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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2. 대단한 공예품 고대의 옷감


고구려에서 직조한 옷감

조효숙


지리적으로 중국과 근접해 있던 고구려는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직물 생산 기술이 빠르게 발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각종 문헌에 금·나·수·견·겸의 견직물과 백첩포(白氎布)의 면직물, 계의 모직물 외에 갈(褐), 피혁류(皮革類) 등 다양한 옷감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여러 문헌 자료에는 “동이(東夷)는 대부분 토착민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변(弁)을 쓰고 금의(錦衣)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조(高句麗條)」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는데 “공회(公會) 때에는 금·수로 만든 옷을 입는다.”고 하였다.52) 비록 짧은 내용이지만 실제로 고구려인들이 수준 높은 의생활을 영위한 것을 의미한다. 동이족의 일반적인 특성을 기술하면서 금의를 입었다고 기록한 것은 특정인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의 의생활이 그러하기에 외국인의 시각으로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또한, 공회 때에 금이나 자수가 놓인 수 옷을 입는다는 내용은 수산리 고분의 귀부인 모습을 비롯하여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다양한 무늬가 화려하게 묘사된 남녀 의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고구려인이 입었다는 금·수의 옷감은 그 기법이 너무나 섬세하고 정교하여 요즈음의 명주나 양단과 같은 한복용 옷감과 견주어 볼 때 옷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단한 직물 공예품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과연 그토록 정교한 옷감을 우리가 직접 생산하였을까? 『한원(翰苑)』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에서 금을 짰는데, 자지힐문금(紫地纈紋錦)을 최상으로 쳤고, 다음은 오색금(五色錦), 그 다음은 운포금(雲布錦)이 있었다. 또 백첩포(白氎布), 청포(靑布)를 짰는데 아름다웠다.”53)라고 기록하였다. 다른 문헌과는 달리 『한원』에서는 ‘조(造)’라는 단어를 써서 고구려에서 실제로 금을 생산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금의 종류도 중요한 순서대로 기록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지힐문금은 자색 바탕에 힐문, 즉 힐염의 기법으로 선염한 실로 짠 금, 다시 말해 지금 중앙아시아 위구르 족의 민속복으로 남아 있는 이카트와 같은 견직물로 볼 수 있다. 오색금은 문자 그대로 여러 색의 선염사로 직조한 아름다운 무늬의 금으로 생각된다. 비록 고구려 금이 아직 발굴된 것이 없어 정확하게 어떤 옷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앙아시아의 누란, 아스타나, 니야 등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금 유물에서 그 형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백첩포를 짰다’는 기록은 고구려에서 일찍이 면직물도 생산하 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백첩포는 고려시대에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와 같은 초면(草綿)에서 뽑은 면섬유로 실을 만들어 밀도가 치밀한 면직물이다. 당시에 고구려에서 면종자를 직접 재배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인도나 중국의 남부 지방에서 생산한 초면 원사를 들여와 제직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밖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고구려인들이 사용하였던 옷감을 알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


『주서(周書)』에 “장부는 저고리와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대(白韋帶)를 하고 황색 가죽신(黃革履)을 신었으며 관은 소골(骨蘇)이라 부르는데 자색의 나로 만들었다.”54)고 하며, 『신당서(新唐書)』에도 고구려인들의 의복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왕은 오채(五彩)로 만든 옷을 입고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금구를 단 혁대를 사용하며 대신들은 나로 만든 관을 쓰는데 색상의 순위는 청색(靑色), 강색(絳色)이며 두 개의 조우를 꽂고 금·은구를 단 혁대를 착용하였다. 서인들은 옷을 갈(褐)로 만들어 입고 머리에는 변을 얹었다.”55)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에 “고구려 악공은 자색의 나로 만든 모자를 쓰고 소매가 넓은 황색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자색의 나로 만든 허리띠를 하였으며 붉은색 가죽신을 신었다.”56)고 하였다.


즉, 머리에 쓰는 관의 재료로는 그물같이 성글게 짠 나라는 견직물을 즐겨 사용하였다. 허리띠나 신발의 재료로는 주로 가죽을 사용하였는데 흰색·황색·붉은색으로 염색한 것으로 보아 당시 가죽을 다루는 기술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의복용으로는, 귀족 계급들은 화려한 색의 견직물인 오채나 나로 만든 옷을 착용한 반면, 서민들은 칡섬유로 만든 갈이라는 옷감을 사용하여 신분별로 차등을 두었다. 칡섬유는 잔털이 많아 광택은 없지만 베나 모시에 비하여 따뜻하고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필자] 조효숙



52) 『삼국지』 권13, 오환선비 동이 제30 고구려 ; 『후한서』 권115, 고구려 ; 『남사(南史)』 권19, 제69 이맥하(夷貊下) 고구려 ; 『북사(北史)』 권94, 열전 제83 고려 ; 『양서(梁書)』 권54, 열전 제48, 제이(諸夷) 동이 고구려 ;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전

53) 『한원(翰苑)』 번이부(蕃夷部) 고구려.

54) 『주서(周書)』 권49, 열전 제41, 이성상(異城上) 고려.

55)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 제145, 동이 고려.

56)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志)1, 악(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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