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100112171231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48) ‘성스러운 돌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10.01.12 17:12


소설 ‘죄와 벌’ 무대, 나그네 맘 잡는 애잔함 …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강과 다리.


이른 아침 7시40분 상트페테르부르크 폴코보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겨울철이라서 음침하리라고만 예상했던 이곳 아침 날씨는 의외로 활짝 개어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날씨라고 한다. 전날 많이 내린 눈이 길가에 수북이 쌓여 있다.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로 내려가지만 한나절이 되면 기온이 0도 안팎으로 올라가면서 눈과 얼음이 녹아 길가는 질퍽거린다. 네바강도 얼지 않고 푸른 물살을 드러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상트’는 영어 ‘세인트’, 즉 ‘성스러운’이란 뜻이고, ‘페테르’는 영어의 ‘피터 대제’이고 러시아어의 ‘표트르 대제’이다. ‘피터’나 ‘표트르’는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의 음사인데, ‘베드로’는 ‘돌’이나 ‘반석’이란 의미이다. ‘부르크’는 독일어나 네덜란드어에서 ‘도시’란 뜻이다. 이런 말들을 합성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성스러운 돌의 도시’란 뜻이 된다. 이곳엔 돌과 관련된 전설 한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도시의 틀이 잡힌 후 300여회나 범람이 연발해 석축을 쌓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러자면 많은 돌이 필요하다. 그래서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에겐 통과세란 명목으로 자신의 머리보다 큰 돌덩이 두 개씩을 내도록 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발상치고는 꽤 슬기롭다.


인구 480만명(2006년 기준)을 헤아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850㎞ 떨어진 북위 60도에 위치한 러시아 제2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라도가 호수에서 발원하는 길이 740㎞의 네바강이 시내 중심을 관통해 핀란드 만으로 유입하면서 형성된 자연의 섬 델타와 운하에 의해 생긴 인공 섬들 위에 건설되었다. 건설 초기에 41개이던 것이 101개로 늘어난 섬들과 3대 운하를 비롯해 모세혈관 구실을 하는 숱한 운하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625개)로 도시의 얼개가 짜여 있다. 이 지역은 원래 늪지대였기 때문에 건조한 여름 말고는 안개가 잦고 습도가 높다. 그래서 화창한 여름날 시인 푸슈킨은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습하고 냉혹한 겨울날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고전과 퇴폐,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라고 서로 다른 평을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화와 예술, 역사와 유적의 도시이다. 시내에는 약 250개의 박물관과 50개의 극장, 80개의 미술관이 있으며 해마다 900여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 앞의 해학적인 표트르 대제 동상.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화려한 유럽식 근대 도시로 일약 변모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의 담찬 정치적 야욕의 소산이다. 18세기 초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을 치르면서 대제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건설하고 나서 유럽을 향한 전초기지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 기지로서 네바강 하류와 발트해가 만나는 늪지 위에 인공도시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삼은 도시 건설에 착수한다. 급기야 1712년 제국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긴다. 이를 계기로 유럽식 근대화 도시로 급성장하지만, 이와 동시에 절대왕정의 본산으로 근대화의 악폐를 잉태한다. 그 과정에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이름도 몇 차례 바뀌고 여러 가지 별칭도 뒤따른다. 1918년 소비에트 정부의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이곳 이름은 ‘페트로그라드’로 바뀌고, 1924년 레닌 사망 후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라고 부른다. 근 70년 동안 써오다가 러시아 연방시대가 도래하자 원명이 복원된다. 그 과정에서 얻은 별칭만도 ‘유럽을 향한 창’ ‘북쪽의 베니스’ ‘운하의 도시’ ‘물의 도시’ ‘백야의 도시’ ‘혁명의 도시’ 등 다양하다.


도시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답게 유적·유물이 줄줄이 시야에 들어온다. 모스크바 대로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벌어진, 유명한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현장을 증언하는 모스크바 문(당시 바리케이드로 사용)이 장중히 서 있다. 독·소 전쟁이 한창일 때 독일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1941년 9월부터 모든 수송로를 차단한 채 무려 872일 동안이나 봉쇄한다. 그러나 군·민 합심으로 끝내 도시를 지켜낸다. 당시 치열했던 전화의 상흔을 성 이삭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성당의 외벽과 기둥에는 아직까지도 총격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성당은 1818년부터 40년간 지어진, 단일 예배당으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성당이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완벽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64개의 원통 대리석 기둥 위에 세워진 돔의 높이는 111.3m에 달하며, 3개의 육중한 청동 문은 각각 무게만도 9t이나 된다. 당시에는 이 건물보다 더 높은 건물은 불허했다고 하니 그 위세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설계와 감독을 맡은 프랑스 건축가 몽펠랑은 이 성당을 짓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이윽고 도심부인 넵스키 거리에 들어섰다. ‘넵스키’는 ‘네바강’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며, 넵스키 거리는 네바강 왼쪽 기슭을 따라 펼쳐진 거리이다. 19세기 중엽에 개통된 거리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서부터 옛날 해군성까지 뻗어 있다. 작가 고골은 ‘넵스키 대로보다 훌륭한 곳은 없다’고 절찬하면서 <넵스키 대로>라는 작품을 썼고, 푸슈킨이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호들의 작품에도 이 거리가 자주 등장한다. 이 거리에는 카잔 성당, 도스토예프스키 묘가 있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 미하일로프 광장, 알렉산드리아 광장, 10월 혁명의 본부 자리인 스몰니 수도원 등 굵직한 유적들과 더불어 상점들도 즐비하다. 카잔 성당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본떠 지은 네오클래식풍의 건물로서 코린트식 열주가 늘어선 회랑으로 둘러싸여 외모부터가 웅숭깊은 느낌을 준다.


멀어져가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의 황금빛 쿠폴(양파머리형 돔)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그 속에 묻힌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불후의 명작 <죄와 벌>이 떠오른다. 그 시절 밤을 지새우면서 탐독하던 소설이다. 이 거리의 가난한 대학생인 주인공은 현실적으로는 가진 것이 없어 가난하고 무력하지만 현실을 각성한 의지적이고 사색적인 청년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凡人·평범한 사람)과 비범인(천재적인 사람)으로 나누면서 범인은 기성의 도덕과 법률에 대한 복종형 인간이고, 비범인은 그러한 것에 대한 초월형 인간이라고 해석한다. 이 대목에서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분명 ‘복종형 인간’에서 ‘초월형 인간’에로의 도약을 지향한다. 그의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참 달리다가 차는 노란색 3층 건물 앞에서 속도를 줄인다. 모이카 강가의 푸슈킨 문학박물관이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학습원에 입학해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이곳을 무대로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등 주옥 같은 시편들을 창작한다. 열혈 청년 푸슈킨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메스를 들이댄다. 근대 러시아의 첫 혁명운동이라고 하는 데카리스트들의 반전제주의 투쟁(1825년)과도 호흡을 같이 한다. 박물관에는 푸슈킨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마야코프스키 등 작가들의 원고와 유작, 사진들이 전시되어 러시아 최고의 문학박물관으로 꼽힌다. 벽에는 1837년 1월27일 오후 4시 반에 멈춰버린 시계가 걸려 있다. 결투의 총성이 한 방 울린 시각이다. 시 외곽의 얼어붙은 대지에서 푸슈킨은 아내 나탈리아의 연인인 프랑스 사관생도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상대방이 먼저 쏜 총알에 하복부를 맞고 쓰러진다. 이틀 후 비운에 간다. 영화에서 봤던 그 처절한 장면이 눈앞에서 재생한다. 결투, 인간의 삶에 대한 역설적인 유린이다. 결투는 입회인의 참석 아래 제비뽑기로 먼저 권총을 쏠 사람을 선정하고, 그가 상대방을 쓰러뜨리면 결투는 그것으로 끝나지만, 그렇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쏠 수 있는 기회를 넘겨준다. 결투는 명예라는 ‘허구적 기호’를 실재보다 더 귀중히 여겨 온 서구적 근대성의 산물이다. 망자 푸슈킨은 이런 허구성을 갈파했기에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고 절규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바리게이트로 쓰인 모스크바 문.


첫날 오후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보내고 저녁은 ‘아리랑 식당’에서 며칠 만에 한식으로 때운다. 네바강변에 자리한 모스크바 호텔 5층 5016호에 여장을 풀었다. 승강기 고장으로 오르내리는 데 얼마간의 발품을 팔았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자야치 섬(토끼섬) 일대의 관광에 나섰다. 제일 아름답다는 트로이츠키(삼위일체) 다리를 건너자 반원형의 비르줴바야 광장에 두 기의 등대(라스트랄)가 나타난다. 높이 32m의 등대에는 바다의 신 ‘넵튠’과 뱃머리 장식, 그리고 볼가강·드네프르강·네바강·발호프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상이 부착되어 있으며, 꼭대기에는 불을 피워 바다를 밝히는 기름접시가 놓여있다.


토끼섬에 이르러서는 제정 러시아의 쌍두 독수리 국장이 걸려있는 표트르 문을 지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들어섰다. 원래 이 요새는 표트르 대제가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으로부터 되찾은 네바 강 유역의 땅을 지키기 위해 처음에는 흙과 나무로 지었으나(1733년), 후에 다시 돌로 보강했다. 르네상스 시대가 추구하던 6각형 모양을 따른 성채의 높이는 12m, 폭은 4m로서 성벽에는 5개의 문과 6개의 망루가 설치돼 있다. 1917년 10월혁명 전까지는 정치범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수감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반대한 아들 알렉시스 왕자였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고리키도 여기에 감금된 적이 있다.


같은 이름의 성당은 우람하고도 화려하다. 나무로 지은 집이 불타버리자 지금의 철제 구조물로 지어졌다(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122.5m의 첨탑 꼭대기엔 높이 3.8m, 날개 길이 역시 3.8m의 천사상이 십자가를 안고 서 있다. 넓은 홀에 역동적으로 비틀어 만든 곡선형 도금 기둥 장식이 퍽 인상적이다. 여기에는 역대 로마노프 왕가의 황족들이 묻혀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로서 총살된 비운의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의 유해도 발견된 후 이곳에 이장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피살된 ‘피의 구원 성당’의 외관.


성당 앞에는 미국에서 활동한 한 조각가가 1991년에 기증한 이색적인 표트르의 앉아있는 동상이 눈길을 끈다. 머리는 작고 손발은 크며 키는 2m가 넘어 신체적 균형이 맞지 않는 다소 해학적인 조형물이다. 사실 러시아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표트르는 파격적인 기인이다. 매우 정력적인 사람으로서 건축을 진지하게 탐구하던 끝에 신분을 속이고 핀란드의 조선소에서 조선술을 2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요새 동쪽 30m의 강변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지은(1703년) 건물인 오두막에 8년 동안 살면서 수도 건설에 잠심몰두(潛心沒頭)한다. 이 오두막에 전시된 소박한 거실과 침실, 서재와 식당, 그가 직접 만든 보트 등 유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한다.


돌아오는 길에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피의 구원 성당’에 들렀다. 19세기 말 공포정치로 악명 높았던 알렉산드르 2세가 7번의 폭탄 테러 끝에 피 흘리며 쓰러진 곳에 세워진 성당이다. 캄차카 반도를 미국에 팔아넘길 정도로 매국도 서슴지 않은 그에 대한 민중의 저주는 하늘에 사무쳤다. 손자인 니콜라이 2세는 24년간이나 걸려 지은 이 화려한 성당과 같은 건물을 다른 곳에서는 지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건축가의 눈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역사는 화려함에 가려진 어두움을 결코 잊지 않고 만대에 고소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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