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지가 천도를 건의하다 ( 2년 03월(음) )
유리명왕 21년 3월 설지가 천도를 건의하다 ( 기원후 2년 03월(음) )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1 > 유리왕(琉璃王) > 설지가 천도를 건의하다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内 尉那巖得之, 拘於國内人家養之, 返見王曰, “臣逐豕至國内 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冝五穀, 又多麋·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21년(2) 봄 3월에 교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장생(掌牲)註 001 설지(薛支)註 002에게 명하여 이를 뒤쫓게 하였다. 〔설지가〕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註 003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큰 사슴·사슴·물고기·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할 뿐 아니라, 전쟁[兵革]의 걱정도 면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주
註 001 장생(掌牲) : 제사에 쓸 희생(犧牲)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유리명왕 19년(B.C. 1) 8월에 죽은 탁리와 사비 역시 제사에 쓸 돼지를 쫓았던 것을 보면 장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註 002 설지(薛支) : 유리명왕 시기의 장생으로 전한다. 본문에 나오듯 왕의 명령에 따라 달아난 제사용 돼지를 국내 지역에서 붙잡았고, 돌아와 왕에게 그곳으로의 천도를 건의하였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벌휴이사금 7년(190) 8월조에 나오는 좌군주(左軍主) 설지와는 동명이인이다.
註 003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 : 고구려에서 지역명으로 나타나는 ‘국내’가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집안평야(集安平野) 일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다만 그러한 이해와 달리 고국원왕 12년(342) 2월에 나타나는 국내성은 집안평야에 위치한 집안현성(集安縣城)을 가리키나, 유리명왕 시기 기사에 나타나는 국내는 지안 일대가 아니라 다른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23~25쪽; 권순홍, 200~206쪽). 해당 논의에서는 국내가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라고 전제한 뒤, 위나암[성]을 오녀산성에 비정하여 유리명왕 22년(3) 천도하였다는 국내를 환런[桓仁] 지역 내 오녀산성으로의 이거(移居)라고 파악하였다. 그런데 국내라는 표현은 유리명왕 시기 천도 관련 전승에서 나타난 뒤, 4세기 중엽 고국원왕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한다. 즉 용어 면에서 단절성이 두드러지므로 국내는 일반명사로 보기보다는 지안 지역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기경량/奇庚良, 72쪽). 물론 국내가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제천의례가 국동대혈(國東大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국(國)은 도읍(國都)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에, 국내 역시 ‘왕도(王都)’ 내지 ‘도성 안’을 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본기의 전거 자료가 특정 시기에 편찬된 사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기사들도 ‘국내’가 도성이라는 특정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을 때 만들어진 문헌에서 유래하였을 것이기에 현 지안 일대 외에 다른 지역을 상정하기 어렵다(임기환, 20~21쪽).
한편 국내에 이어 연달아 나오는 위나암의 경우, 유리명왕 22년(3) 10월 ‘위나암성’ 주석에서 서술하였듯이 환런의 오녀산성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국내 위나암’이라는 표현은 지역을 달리하는 지명이 합쳐져 기술된 셈이다. 실제 국내 즉 지안 지역으로 천도한 것은 유리명왕 시기보다 후대의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훗날 사료를 정리하면서 국내 천도가 유리명왕 시기의 사건으로 조정되고, 그 결과 본디 환런 지역에 소재하였던 위나암[성] 역시 자연스럽게 국내 지역에 있었다고 믿어지기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강진원, 18~25쪽).
〈참고문헌〉
노태돈, 2012,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68
권순홍, 2015, 「고구려 초기의 도성(都城)과 개도(改都)-태조왕대의 왕실교체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78
기경량(奇庚良), 2017, 「고구려 왕도 연구(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임기환, 2018, 「고구려 전기 도성(都城) 관련 기사의 재검토-기사의 원전(原典) 계통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65
강진원, 2020, 「고구려 졸본도읍기 왕성(王城)의 추이와 전승의 정비」, 『사림(史林)』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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