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ku.d_0001_0070_0050_0140&isViewType=detail

 

오룡산성; 하외보산성(五龍山城; 下崴堡山城)
 

오룡산성 위성사진, 지도 https://bit.ly/4eqb6Im https://tinyurl.com/4xn3hrzu 


시대 : 고구려 중기
4세기 중엽~당대(통따/佟達 1994)
3세기 후반 이후(여호규 1999)

 

위치(출토지) :
무순시 신빈현 오룡촌 하외자둔 고려성산(撫順市 新賓縣 五龍村 下巍子屯 高麗城山)
푸순시 신빈시엔 우롱춘 시아웨이즈툰 가오리청샨(抚順市 新宾县 五龙村 下崴子屯 高丽城山)

지리좌표(地理座標) 북위(北緯) 41° 52′, 동경(東經) 124° 35′ 
 
성곽>산성
동서길이 500m, 남북너비 1m라는 기록(東潮·田中俊明, 1995)│동서길이 700m, 
남북너비 300m, 둘레 약 2,000m라는 기록(王綿厚, 2002)│동서길이 1㎞, 남북너비 0.5㎞이라는 기록(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둘레 1㎞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陈大为, 1995; 馮永謙, 1997)│둘레 2㎞라는 기록(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 
11점 
 
 
조사내용
 
1980  무순시문물조사대(撫順市文物調査隊)  무순시가 시 전체 유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때 발견함.
1986  완옌허/왕몐후(王綿厚), 쑨리/손력(孫力) 등이 조사함.
1988  산성 내 시내를 가로지르는 돌무지 7곳을 발견함.
1993  2월에 조사함. 산성내 시내를 가로지르는 돌무지 가운데 일부가 1988년 조사 때와 비교해서 약간 바뀐 모습을 확인함.
 
 
구조특징
 
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산성은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면에는 장백산(長白山) 여맥(餘脈)의 산령(山岭)이 서남에서 동북으로 뻗어 있음. 한 면에는 하천이 있는데, 소자하(蘇子河) 지류인 오룡하(五龍河)임. 오룡촌(五龍村)이란 이름은 바로 이 강에서 유래한 것임. 또한 산성이 위치한 고려성산(高麗城山)도 오룡산(五龍山)이라고도 불리고 있음.
 
산성의 북쪽과 동쪽은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수직절벽임. 서쪽은 높고 가파른 감제고지(制高点)임. 남쪽 산비탈도 높고 험준하여 오르기 어려움. 성 바깥은 험준하고, 성 안은 대부분 산등성이에서 경사가 완만하게 펼쳐져 있는 구릉과 대지임. 산성은 해발 438.3m의 동남쪽 산봉우리에서 남북 양측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 둥글게 감싸 안은 형태로 축조된 포곡식 산성임. 산성은 산세를 따라 축성되면서, 평면이 이등변삼각형에 가까움. 성은 산세를 따라 산꼭대기에 축조되어 있는데, 지면보다 100m 정도 솟아 있음.
* 감제고지(瞰制高地) = 제고점(制高点): 적의 활동을 살피기에 적합하도록 주변이 두루 내려다보이는 고지
 
산성의 규모와 관련하여 동서길이 500m, 남북너비 1m라는 기록(아즈마 우시오/東潮·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1995), 동서길이 700m, 남북너비 300m, 둘레 약 2,000m라는 기록(王綿厚, 2002), 동서길이 1㎞, 남북너비 0.5㎞이라는 기록(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둘레 1㎞라는 기록(쑨진지/孫進己·펑융첸/馮永謙, 1989; 천따웨이/陈大为, 1995; 馮永謙, 1997)라는 기록, 둘레 2㎞라는 기록(왕위랑/王禹浪·왕훙베이/王宏北, 2007;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성벽은 4개의 감제고지(制高点)인 각대(角臺), 망대(望臺)를 기준으로 동·남·서·북벽으로 나눌 수 있음. 성벽의 길이는 동벽 292m, 남벽 854m, 서벽 354m, 북벽 607m 등으로 전체 둘레는 2,107m임. 성벽은 대부분 단애(斷崖)의 벽을 이용하였음. 성벽에 대하여 석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孫進己·馮永謙, 1989; 장즈리/張志立, 1994; 東潮·田中俊明, 1995; 馮永謙, 1997; 王綿厚, 2002), 축조방식이 철령(鐵嶺) 최진보산성(催陳堡山城)과 심양 석대자산성(沈陽 石大子山城)과 유사하다고 보기도 함(王綿厚, 2002). 반면 토석혼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陈大为, 1995; 웨이춘청/魏存成, 2002), 성 바깥 산등성이와 협곡에 석축 혹은 토석혼축의 성벽이 있다고 함(魏存成, 2002).
* 단애(斷崖) :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산성 축조에 사용된 성돌은 정연하지 않고, 대부분 잡석임. 납작한 방추형의 쐐기형 돌이 일부 사용되었으나, 크기가 다르고 모서리가 분명하지 않으며 조잡하게 가공되었음. 이러한 모습은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삼송산성(杉松山城)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과 차이가 있음(佟達, 1994).
 
성벽은 바깥이 가파르고 안쪽이 완만한 구릉인 산등성이에 축조함. 산등성이에는 자연성벽으로 이용할 수 있는 좁고 기다랗게 우뚝 솟은 수직절벽이 거의 없음. 다만 4개의 봉화대가 있는 산등성이는 독립적으로 따로따로 분포함. 이 때문에 산등성이 위에 긴 구간의 석벽을 구축하는 공사는 필수적이었는데, 감제고지(制高点) 4곳에 위치했던 각대, 망대에 연접한 가파른 산등성이 구간을 제외한 모든 구간에 성벽을 축조함. 이러한 모습은 기다랗게 우뚝 솟은 수직절벽을 자연성벽으로 긴 구간 이용했던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패왕조산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들과 차이가 있음. 오룡산성의 축조방식은 산등성이 위에 예외 없이 석벽이 구축된 태자성(太子城)과 대부분의 산등성이 위에 성벽을 축조한 나통산성(羅通山城)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음. 이로 볼 때, 축조시기가 약간 늦은 산성은 대부분 수직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한 구간이 적고, 보편적으로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고 추정됨. 높이가 몇십 미터가 되어 등반할 수 없는 초벽(峭壁)에 평탄하고 돌출된 석애(石崖)가 없으며, 여장(女墻)을 축조하여 몸을 기댈 수 있게 하거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함. 인공성벽은 낮은 산등성이 위 혹은 골짜기 입구(구구/溝口)나 트인 곳에 축조하였기 때문에, 높고 넓게 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지세가 낮아질수록 성벽은 더 높게 쌓았음. 일반적으로는 너비가 넓은 성벽기단을 축조한 후, 성벽기단 위에 각 층마다 안으로 들여서 성체(城體)를 축조하였음.
* 초벽(峭壁) : 매우 가파르게 생긴 낭떠러지
* 석애(石崖) : 암석 낭떠러지
* 여장(女墻) : 성가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동벽은 길이가 292m로, 동쪽 망대(해발 387.3m)에서 동남쪽 각대(해발 438.3m)까지 이르는 구간임. 북면은 아래쪽으로 뻗어나가는 가파른 산등성이와 인공 성벽으로 구성됨. 인공성벽은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1m, 정상부 너비 1m임.
 
남벽은 길이가 854m로, 동남쪽 각대에서 산세를 따라 아래로 서쪽 각대(해발 353m)에 이르는 구간임. 모두 인공성벽임. 남벽 아래에 평탄한 내리막길이 있는데, 지역주민들은 “마도(馬道)”라고 부르고 있음. 성벽 아래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트인 곳이 있음. 성문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산 위에 오르기 위해 팠던 통로로 파악됨(佟達, 1994). 트인 곳 부근에는 길이 약 10m, 너비 약 9m의 경작지가 있음. 성벽은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1~3m임. 트인 곳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아래를 향해 축조된 성벽은 외벽 높이 2~3m, 내벽 높이 1~1.5m, 정상부 너비 1m임. 남문 양측의 돌로 쌓은 성벽은 수목(樹木)으로 가려져 있는데, 성벽의 남은 높이는 약 1m임.
 
서벽은 길이 354m로, 서쪽 각대에서 북쪽 각대(해발 381.1m)에 이르는 구간임. 서벽은 서문[이 문에 대하여 북문(佟達, 1994; 원슈롱/溫秀榮·장보/張波, 1996; 魏存成, 2002) 혹은 서문(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여호규, 1999; 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성문 명칭은 일반적으로 소재한 성벽 방향에 따르므로 서문이라고 명명하고자 함(여호규, 1999)] 문길을 기준으로 동·서 두 구간으로 나눌 수 있음. 서쪽 구간은 문길에서 서쪽 각대에 이르는 구간임. 서쪽 각대는 둥근 형태의 감제고지(制高点)인데, 지표면의 토양 유실과 적이 타고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구간에 보호석벽(护坡石墻)을 수축함. 성벽은 각대 정상부에만 축조되어 있는데, 직경이 5m인 반환형(半环形)의 석벽임. 동쪽 구간은 문길에서 북쪽 각대에 이른 구간임. 이 구간은 오르기 힘들 정도로 가파르며 위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형태로, 자연 상태의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만듦. 서벽 동·서 양 구간의 산등성이는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하기 때문에 인공성벽이 없음.
* 반환형(半环形/半環形) : 반고리
 
북벽은 길이가 607m로, 북쪽 각대에서 동쪽 망대에 이르는 구간임(佟達, 1994). 북쪽 각대에서 동쪽으로 465m 정도 가면, 성벽은 직각으로 꺾여 동쪽 망대에 이르게 됨. 성벽은 외벽 높이 2~3m, 내벽 높이 1~1.5m, 정상부 너비 1m임.
 
산성 서쪽 대서산(大西山)과 관문립자산(關門砬子山) 사이의 협곡로에 차단벽이 있음. 협곡의 낮은 지대에는 도로 개설과 농지 개간으로 10m 정도만 남아 있는데, 기단부 너비는 3m, 위쪽 너비는 1.5m임. 대서산과 관문립자산 두 산기슭에는 각각 25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음.
 
대서산 서남쪽 변장산(邊墙山)에 남북향의 산등성이를 따라 수백 미터 길이의 석축성벽을 축조함. 성벽 중간 도로로 파괴된 지점의 남단(南段)에는 봉화대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있음.
 
변장산 성벽은 아래쪽인 득승보(得勝堡)댐 일대의 통제 및 적이 변장산 언덕을 넘어 하강자촌(下岗子村)으로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역사적 의미
 
오룡산성이 위치한 상협하진(上夾河鎭) 일대는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 연안으로 진입하는 두 갈래의 도로가 만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임. 특히 청대(淸代) 구가도(舊街道)로서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영반(營盤) → 하협하진(河夾河鎭) → 오룡하(五龍河) → 상협하진(上夾河鎭) 루트는 오룡하 연안을 따라오다가 상협하진 일대에서 방향을 바꾸어 구릉성 산지로 접어들게 됨.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보아 오룡산성은 혼하에서 소자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되었다고 추정됨. 오룡산성의 지형이나 성곽시설도 이를 반영함. 오룡산성은 북쪽에 오룡구(五龍溝), 동쪽에 소산구(小山溝), 서남쪽에 황수배자구(荒樹排子溝) 등의 골짜기가 자리 잡고 있어 주위 산맥과 완전히 끊겨 있음. 그리고 다른 산줄기와 이어지는 동남 각대(角臺)방면도 지세가 높아 오르기 힘듦. 전체적으로 보아 오룡산성은 주변의 산줄기와 차단되어 있는데, 이는 산성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고구려산성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임. 그런데 동남 각대 아래쪽의 산등성이에 특별한 방어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방면은 적의 침공로가 아니었다고 추정됨. 즉 오룡산성은 주로 서북쪽에서 침공하는 적군올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던 것임(여호규, 1999).
 
오룡산성 서쪽의 현재 도로는 변장산(邊墙山)을 비롯하여 동북~서남 방향의 산등성이를 여러 개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음. 그런데 1930년대의 지형도를 보면 당시에는 아직 개설되지 않았고, 하협하진에서 오룡하를 거슬러 올라올 경우, 오룡하 상류를 따라 득승보(得勝堡)댐 협곡을 거쳐 관문립자(關門砬子) 골짜기 입구를 지나 대서산(大西山)~관문립자산(關門粒子山) 사이의 협곡로를 통해 하강자촌(下岗子村)으로 향했던 것으로 그려져 있음. 즉 적군은 오룡산성의 서변을 지나쳐서 소자하 방면으로 진공하였고, 이때 오룡산성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방어벽을 형성할 수 없었음. 대서산~관문립자산 협곡로의 차단벽과 변장산의 성벽은 이러한 점에서 주목됨. 득승보촌(得勝堡村)올 지난 적군이 오룡하 상류와 대서산~관문립자산 협곡로를 통해 소자하 방면으로 진입할 경우, 득승보 협곡 입구가 제1방어선, 관문립자 골짜기 입구와 대서산~관문립자산의 차단벽이 제2·3 방어선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그리고 변장산의 성벽은 변장산 산줄기를 가로질러 곧바로 하강자촌으로 향하는 적군을 막는 방어선으로 기능하였을 것임. 오룡산성은 지형조건상 산성 자체만으로는 방어체계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변장산의 성벽을 비롯하여 득승보협곡(得勝堡峽谷) 입구, 관문립자 골짜기 입구, 대서산~관문립자산 협곡로 등에 차단벽을 축조하여 총체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임(여호규, 1999).
 
오룡산성 서쪽 소자하·혼하 합류지점 동쪽에 위치한 철배산성(鐵背山城)은 좁고 높다란 산마루에 위치하여 지역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취약점이 많고, 오룡산성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고 볼 때, 두 성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여호규, 1999). 후금(後金)시기의 찰객관(札喀關) 혹은 찰객성(札喀城)이 이곳에 축조되었는데, 시설물과 산성은 후금시기에도 계속 사용되었음. 찰객관은 정확히 오룡산성과 협곡조단성(峽谷阻断城)에 위치하였음. 군사적인 지리적 조건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역대 왕조들이 계속 사용하였는데, 특히 산천은 군사적으로 이용가치가 예나 지금이나 크기 때문에 더욱 중요시됨(佟達, 1994).
 
축조연대에 대해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음.
 
통따(佟達)(1994)의 견해. 산성 축조에 사용된 성돌은 정연하지 않고, 대부분 잡석임. 납작한 방추형의 쐐기형 돌도 일부 사용되었으나, 크기가 다르고 모서리가 분명하지 않으며 조잡하게 가공되었음. 이러한 모습은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과 차이가 있음. 또한 수직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한 구간이 적고 보편적으로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기다랗게 우뚝 솟은 수직절벽을 자연성벽으로 긴 구간 이용했던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패왕조산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과 차이가 있음. 오룡산성에서는 고구려초기산성의 축조방법이 보이지 않고, 시대가 약간 늦은 산성에서 보이는 석벽과 성가퀴를 구축하는 방식을 채용하였으며, 석재와 성벽가공기술은 태자성(太子城)과 나통산성(羅通山城)과 다르다는 점에서, 축조시기는 고구려 중기 혹은 약간 늦은 시기라고 볼 수 있음. 한편 성 안에서 출토된 철제 화살촉은 일찍이 고이산성(高爾山城)에서 발견되었는데, 고이산성의 축조연대는 266~267년으로 추정됨. 토기와 관련하여 고구려 중기에서는 호(罐), 분(盆), 옹(瓮), 호(壶) 등이 나오는데, 그 시대는 4세기 초~5세기 말임. 고구려 후기에 들어서면 반(盘)이 나오는데, 그 시대는 약 6세기 이후임. 이로 볼 때, 오룡산성에서 출토된 토기편은 고구려 중, 후기에 속함. 산성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은 집안에서 출토된 IX式 와당과 기본적으로 같음(林至德·耿鐵華, 1985). 고구려가 요동을 5세기 초~당(唐)대까지 차지하였다는 점과 일반적으로 유물연대가 산성 축조연대보다 늦은 정황을 고려할 때, 산성의 축조연대는 4세기 중엽~당대로 추정할 수 있음.
 
한편, 오룡산성은 고구려 남소성(南蘇城)으로 추정됨. 345년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 남소(南蘇)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수(戍)를 설치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소성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기록임. 이로 볼 때 남소성의 상한축조연대는 늦어도 345년임. 목저성(木底城)이 위치한 요동지역은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대에 점령되었음. 667년에 이르러 당군이 여러 차례 신성, 남소, 목저, 창암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결국엔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남소성의 축조 하한시기임.
 
원슈롱(溫秀榮)·장보(張波)(1996)의 견해.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결구(缺口)를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 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요대(角瞭臺)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등이 초기산성에 속함. 고구려 중기 산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 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두대미세(頭大尾細)의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음.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 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분(盆), 반(盤), 옹(瓮),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 연대는 위진 아래임. 오룡산성과 태자성 외성이 중기 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 결구(缺口) : 파손된 틈, 구멍
* 두대미세(頭大尾細) : 쐐기형태
 
여호규(1999)의 견해. 고구려는 1세기 말~2세기 초경 영릉진(永陵鎭) 일대의 제2현도군을 혼하방면으로 구축하고 소자하 연안으로 진출하였으나, 후한대에 소자하를 넘어 혼하방면으로는 진출하지 못하였음. 후한이 미약해진 뒤에도 3세기 중반까지 공손씨나 조위(曹魏)의 침공을 받아 이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다가, 서진(西晋)의 세력이 약해진 3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혼하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음. 그런데 소자하 연안 교통로를 보면 영릉진에서 목기진까지는 소자하 연안을 따라 도로가 이어지지만, 목기진~하협하진 구간의 소자하는 험준하고 만곡이 심하기 때문에 목기진~상협하진 산간로와 오룡하를 우회하여 소자하 하류로 나아가게 됨. 고구려가 혼하방면까지 진출하지 못하였을 시기에는 목기진 일대가 전방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임. 따라서 오룡산성은 3세기 후반 이후에야 비로소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특히 문헌기록상 4세기 전반부터 혼하 연안의 신성을 비롯하여 소자하 연안에 남소성, 목저성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왕몐허(王綿厚)(2002)의 견해. 오룡산성은 위치한 입지가 험하고 성 안에는 유물이 풍부하며 연철(煉鐵)유적지를 갖추고 있는 등, 고구려 중기의 전형적인 수비산성으로 볼 수 있음.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3 가지 설이 있음. 먼저 목저성(木底城)설임.
 
장더위(張德玉)(1989)의 견해. 고구려시기의 목저성으로 비정함.
 
왕몐허(王綿厚)·리젠차이(李健才)(1990)의 견해. 목저성의 위치를 신빈현 목기진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목기진지역에서는 진, 당 시대의 고성이 없고, 명, 청 역참(驛站)이 있을 뿐임. 고구려산성은 목기진 서북 12.5㎞의 신빈현 상협하향 오룡촌에 위치한 오룡산성 뿐이므로 오룡산성을 목저성으로 볼 수 있음.
 
왕몐허(王綿厚)(1990, 2002)의 견해. 목저성은 고구려의 신성~목저도 상에 있음. 그 성이 위치한 교통지리를 볼 때, 신성 동쪽의 교통요지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음. 『위서(魏書)』권(卷)100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건국4년(341)에 모용황(慕容皩)이 고구려를 칠 때, 남협(南陜)에 들어가서, 목저에서 싸웠다’라는 기록이 있음. 모용황은 요서의 용성(龍城 현재 조양)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여 심양과 무순(신성)을 거쳤음. 목저성은 신성에서 남협(南陜)으로 진입하는 교통로 상에서 가장 가깝고 중요한 곳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됨. 즉 목저성은 신성도에서 남협으로 진입한 이후의 수진(首鎭)으로 볼 수 있음. 『위서(魏書)』에 보이는 남협은 남도(南道)의 앞부분이고, 목저성은 혼하의 지류인 소자하 하류에 있다고 볼 수 있음. 이상의 지리조건을 고려해볼 때, 목저성으로 오룡산성이 가장 유력함.
 
다음으로 남소성(南蘇城)설임.
 
통따(佟達)(1993, 1994)의 견해. 남소성은 남소수(南苏水)에서 이름을 얻었는데, 남소수는 소요수(小遼水)와 더불어 한대 현도군(玄菟郡) 고구려 경내의 강임.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고구려현(高句麗縣)의 주(注)에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소요수는 혼하, 남소수는 소요수의 지류인 소자하로 추정됨. 혼하의 원류가 일영액하곡(一英額河谷)이기 때문에 ‘요산은 요수에서 나온다’라고 서술한 것이고, 소자하는 혼하의 가장 큰 지류이기 때문에, ‘또한 남소수가 있다’고 서술한 것임. 소자하는 동남에서 서북으로 흘러 혼하로 유입되는데, ‘장성(長城) 새외(塞外)의 땅을 경유한다’ 및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는 기록과 부합됨. 이로 볼 때, 남소성은 소자하에서 찾을 수 있음. 그리고 하류의 기점은 영릉진 현도군 치소임. 
* 새외(塞外) : 국경 밖
 
『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182 『수기(隋紀)』권(卷)6 호삼성(胡三省) 주(注)의 “신성(新城)은 남소성의 서쪽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남소성은 신성의 동쪽에 있음을 알 수 있음. 신성은 현재 무순성임. 『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97과 『진기(晋紀)』권(卷)19 호삼성(胡三省) 주(注)에 “남소성은 남협의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남협은 소자하구와 혼하가 합류하는 살이허지구(萨尔浒地区)임. 즉 남소성은 신성 동쪽의 소자하구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야 함. 『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114와 『진기(晋紀)』권(卷)36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의 “목저성은 남소의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남소성은 목저성의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음. 1991년에 신빈현 목기진 동남쪽에서 비교적 큰 평지성이 발견되었는데, 목저성으로 추정됨. 즉 남소성은 소자하구와 목기진 사이에서 찾을 수 있음. 그 사이에 있는 오룡산성은 소자하구(남협)까지 약 10㎞이고, 다시 서쪽으로 신성과의 거리는 50㎞에 가까움. 동쪽으로 목저성까지의 거리는 약 15㎞임. 신성과 목저성 사이에는 오룡산성을 제외하고, 남협지구의 계번성(界藩城)과 살이허성(萨尔浒城)이 있는데, 두 성 모두 후금(後金)의 산성임. 이로 볼 때, 신성과 목저 사이에 고구려성은 오룡산성만 있으므로, 남소성이라고 비정할 수 있음. 남소성이 오룡산성이라면 문헌에 보이는 전쟁기사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음. 고구려의 전쟁기사를 보면, 남소성을 공취하기 전에 신성을 공취하고, 남소성을 공취한 후에는 목저성을 공취함. 339년에 모용황이 신성에서 승리하면서(『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96과 『진기(晋紀)』권(卷)18), 목저성이 전연의 병봉지하(兵锋之下)에 노출되었고, 342년에 목저에서 전투가 벌어짐. 그 이후 남소성이 황급하게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45년 모용각이 남소성에서 전투를 벌였음. 이후 고구려는 신성과 남소성을 회복하였으나, 400년에 모용성(慕容盛)이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빼앗음(『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111 『진기(晋紀)』권(卷)33). 두 성에서 승리를 하고, 저항 없이 서쪽으로 나아가 406년에 직접 목저성을 공격하였는데, 결국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음. 647년 당군은 신성도로 나아가 남소와 목저로 진격한 바 있고(『신당서(新唐書)』권(卷)220 『열전(列傳)』권(卷)145 동이고려/東夷高麗), 667년에는 신성에서 승리한 후, 남소, 목저, 창암 세 성을 차지하였음(『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201 당기/唐紀17).
* 병봉지하(兵锋之下) --> 칼날 봉(锋)
 
장쯔리(張志立)(1994)의 견해. 남소와 남협은 한 역사서에 함께 등장한 적이 없음. 『자치통감(資治通鑑)』호삼성(胡三省)의 주(注), 『한국연혁사(韓國沿革史)』와 오사감(吳士鑑)의 『진서주(晋書注)』에는 ‘남소는 남협으로, 협과 소는 음이 변화한 것’이라고 함.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남소수를 확정해야 함. 청 건륭(乾隆) 『일통지(一統志)』권(卷)36 흥경산천(興京山川) 소자하(蘇子河)조에는 ‘소자하는 (흥경)성 북쪽 반리(半里)에 있다. 변외(邊外) 호륜령(呼倫岭)에서 나온다. 또한 북쪽으로 계번(界藩) 서남을 거쳐, 혼하로 들어간다. 『한지(漢志)』에 고구려현에는 남소수가 있다고 하는데, 소자하로 의심된다’라는 기록이 있음. 『구당서(舊唐書)』계심하력전(契芯何力传)에는 ‘건봉(乾封) 원년에 고구려군 15만명이 요수에 머물렀고, 말갈 수만을 이끌고 남소성에 웅거하였는데, 계필하력(契苾何力)이 모두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남소성과 요수가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음. 만약 가깝지 않다면 계필하력이 고구려군 15만명과 말갈병을 한 번에 격파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임. 요수는 지금의 혼하이므로, 남소성이 있는 남소수는 혼하와 그리 멀지 않다고 볼 수 있음. 이로 볼 때 소자하를 남소수로 볼 수 있음. 남소성과 관련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111 진기(晋紀) 권(卷)33에는 “2월 전연이 표기대장군 희(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 두 성을 차지하였다”라는 기록, 『신당서(新唐書)』설인귀전(薛仁貴傳)에는 ‘남소, 목저, 창암 세 성을 차지하였다’라는 기록, 『신당서(新唐书/新唐書)』고구려전 정관 21년조의 당군이 ‘신성도로 진입해서, 차례로 남소, 목저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곽(郭)만 불태웠다’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기록에서는 남소가 신성, 목저와 함께 나오는데, 성들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고, 신성, 남소, 목저 순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음. 그 외에 『자치통감(資治通鑑)』권114 『진기(晋紀)』에는 “연군(燕军)이 3000여 리를 와서 병사와 말들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즐비했는데, 그 상황에서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라는 기록, 『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96 진기(晋记) 함강(咸康) 5년조에는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군대가 신성에 이르자, 고구려왕 쇠(釗)가 맹약을 청하면서 돌아갔고, 남소에 술(戌)을 두었다”라는 기록, 『십육국춘추(十六国春秋)』전연록(前燕錄)에는 “모용황 12년에 도요장군(度辽将军) 모용각이 고구려 남소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술(戌)을 두고 돌아갔다”라는 기록 등이 있음. 한편 『동북고사자료총편(東北古史資料匯編)』하책 651항 한원(翰苑) 권(卷)30조(條) 『고려기(高麗記)』에는 ‘남소성이 신성 북쪽 칠십리 산 위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옹주(雍注)와 호주(胡注)를 비교해 보았을 때, 옹주(雍注)의 북(北)자는 ‘동(东)’자의 오탈(誤脫)임. 신성은 무순시의 고이산성임. 남소성은 그 동북쪽에 있고, 남소성 동쪽에는 목저성이 있음. 즉 남소성은 신성과 목저성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음. 오룡산성에서 남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있고, 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지점에는 혼하가 있음. 즉 오룡산성은 신성과 목저성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고구려 남소성으로 볼 수 있음.
 
남합성(南陜城)설임.
쑨진지(孫進己)·펑융첸(馮永謙)(1989)의 견해. 남합(南陜)은 진(晉)대에 처음 보이는데, 『진서(晉書)』재기(載記) 권(卷)9 함강(咸康) 7년(341)조에 ‘모용황은 병사 4만명을 이끌고, 남합(南陜)으로 들어가서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고, 모용한(慕容翰)과 아들 수(垂)를 선봉으로 삼아 장사왕(長史王) 우(㝢) 등 군사 만오천명은 북치(北置)로 나아가도록 하였음. 고구려왕 쇠(釗)는 전연의 병사가 북로로 들어간 것을 알고, 그 동생 무(武)와 정예 만오천명을 북치(北置)로 보내고, 자신은 약졸을 이끌고 남합(南陜)을 지켰음. 모용한과 쇠(釗)가 목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쇠(釗)가 대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위서(魏書)』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건국(建國) 4년(341) 모용원(慕容元)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합(南陜)으로 들어가 목저에서 쇠군(釗軍)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음. 『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97 성제(成帝) 함강(咸康) 8년(342) 10월조에는 ‘고구려에는 두 길(道)이 있는데, 북도는 넓고 평탄하고, 남도는 험하고 좁았다’라는 기록이 있고, 12월조에는 ‘모용황이 병사 4만을 이끌고 남도로 들어갔다’라는 기록이 있음.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북도는 북치(北置)에서 들어가고, 남도는 남합(南陜)으로 진입하여 목저성으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음. 『삼국사기(三國史記)』권(卷)18에는 ‘고국원왕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정예 병사 4만을 이끌고 남도로 나왔다’는 기록이 있음. 위의 기록들을 살펴볼 때, 남합(南陜)은 고구려 남도 상에 있고, 목저와 가깝다고 할 수 있음. 남도는 소자하, 부이강을 따라 지금의 집안에 이르는 길이고, 북도는 혼하를 거쳐 동진하다가 남쪽으로 꺾이는 길임. 바로 오룡산성(孫進己·馮永謙은 오룡산성과 득승보산성을 동일하게 보고 있음 1989)이 남도 상에 있고, 목저(신빈현 목기진)의 서북에 있으므로 남소성으로 추정됨. 다만 호삼성(胡三省)의 주(注)가 있는 『자치통감(資治通鑑)』권(卷)97 목제 영화(穆帝 永和) 원년조에는 ‘남소성이 남합(南陜)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남소성이 무순현 철배산성이라면 오룡산성의 서북에 있으므로, 기사와 맞지 않음. 혹 남합(南陜)이 철배산의 서쪽에 있는지 의심할 수 있음. 1956년 동북문물공작대는 무순 대화방수고(大伙房水庫)로 수몰된 혼하 북안 전둔(前屯), 할자화락(轄子伙洛), 와자화락(洼子伙洛) 등지에서 위진(魏晉)시기의 고구려 묘장들을 발견하였음. 근처에서 성지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곳은 남도 상일 뿐만 아니라, 북도도 필수적으로 지나야 했음. 그러므로 호삼성(胡三省) 주(注)에 보이는 ‘남소성은 남합(南陜)의 동쪽에 있다’는 기사는 틀린 것으로 보임.
 
 
자연환경
 
신빈현 서북쪽 상협하진(上夾河鎭) 북쪽 오룡촌 동남 하외(下崴)[馮永謙, 1997]자둔 남쪽의 고려성산(高麗城山) 위에 위치함.
 
산성은 남잡목(南雜木)~신빈현성 도로 동쪽의 험준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음. 남잡목~신빈현성 도로는 득승보촌(得勝堡村)을 지나 남쪽으로 변장산(邊墻山)에 이르는데, 도로가 변장산을 파괴하였음. 도로는 변장산의 산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산능선으로 오르기 직전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작은 산간도로가 갈라짐. 산간도로를 따라 0.45㎞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북쪽의 오룡하(五龍河) 연안 관문립자(關門砬子) 골짜기를 따라가면 산성과 오룡촌(五龍村)이 나오고 남쪽으로 0.8㎞ 정도 나아가면 하강자촌(下岗子村)에서 남잡목~신빈현성 도로와 합류하게 됨. 갈림길 남쪽의 산간로 좌우에는 대서산(大西山)과 관문립자산(關門砬子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두 산 사이의 협곡로에 차단벽이 있음. 차단벽을 지나 북쪽으로 0.5㎞ 가면 관문립자산 골짜기 입구에 이르게 됨. 여기에는 세 갈래 길이 있는데, 서쪽으로는 승보수고(勝堡水库), 남쪽으로는 도로를 통해 하강자(下岗子)에서 목기진(木奇鎭)에 이를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관문립자산(关门砬子山)을 거쳐 산성과 오룡촌에 이르게 됨. 관문립자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양측에는 수직절벽이 우뚝 솟아 있고 산골짜기는 길고 좁으며 구불구불 돌아가는 등 지세가 험해서, 수비하기는 쉽고 적군이 공격하기는 어려운 입지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음. 골짜기에는 승보수(勝堡水)댐으로 흘러가는 오룡하가 있으며, 산성은 관문립자 내측 오룡촌에서 2.8㎞ 떨어진 곳에 있음.
 
산성 남쪽 5㎞ 지점에서 동남~서북쪽으로 흐르는 소자하(蘇子河)는 본래 영반(營盤)에서 혼하에 유입되어 서남쪽으로 유향(流向)을 바꾸었는데, 1950년대 대화방(大伙房)댐의 건설로 소자하․혼하 합류처는 수몰되었음. 대화방댐 건설 이전 혼하에서 신빈현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두 갈래가 있었음. 하나는 영반에서 출발하여 소자하 연안 – 하협하진(河夾河鎭) - 소자하 지류인 오룡하 - 상협하진을 거친 다음 구릉성 산지를 따라 목기진으로 진입하는 루트이고, 다른 하나는 남잡목에서 혼하를 건너 구릉성 산지를 따라 상협하진을 거쳐 목기진으로 나아가는 길임. 즉 두 갈래의 진입로는 소자하 연안이 아닌 오룡하 상류인 상협하진에서 합류하여 목기진으로 진입하였음. 두 갈래의 진입로가 상협하진에서 합류한 이유는 소자하 연안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하천변을 따라 더 이상 진입할 수 없기 때문임. 즉 하류 쪽인 영반~하협하진 구간은 하천연안을 따라 도로를 개설할 수 있지만, 하협하진~목기진 구간은 만곡이 심하고 험준한 협곡이어서 더 이상 진입하기가 곤란함. 그리하여 하협하진에서 오룡하 연안과 구릉성 산지를 따라 목기진으로 진입하였던 것임. 이상과 같이 소자하 하류방면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혼하에서 소자하 연안의 신빈지역으로 진입할 때 상협하진 일대를 반드시 거쳐야 했음. 상협하진 일대는 혼하에서 소자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두 갈래 도로가 만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인 것임.
 
산성에서 서쪽으로 1.3㎞ 떨어져 있는 남잡목진(南雜木鎭)~신빈현성 간 도로가 서북~동남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음[王禹浪·王宏北은 남잡목진~신빈현성 간 도로가 산성 남측 2㎞ 지점에 있다고 기록함(王禹浪·王宏北, 2007)]. 이 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2.5㎞ 정도 가면 득승보촌이 있고, 다시 서북쪽으로 3.3㎞ 정도 가면 상협하진이 있음. 도로를 통해 동남쪽으로 12㎞[王綿厚와 王禹浪·王宏北은 동남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 목기진이 있다고 기록함(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가면 목기진에 이를 수 있음.
 
산성 북쪽에는 오룡촌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음. 서쪽으로 3㎞ 떨어진 지점에 득승수고가 있음. 서북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남잡목진이 있음. 산성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있음. 산성 북쪽은 오룡하 연안의 경작지임. 동면 절벽 아래 산골짜기에는 과수원이 있음. 남쪽은 개활한 황수배자구(荒樹排子溝)임. 서쪽으로는 황수배자구 입구를 사이에 두고 관문립자산과 마주 보고 있음.
 
 
유물정보
 
수레바퀴굴대축(車輨) 1점, 철제화살촉(철촉/鐵鏃) 1점, 찰갑편(札甲片) 1점, 철찌꺼기(철재/鐵滓) 1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 암키와편(판와/板瓦) 1점, 수키와편(통와/筒瓦) 1점, 옹(瓮) 1점, 호(罐) 3점, 분(盆) 1점, 반(盤) 1점, 연자방아(硏子) 1점, 절구(구/臼) 1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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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德玉, 「軍事重鎭木底城考」『東北地方史硏究』 1989-4,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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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소자하 일대 성 분포도   

오룡산성 주변도
 

오룡산성 주변 지형도

오룡산성 방어계통과 평면도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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