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고구려 성단위 지방통치제 - 우리역사넷"에서 욕살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욕살(褥薩)
 
(3) 고구려 성단위 지방통치제 - 우리역사넷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제도
 
 
지방통치의 중심지인 대성(大城)에는 최고 지방관인 욕살이 파견되었다. 욕살은 당의 지방관인 都督에 비견되는데,<고자묘지>에 고량(高量)이 삼품책성도독위두대형(三品柵城都督位頭大兄)을 역임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도독으로 부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578) 이 욕살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대체로 제5위인 위두대형 이상이었다.579)
 
욕살은 5세기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고,≪주서≫고려전에 최하위 관등명으로 처음 나타나고 있으나, 이는 지방관명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수서≫고려전에는 내평과 외평의 5부에 욕살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6세기의 사정을 전하는 史書에 욕살의 명칭이 처음 등장함을 보면, 욕살의 설치는 6세기 무렵으로 짐작된다. 최고위 지방관인 욕살의 등장은 광역의 행정구역이 설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6세기에 들어 지방통치제가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된 결과이다. 욕살은 중앙의 명령을 받아 하위 행정단위에 전달하고 또 이를 통솔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욕살 아래의 지방관은 처려근지로서 일명 도사라고도 하였다. 
(중략) ...
최하위의 지방관은 가라달(可邏達)과 루초(婁肖)였다. 당의 장사(長史)에 비견되는 가라달은 욕살이나 처려근지의 직할지를 관장하는 막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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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6·7세기의 지방조직은 욕살·처려근지·누초를 지방관으로 하는 3단계 구조였기 때문에, 당대 중국 사서에서는 이를 당(唐)의 도둑부(都督府)―주(州)―현(縣)의 구조에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방조직의 구조는 당과는 전혀 달랐다.
 
먼저 욕살이 관장하는 통치 구역은 5부로 추정되는데, 사료상으로는 욕살이 파견된 성으로 책성(柵城)과 오골성(烏骨城)이 확인된다. 책성은 두만강 하구지역인 훈춘/혼춘(珲春/琿春) 일대로서 고구려 초기부터 동북방의 요충지로 중시되었으며, 오골성은 오늘날의 요동 봉황성으로서 요동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으로 요동지역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이들 책성과 오골성은 5부의 치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욕살이 파견된 성이 반드시 다섯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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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지방행정의 통속관계를 보면, 5부의 욕살은 휘하에 처려근지가 다스리는 10여 성을 거느리고, 처려근지는 누초가 파견된 2∼3개 소성을 통솔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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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방관은 행정조직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할 지방군의 지휘관의 역할도 겸하였다. 당태종의 침입시에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15만 고구려군을 이끌고 출정한 사실이나,585) 수·당과의 전쟁에서 각 성의 城主가 곧 군지휘관으로 활동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578)〈德興里古墳(덕흥리고분) 墨書銘(묵서명)〉에도 ‘中裏都督(중리도독)’이란 명칭이 보인다.
 
579)《冊府元龜(책부원귀)》권 170, 帝王部來遠條(제왕부래원조)의 “高麗位頭大兄里大夫後部軍主高延壽(고려위두대형이대부후부군주고연수), 大兄前部軍主高惠眞(대형전부군주고혜진)”이라는 기사에서 욕살인 高延壽(고연수)의 관등이 位頭大兄(위두대형)임을 알 수 있다.
 
580) 長史(장사)는 ‘遼東城長史(요동성장사)’의 1예가 보이는데(《삼국사기(三國史記)》권 21,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9, 보장왕 4년), 요동성은 요동지역의 요충지로서, 褥薩(욕살)이나 적어도 道使(도사)급 이상의 지방관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동성 長史(장사)는 遼東城主(요동성주)가 아니라 그의 막료일 것이다.
 
585) ≪한국사기(三國史記)≫권 21,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9, 보장왕 4년.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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