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70_0050_0130
하서촌고성(河西村古城)
하서촌고성 위성사진 및 위치도 https://bit.ly/3zkS3A6 https://j.map.baidu.com/ef/oXDi
유형 : 성곽>평지성
형태사항 : 길이 100m, 너비 약 50m라는 기록(쉬자궈/徐家國·쉬옌/徐琰, 1994; 여호규, 1999)│둘레가 1㎞라는 기록(쑨진지/孫進己·펑융첸/馮永謙, 1989;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1994)
출토지 :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 목기진 하서촌 / 푸순시 신빈시엔 무친전 허시춘 (撫順市 新賓縣/新宾县 木奇镇 河西村)
연대 : 고구려, 요·금·원
조사내용
1982 서가국(徐家國), 서염(徐琰)이 조사함.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해 무순현 철배산(鐵背山) 아래 혼하와 소자하가 합쳐지는 지점부터 신빈현 홍승향(紅升鄕) 백기촌(白旗村) 50㎞의 소자하 양안(兩岸)까지 답사하였는데, 신빈현 목기진 하서촌 동쪽 250m 소자하 서안(西岸) 구릉에서 발견함.
1986 왕옌허/왕면후(王綿厚)가 조사함.
1988 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
신빈현 목기진 하서촌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소자하 서안(西岸)의 구릉에서 고구려시기의 토기를 발견함.
2000 샤오징취안/초경전(肖景全), 정진(鄭辰) 등이 조사함.
신빈현문물관리소(新宾县文物管理所) 직원과 여러 차례 조사함.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출토된 지점은 소자하 근처 흙언덕인데, 기와와 와당이 100㎡ 안에서 분포함.
구조특징
지역주민들은 유적지를 대대자(大臺子)라고 부르고 있었음. 평면은 불규칙형임. 성의 규모와 관련하여 길이 100m, 너비 약 50m라는 기록(徐家國·徐琰, 1994; 여호규, 1999), 둘레가 1㎞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田中俊明, 1994)이 있음. 유적지 부면(剖面)에 드러난 문화층의 두께는 50㎝ 정도임.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음.
성벽과 관련하여 토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孫進己·馮永謙, 1989), 성벽을 찾을 수 없다는 기록도 있음(徐家國·徐琰, 1994; 肖景全·鄭辰, 2007).
출토유물은 고구려, 요, 금, 원대의 유물들이 출토됨.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출토된 지점은 소자하가의 흙언덕인데, 유물은 100㎡ 안에서 분포됨. 소토층(红烧土)이 비교적 두텁게 쌓여 있으며 이 층에서 암키와, 수키와, 연화문 와당이 발견됨. 이 범위 밖에 구릉에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肖景全·鄭辰, 2007).
유믈 중 철기는 철제 수레바퀴굴대축(車輨), 철제 화살촉(慢圓鋒 扁葉形), 철제 찰갑편 등이 출토되었음. 토기는 고구려시기 홍갈색 모래혼입 토기편이 출토됨. 기와는 유적지 지층에서 홍색 연화문 와당이 수습되었음. 와당은 소성온도가 높고 재질은 단단함. 직경은 13.5㎝임. 홍색 수키와, 홍색 사정격자문(網格文) 암키와 등이 출토됨. 기와편과 와당은 그을려져 왜곡되게 변형됨. 이외에도 당대(唐代)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출토됨.
역사적 의미
성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고구려에서 원(元)대까지 사용되었음(장정옌/張正巖·왕핑루/王平魯, 1994). 평지 토성인 것으로 보아 한대(漢代) 성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田中俊明, 1994), 한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함(여호규, 1999). 유적지에서 성벽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여 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음(徐家國·徐琰, 1994). 특히 유적지 안에 쌓여 있는 붉은소토(红烧土)에서 암키와, 수키와, 연화문 와당만이 발견된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성이 아니라 가마터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음(肖景全·鄭辰, 2007).
위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음.
먼저 목저성(木底城)설임.
동달/통따(佟達 1993, 1994)은 신빈현 목기진 동남쪽에서 발견된 비교적 큰 평지성(河西村古城)이 목저성(木底城)이라고 추정함. 장정암‧왕평로(張正巖‧王平魯 1994)는 647년 당(唐)의 이적(李勣)이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때, ‘영주도독병(營州都督兵)을 이끌고 신성도(新城道)로 진입하여, 차례대로 남소(南蘇), 목저(木底)에서 고구려 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신당서(新唐書)』권(卷)220)’고 하는데, 이로 볼 때 신성도(新城道)의 기점에는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함. 당대(唐代)의 신성도(新城道)는 동진(東晋)시기 고구려의 남, 북도 가운데 남도, 수(隋)대의 ‘남소도(南蘇道)’에 해당함. 그 길은 신성(新城)에서 시작하여 남소(南蘇), 목저(木底)를 거쳐 환인, 집안으로 들어감. 남도 상에 있는 성 가운데 남소성(南蘇城)은 동진(東晋)대에도 보이는데, 395년에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남소(南蘇)를 점령했다(『資治通鑑』 卷 97)’라는 기록이 있음. 즉, 고구려를 공격할 때 먼저 남소성을 점령하였음을 언급하고 있음. 그리고 339년 ‘모용황(慕容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병사가 신성(新城)에 이르렀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원(元)대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신성은 고구려의 서비(西鄙:서쪽 변방)로, 서남쪽으로는 산을 곁에 두고, 동북쪽으로는 남소, 목저 등의 성과 접해 있다(『자치통감(資治通鑑)』권 96)’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소성이 신성과 목저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음. 한편 남소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남소수(南蘇水)가 주목됨. 남소수는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남소성은 『진서(晋書)』에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함. 고대의 성 이름은 강의 이름을 따서 정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남소수는 남소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으로 추정됨.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고구려현조 주(注)에서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가 서북으로 새외(塞外:요새 밖)를 경유한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 기사에서 보이는 요수는 혼하이고, 고구려현의 위치는 신빈현 영릉진(永陵鎭) 남쪽의 한(漢)대의 고성(古城)부근으로 추정됨. 이로 볼 때, 남소수는 혼하지류와 한(漢)의 고구려현 할경(轄境:관할지) 내에서 찾을 수 있음. 그리고 신성, 남소, 목저를 거쳐 국내성으로 진격했다는 기사를 참고해 볼 때, 남소수와 남소성은 무순(撫順)의 동남쪽에서 찾을 수 있음. 즉 남소수는 혼하(요수)의 지류이고, 고구려현과 그리 멀지 않으며, 무순 동남방향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강은 소자하(蘇子河)임. 그렇다면 남소성은 득승보산성(得勝堡山城)으로 볼 수 있음. 목저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사서를 살펴보면, 신성, 남소, 목저 순으로 기재되어 있음. 이로 볼 때 목저성은 남소성 동쪽에 있다고 볼 수 있음. 『자치통감(資治通鑑)』함강(咸康) 8년조(年條)에는 ‘고구려에는 남도, 북도 2도가 있는데, 북도는 평탄하고, 남도는 험준하다’는 기록이 있고,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북도는 북치(北置)에서 나아가고, 남도는 남협(南陜)에서 목저성으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목저 역시 고구려 남도 상의 중요한 성이라고 볼 수 있음. 하서촌산성(河西村山城)은 남소성으로 추정되는 득승보산성(得勝堡山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목저성으로 볼 수 있음. 또한 유물 출토현황을 볼 때, 성의 사용연대가 비교적 길었다고 추정되는데, 당이 목저주(木底州)를 설치하였다는 기사와 발해가 계속해서 사용했다고 하는 문헌기록과도 부합됨.
여호규(1999)는 4세기경 고구려와 전연(前燕), 후연(後燕)의 전쟁로 및 7세기 후반 고구려와 당군의 전쟁로를 분석해 볼 때, 혼하, 소자하 일대에는 요동(遼東)방면에서 신성→남소성→목저성→창암성(蒼巖城) 등의 순서로 고구려의 주요 성이 위치하였을 것으로 봄. 이 가운데 신성은 혼하 북안에 위치한 무순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비정되며, 남소성은 소자하, 혼하 합류지점의 동쪽에 위치한 철배산성(鐵背山城)으로 비정됨. 목저성과 창암성(蒼巖城)은 남소성 동쪽의 소자하 연안에 위치하였는데, 소자하 연안의 지형으로 보아 각각 목기진과 영릉진 일대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하서촌고성은 북류(北流)하던 소자하가 서류(西流)하기 시작하는 지점 안쪽에 위치하여 상협하향(上夾河鄕)~목기진(木奇鎭) 구간의 통로를 따라 남진하였을 중국 측 세력을 방어하기에 아주 적합한 지점임. 따라서 하서촌고성이 목저성으로 가장 유력하다고 볼 수 있음.
두 번째는 목저주치(木底州治)설임.
서가국·서염(徐家國·徐琰 1994)은 당 건봉(乾封) 2년 설인귀(薛仁貴)의 금산대첩(金山大捷)에서 설인귀 부대는 신성에서 진입하여 목저, 창암을 점령하고, 연남생(淵男生)과 만났는데, 당시 연남생이 ‘국내성에서 사수(死守)하였다’라는 기록을 볼 때, 목저, 창암 모두 신성에서 국내성으로 통하는 길의 요충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함. 즉 이 성들은 신성(고이산성)에서 소자하를 따라 부이강(富爾江), 신개하(新開河)를 거쳐 국내성에 이르는 길인 남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임. 하서촌유적지는 바로 고구려 남도에 위치하고 있음. 유적지에 출토된 유물(당대의 개원통보)과 유적지의 지리방향 등을 고려할 때, 당대 목저주 치소(治所)로 추정됨. 하서촌유적지에서는 흙이 다져진 성벽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으로 볼 수 없는데, 『구당서(舊唐書)』권(卷)39 지리지(地理志)19의 “凡此十四州 並無城池. 是高麗降戶散此諸軍鎮 以其酋渠爲都督 刺史羈縻之”라는 기록을 볼 때 목저주치(木底州治)는 성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문헌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한편 목저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오룡산성은 고구려 남도와 10여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남도 상에 위치한다고 볼 수 없고, 여전히 길이 좁은 깊은 산구(山溝)로 군사 통로의 너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목저성으로 볼 수 없음.
세 번째는 목저성 부정설임.
왕면후(王綿厚 2002)는 목저성으로 비정하기에는 험준한 지리적 우세를 갖추지 않았고, 규모도 크지 않다고 함.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물과 유적의 상황을 볼 때, 당시 목저성과 관련된 “당도소성(當道小城)”혹은 가마터로 추정 함.
초경전·정진(肖景全·鄭辰 2007)은 성이 아니라 가마터이므로 목저성 소재지가 될 수 없다고 함.
자연환경
신빈현 목기진에서 서쪽으로 500m 지점에서 북류(北流)하는 소자하(蘇子河) 건너편의 이도구촌(二道溝村) 남쪽 구릉에 위치함. 신빈현 목기진 하서촌에서 동쪽으로 250m 떨어진 소자하 서안(西岸)의 구릉에 위치함.
목기진 일대는 소자하 연안 전체에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임. 소자하는 혼하(渾河), 소자하(蘇子河) 합류지점에서 상류로 거슬러 오면서 하협하진(河夾河鎭) 부근에서 소분지를 이루었다가, 하협하진(河夾河鎭)~목기진 구간에서 만곡이 심하고 험준한 협곡을 형성함. 이 구간을 빠져 나오면 목기진 부근에서 다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형성하게 됨. 그리하여 대화방(大伙房)댐이 건설되기 이전 신빈~무순 구 도로의 경우, 혼하, 소자하 합류지점에서 하협하향(河夾河鄕) 구간은 소자하 연안을 따라 도로가 이어지지만, 하협하진~목기진 구간은 더 이상 소자하 연안을 따라 이어지지 못하고 상협하진을 우회하여 구릉성 산지를 따라 도로를 개설하였음. 따라서 목기진 일대는 소자하 하류방면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음. 영릉진(永陵鎭) 일대를 놓고 볼 때, 목기진은 동일한 방어권역으로서 최전방 요해처라고 할 수 있음.
한편, 목기진에서는 남쪽으로 소자하 지류를 따라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나아가는 산간로가 갈라지고 있음. 현재 이 산간로변의 태자하 상류지역도 소자하 연안과 함께 신빈현 관내에 속해 있으며, 이 도로는 신빈현 관내의 주요 지방도로로 이용되고 있음. 태자하 상류일대는 소자하 연안과 함께 두 유역 사이의 산간로를 통해 하나의 생활권역을 이루고 있는데, 목기진은 이 산간로를 기점으로 양 지역을 잇는 주요거점인 것임.
성에서 서북쪽으로 10여㎞ 떨어진 지점에는 오룡산성(五龍山城), 약 15㎞ 떨어진 지점에는 득승보산성(得勝堡山城)이 있음. 성 북쪽으로는 고구려시기의 심양(沈陽)으로 통하는 길인 남도(南道)가 아주 가까이 있음(徐家國·徐琰, 1994).
성은 소자하가 꺾어지는 지점의 평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음. 산성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형에 위치함. 서남으로는 산과 접해 있음. 북류하는 소자하가 동북쪽을 휘감아 돌다가 북쪽에서 유로(流路)를 서쪽으로 바꾸어 흘러가고 있음.
유물정보
수키와(筒瓦) 1점, 암키와(板瓦) 1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 철제 수레바퀴굴대축(鐵車輨) 1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 철찰갑편(鐵札甲片) 1점, 토기편(土器片) 1점, 개원통보(開元通寶) 1점
소자하 일대 성 분포도
하서촌고성 위치도
하서촌고성 주변 지형도
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佟達, 「新賓五龍高句麗山城」『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徐家國·徐琰, 「唐代木底州治今地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張正巖·王平魯, 「新城道及新城道上諸城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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