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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1장 우리 옷의 기본형과 시대별 변천



1. 우리 옷의 기본형

김문자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의복을 입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가죽 옷을 입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마사(麻絲)가 꿰어 있는 뼈바늘을 비롯하여 각종 동물 뼈로 만든 크고 작은 뼈바늘이 출토되고 있다. 당시에 이미 간단한 방직이 이루어졌음은 물론 어느 정도 ‘재봉된 옷’을 입었다는 증거를 뒷받침해 준다. 신석기인은 주로 가공된 가죽이나 직물을 이용하여 만든 간단한 의복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보다 완성된 우리의 유고(襦袴, 저고리와 바지)의 기본 양식은 청동기시대의 스키타이계 복장에서 이루어졌다.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 군현(郡縣)의 설치로 중국 문화권에 포섭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북방 유라시아 전역에 퍼져 있던 스키타이계 문화권 내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스키타이계 문화는 유목을 위한 이동 생활이나 기마 활동 등 유목·기마 민족 특유의 환경적 배경에 맞추어 창조되었으므로 농경 민족과는 현저하게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 상호간에는 분포 범위의 광대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유사성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복식, 무기, 말 장식 등에서 비슷한 것이 많고 그들의 신앙 속에 강한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예 술품은 특유의 동물 의장으로 대표되며 주술성과 실용성이 가미되어 빠른 속도로 유라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스키타이 복식>   


기원전 4세기 초의 금제 항아리에 새겨진 스키타이인의 모습이다. 변형모를 쓰고, 가죽으로 만든 좌임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매고 있으며 화를 신고 있다.


우리의 ‘한복’은 스키타이계 복식 문화에 속하는 대표적인 옷으로, 이와 같은 유고 복장은 당시 스키타이 족의 주 활동 무대였던 흑해 주변과 유럽 동북쪽을 비롯하여 북방 유라시아 스텝 지대를 지나는 ‘초원의 길’을 통하여 각지로 전파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서양 옷의 가장 대표적인 복장이라고 생각하는 슈츠 양식과 우리의 바지저고리 양식은 원류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여밈과 상하의 양식이 거의 동일한데, 이는 서양 옷과 우리 한복이 각기 다른 양식으로 발전해 왔지만 원류가 같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복의 구조선은 양복화할 때 다르면서도 공통의 양식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고대 한복의 원류로 생각되는 스키타이계 옷은 당시 서양의 대표적인 복식인 그리스복과도 다르고 중국의 대표적인 복식과도 매우 다른 양식을 하고 있었음을 당시의 인물상과 유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 왕의 한 사람인 스킬리스는 스키타이 왕이면서 스키타이 복장을 싫어해 …… 혼자 그리스복으로 갈아입고 …….”라는 삽화를 통해 스키타이 인의 복장이 그리스 인과는 달랐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드레이퍼리형의 그리스복과는 다른 형태인 상하의 형식의 스키타이 복장은 수많은 고분 출토품에 새겨진 스키타이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1) 즉, 상하의로 구성되어 밀착된 형태의 복장으로 왼쪽으로 여미게 되어 있고(左袵), 허리 부위에는 띠를 매게 되어 있다. 이 복장은 원래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금판 장식(Gold Plaque)을 꿰매 달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중국에서 스키타이계 복장은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이 호복령(胡服令)을 내려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주로 ‘호복(胡服)’이라는 명칭으로 착용하였다. 춘추전국시대 화상전(畵像塼, 벽돌에 그림을 새긴 것)에 새겨진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만남을 표현한 인물도나 전한(前漢)시대의 마왕퇴(馬王堆) 유물을 통해서도 당시 중국인들의 복식과는 기본 형태가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당시 중국 한족의 대표적 의복인 포류(袍類)는 등 뒤로 돌아갈 정도로 깊이 여미게 되어 있고 바지가 겉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긴 겉옷을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고 입은 고구려인>   


고구려 무용총 고분 벽화 인물도로, 쪽진 머리에 좌임의 저고리와 당이 달린 궁고를 입고, 화를 신고 있다.


이처럼 우리 복식의 원류를 이루는 스키타이계 복장은 몸에 꼭 끼는 형태로 말타기 등 활동에 편리한 상의와 하의를 기본 복장으로 한다. ‘유(襦)’는 원래 중국에서 길이가 긴 포에 비례하여 짧은 상의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깃의 양식과는 상관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착용한 스키타이계 상의는 곧은 깃의 앞이 여며지는 직령교임식(直領交袵式)으로 엉덩이 선까지 내려오며 소매가 좁고 옷의 가장자리에는 장식선을 두르고 있었다.


하의인 고(袴)는 피혁제의 통이 좁은 형태가 기본형으로 생각되지만 재료의 변천에 따라 양식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가죽을 사용하여 말타기 편리하도록 바지통을 좁게 만든 세고(細袴) 양식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인물도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스키타이계 인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한편, 피혁제의 세고가 직물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말탈 때 밑이 터지지 않게 당(襠)을 댄 것이 궁고로 지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호복을 채용하기 이전에도 바지를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앞뒤가 터진 개당고(開襠袴)였다. 왕우청(王宇淸)은 중국의 바지에 대하여 “원래 한인(漢人)은 앞뒤가 터진 개당고를 입는 것이 상례이고 앞뒤가 막힌 궁고를 입는 것은 예외에 속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2) 또한, 『전한서(前漢書)』 에 “궁고는 앞뒤에 당(當·襠)이 있는 것을 말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3) 당이 부착되어 앞뒤가 막힌 형태를 지칭하고 있다.


이와 같은 궁고의 착용 모습은 고분 벽화 인물도에 보면 뒤가 삐죽 나와 있어서 당을 부착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실제로 스키타이계에 속하는 몽골 노인-우라 출토 바지4)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를 볼 수 있으므로 궁고의 형태도 원류가 스키타이계 복장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김문자



1) 김문자, 『한국 복식 문화의 원류』, 민족문화사, 1994, 99쪽.

2) 王宇淸, 『中國服裝史綱』, 臺北 : 中華大典編印會, 1969, 107∼108쪽.

3) 『전한서(前漢書)』 효소상관왕후전 주(孝昭上官王后傳注)

4) 梅原末治, 『蒙古ノイン· ウラ發見の硏究』, 東京 : 木夏一雄, 1960, 55∼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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