운동(1978) 등 굵직한 사건들이 그의 수사국장 재임 시절 터졌다. 

1972년 법무부 검사 시절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한 그는 노태우 정권 초인 1988년 검찰총장에 취임해서는 이듬해 4월 국가안전기획부 등 공안관계기관을 망라한 공안합동수사부를 설치, 불과 두 달 반 동안 300여 명의 시국사범을 구속하는 등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언론인 출신 전직 국회의원은 김기춘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까지 오른 것은 "공안정국을 조성해 정권안보의 버팀목 역할을 한 공로" 덕분이었다고 평가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2008년 17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물러났고 사실상 야인으로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자문그룹인 7인회 멤버이긴 했으나 정치권 전면에 부상했던 인물이 아니다.

'올드보이'인 그는 8월 5일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되면서 화려하게 귀환했다. 젊은 시절 공안통이었던 그가 75세의 나이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공안정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었다. 

공안정국 조성으로 정권 버팀목 역할을 했던 '공안통 김기춘 검사'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복귀하고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정권이 난처한 상황에서 30여년 만에 국정원에서 '내란음모죄' 혐의 사건 카드를 꺼낸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홍성규 통합진보당 대변인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체제를 선포한 후 내린 일련의 조치가 긴급조치다. 긴급조치 발동 직후 꾸몄던 음모가 '민청학련' 사건"이라며 "긴급조치는 1979년 9호를 끝으로 해제됐으나 오늘 박근혜 정권은 대를 이어 '긴급조치 10호'를 발동했다"고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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