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저성
 
 
후연의 목저성 침공을 물리치다 ( 406년 12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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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十二月, 燕王熈 校勘 021襲契丹. 至陘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弃校勘 022輜重, 軽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校勘 021 《진서(晉書)》에는 熙로 되어 있다.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熈로 되어 있다.
 
〔15년(406)〕 겨울 12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거란註 001을 습격하였는데, 형북(陘北)註 002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되돌아가려 하였다. 드디어註 003 군수 보급품을 버리고 병사들을 가볍게 하여 우리나라[고구려]를 습격해왔다. 〔후〕연의 군대가 3천여 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말이 지치고 얼어서,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다. 우리의 목저성(木底城)註 004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註 005
 
목저성(木底城) : 고구려의 국내성과 요동평원을 잇는 교통로인 남도(南道)에 있던 성곽이다. 서북쪽으로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이 있었다. 고국원왕 12년(342)에 전연의 모용황(慕容皝)이 남도로 기습 침공하였을 때 고국원왕이 이곳에서 대적하다가 크게 패하였다(『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 이 기사에서 보듯이 광개토왕 15년(406)에는 후연의 모용희(慕容熙)가 이곳을 침공하였다가 패배하였다. 보장왕 25년(666)에는 남생(男生)이 당에 투항할 때 이 성의 일부가 동조하였고, 667년 신성이 당나라군에게 함락된 뒤 설인귀(薛仁貴)의 공격을 받고 남소성·창암성(蒼巖城) 등과 함께 함락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 당은 이곳에 목저주(木底州)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목저성은 남소성, 창암성과 함께 훈허[혼하(渾河)] 지류인 쑤즈허[소자하(蘇子河)] 연안에 위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일찍부터 목저성의 후보지로 신빈현[新賓縣] 목기진(木奇鎭) 일대를 주목하였는데(箭內亙, 347-357쪽; 今西春秋), 최근에는 고구려시기 유물이 출토된 하서촌고성(河西村古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늘고 있다(佟达, 36쪽; 张正岩·王平鲁, 26쪽; 여호규, 112-117쪽; 여호규 외, 289-293쪽). 이에 대해 목기진(木奇鎭) 일대는 명·청대의 역참이라며 목기진 서북쪽의 오룡산성(五龍山城; 王绵厚·李健才, 40·102쪽)이나 궤자석산성(櫃子石山城; 孙進己·馮永谦, 98-99쪽)을 목저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한편 최근 국내학계에서는 342년의 남도를 타이쯔허[태자하(太子河)] 연안로로 상정하면서 환런[환인(桓仁)]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을 목저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 10월조의 ‘북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여호규, 1999 『高句麗 城』 Ⅱ, 國防軍史硏究所
여호규·강현숙·백종오·김종은·이경미·정동민, 2020,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 Ⅷ(혼하-요하 중상류), 동북아역사재단
王绵厚·李健才, 1988, 『东北古代交通』, 沈阳出版社
孙進己·馮永谦, 1989, 『东北历史地理』 2, 黑龙江人民出版社
箭內亙, 1913, 「南北朝時代の滿洲」, 『滿洲歷史地理』 1, 南滿洲鉄道株式会社
今西春秋, 1935,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 『靑丘学叢』 22
佟达, 1993, 「关于高句丽南北交通道」, 『博物馆硏究』 1993-3
徐家国·徐琰, 1994, 「唐代木底州治今地考」, 『辽海文物学刊』 1994-2
张正岩·王平鲁, 1994, 「新城道及新城道上诸城考」, 『辽海文物学刊』 19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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