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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살(褥薩)
고연수와 고혜진이 안시성을 구원하러 오다 ( 645년 (음) ) - 한국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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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살(褥薩) : 6~7세기 왕도와 지방의 민정관이자 군사지휘관이었다. 구체적인 사례로 남부 욕살 고연수와 북부 욕살 고혜진 이외에 오골성(烏骨城) 욕살이 보인다. 『한원(翰苑)』 권30 번이부30 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따르면 욕살은 당의 도독(都督)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이에 「고자묘지(高慈墓誌)」·「고질묘지(高質墓誌)」·「이타인묘지(李他仁墓誌)」에 보이는 책성(柵城) 도독 고량(高量)·책주(柵州) 도독 이타인(李他仁), 「고흠덕묘지(高欽德墓誌)」에 보이는 건안주(建安州) 도독 고원(高瑗) 일족, 「고을덕묘지(高乙德墓誌)」에 보이는 요주(遼州) 도독 고과(高夸)·해곡부(海谷府) 도독 고부(高孚)는 욕살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이성제, 170-176쪽). 한편 『책부원귀』 권170 제왕부170 내원 태종 정관 19년(645)7월조(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 大兄前部軍主高惠真等 …)와 『전당문』 권7 수고연수고혜진관작조(授高延壽高惠眞官爵詔)에서는 고연수와 고혜진이 군주(軍主)로 나온다. 이에 본서 신라본기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조 중 평양성내(平壤城內)에서 전사한 군주(軍主) 술탈(述脫) 역시 욕살이었다고 보기도 한다(김현숙, 359쪽).
이상의 사례와 관련하여 『수서』 권81 열전46 동이와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가 참고된다. 『수서』에서는 12관등을 설명한 데 이어 “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복유내평외평오부욕살)”라고 하였고, 『고려기』에서는 ‘제대성(諸大城)에 욕살을 두었다(“又其諸大城置傉蕯/요기제대성치욕살").’라고 하였는데, 두 사서의 서술을 상호보완해서 보면 욕살은 이상의 사례와 같이 5부와 주요 대성(大城)에 주재하였다고 파악된다. 다만 『수서』 고려전에서 내평·외평·5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내평과 외평을 중앙과 지방으로 풀이하는 데 큰 이견이 없지만, 5부와 욕살의 소재를 두고 여러 이견이 나온 것이다. 내평과 외평을 합쳐서 5부가 있었고, 그와 아울러 주요 대성(大城)에 욕살이 소재하였다고 보기도 하였고(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340-344쪽), 내평과 외평에 각기 5부가 있어 내외의 10부에 욕살이 소재하였다고 보기도 하였으며(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154-160쪽; 임기환, 174-175쪽; 최희수, 69-71쪽), 내외의 10부와 아울러 주요 대성에 욕살이 소재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김현숙, 2005, 356-367쪽). 또한 왕도의 5부와 내평[기내(畿內]·외평의 제대성(諸大城)으로 보기도 하였고(이마시니 류/今西龍, 436-438쪽; 타케다 유키오/武田幸男, 41-42쪽; 손영종, 33-34쪽; 리승혁, 21-22쪽 ; 노태돈a, 258-261쪽), 같은 맥락에서 제대성 5개소를 특정해 보기도 하였다(이성제, 168~176쪽).
욕살은 중국 사서 중 『주서』 권49 열전41 이역상 고려에 처음으로 보인다. 6세기 이후 지방제도의 변화 속에서 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a, 285쪽). 당의 도독에 비견된 것처럼 민정관이자 군사지휘관이었다고 파악되는데, 군사지휘관의 면모는 군주란 표현에서도 드러난다(전경옥, 75-77쪽; 노태돈, 1999, 248쪽; 손영종, 164쪽). 「유원정묘지(劉元貞墓誌)」에서는 ‘중국의 장군에 비견된다고 하였는데(“조루, 기료위누살 시중지장군야/祖婁, 寄遼爲耨薩, 視中之將軍也.”)’, 역시 욕살이 가진 군사지휘관의 면모를 보여준다(이정빈, 110-111쪽). 욕살에 취임한 인물들을 보면, 고연수·고량의 경우 위두대형이었고, 고혜진·고부의 경우 대형이었다. 당의 도독은 종3품 이상이었는데, 조의두대형[위두대형]이 당의 종3품에 비견되었다. 욕살은 위두대형 이상을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예외적으로 대형을 임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욕살의 욕(褥)은 사서와 판본에 따라 녹(傉)·누(耨)로 나오는데, 녹이 본자(本字)이고 욕·누가 가차자(假借字)였다고 보기도 한다(이마시니 류/今西龍, 438-439쪽). 『집운(集韻)』에 따르면, 욕은 “노옥절, 음록/奴沃切, 音傉”으로 나온다. 욕살의 살(薩)은 돌궐의 군사령관 설(設, sad)과 어원이 같다고 본 견해(노태돈, 2009, 68-69쪽; 통링/童岭/童嶺/동령, 406쪽)가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욕살이 6세기 중반 이후 돌궐을 비롯한 북방 유목사회의 영향을 받아 등장하였다고 본 견해(이동훈, 125쪽)도 참고된다.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 지배 방식 연구』, 모시는 사람들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이동훈, 2019, 『고구려 중·후기 지배체제 연구』, 서경문화사
손영종, 2007, 『조선단대사』 2(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51, 『만선사연구(滿鮮史硏究)』 상세 제1책(上世 第1冊), 요시가와 홍문관(吉川弘文館)
이마시니 류(今西龍), 1970,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の硏究)』, 국서간행회(国書刊行会)
임기환, 1996, 「지방·군사제도」, 『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전경옥, 1996, 「연개소문집권기(淵蓋蘇文執權期)의 막리지체제연구(莫離支體制硏究)」, 『백산학보(白山學報)』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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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빈, 2016, 「「천남생 묘지」에 보이는 將軍과 7세기 고구려의 군사 운용」, 『한국고대사탐구(韓國古代史探究)』 22
통링/동령(童岭/童嶺), 2017, 「정관년간당제국적동아정보·지식여일적-구초본(貞觀年閒唐帝國的東亞情報·知識與佚籍-舊鈔本)『한원(翰苑)』주인(注引)「고려기(高麗記)」연구(硏究)」」, 『동방학보(東方学報)』 92
이성제, 2018, 「욕살(褥薩)의 대성(大城)·왕도(王都) 5부(部) 주재(駐在)와 그 직임(職任)」,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92
손영종, 1984, 「고구려의 오부」, 『력사과학』 19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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