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아래
* 참고 : 관등 : 정1품, 5급 공무원 / 관직 : 영의정, 차관 / 고구려는 관등과 관직 구분이 불분명
태대형(太大兄)와 막리지(莫離支)
수서의 고구려 관제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권 제40잡지 제9 > 외관(外官) > 수서의 고구려 관제
註) 935
태대형(太大兄):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라고도 한다. 『주서(周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구당서(舊唐書)』 및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 등에서 확인할 수 있고, 『고려기』에는 정2품(正二品)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 대형(大兄), 소형(小兄) 등과 함께 형계(兄系) 관등에 속하며, 이들 중 가장 높은 관등이다. 고구려 후기에는 대대로(大對盧), 울절(鬱折), 태대사자(太大使者), 조의두대형 등과 더불어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한 논의와 처리를 담당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수서』 고려전(高麗傳)을 참고할 것.바로가기
신당서의 고구려 관제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권 제40잡지 제9 > 외관(外官) > 신당서의 고구려 관제
註) 970
막리지(莫離支): 고구려 관명(官名)의 하나다. 본서 권49 열전(列傳)9 연개소문전(淵蓋蘇文傳)에 막리지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中書令)의 역할과 같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막리지를 관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관등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막리지를 관등으로 규정하는 견해로는 대대로(大對盧)보다 상위의 관등으로 보는 견해(今西龍, 1932, 230쪽), 대대로라고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157쪽), 태대형(太大兄)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 1978, 379~386쪽; 노태돈, 1999, 468쪽; 임기환, 2004, 287~292쪽; 여호규, 2014, 416~417쪽) 등이 있고, 관직으로 이해하는 견해로는 제2관등 이상이 취임하는 고위 관직으로 보는 견해(리승혁, 1985, 24쪽) 등이 있다. 또한 태대형으로 인식될 만큼 관등으로서의 성격을 가졌지만 동시에 관직으로서의 성격도 갖는 중리태대형(中裏太大兄)이었다고 추정하는 견해(李文基, 2000, 75~78쪽)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증조 자유(子遊)와 조부 태조(太祚)는 모두 막리지를 역임하였고, 부친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를 역임하였다고 하였고,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에 증조 고식(高式)이 2품(二品) 막리지를 맡았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본서 권21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9 보장왕(寶藏王) 3년(644) 1월조를 참고할 것.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이마니시 류(今西龍), 1932, 『신라사연구(新羅史硏究)』, 도쿄(東京): 국서간행회(國書刊行會)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1954, 『신라사의 제문제(新羅史の諸門題)』, 됴쿄(東京): 동양문고(東洋文庫)
리승혁, 1985, 「고구려 ‘막리지’에 대하여」, 『력사과학』 1
이문기(李文基), 2000, 「고구려(高句麗) 막리지(莫離支)의 관제적(官制的) 성격(性格)과 기능(機能)」, 『백산학회(白山學報)』 55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1978, 「고구려관위제와 그 전개(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 『조선학보(朝鮮學報)』 86
대막리지 (大莫離支)
우리역사넷 > 우리 역사 나침반 > 교과서 용어 해설 > 시대별 > 전체
시대 : 삼국 시대 > 고구려
유의어 : 막리지(莫離支),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대대로(大對盧)
[정의]
고구려 말기에 행정과 군사권을 장악한 관직 혹은 관등.
[내용]
막리지(莫離支)는 고구려 제2관등인 태대형(太大兄)의 다른 이름이다. 고구려 말기의 귀족 연립 정권 체제에서 국정 운영은 유력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력 귀족 몇 명이 막리지의 지위에 올라 국정 운영을 위한 귀족들의 회의에 참여하였고, 여러 막리지 중에서 제1관등인 대대로(大對盧)를 선임하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대대로의 임기는 3년이었다.
642년(고구려 영류왕 25년) 막리지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다른 막리지보다 우위에 있는 대막리지에 올랐다. 대막리지는 국정을 총괄하는 대대로의 역할과 함께 군사권까지 장악한 최고의 직위가 되었다. 연개소문은 종신토록 대막리지를 독점하는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인 연남생(淵男生, 634~679)과 연남산(淵男産, 639~701)은 대막리지보다 더 높은 직위를 의미하는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란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그 지위와 역할은 대막리지와 차이가 없었다.
한편 막리지를 제1관등인 대대로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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