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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고구려 건국조 주몽(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고구려 건국조 주몽(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33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고구려 건국조 주몽(2)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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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고구려 건국조 주몽(4)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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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의 오녀산성. 추모왕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졸본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雙鳩含麥飛     한 쌍의 비둘기가 보리 머금고 날아와 
來作神母使     신모의 사자가 되었구나. 
[朱蒙臨別. 不忍 違. 其母曰. 汝勿以一母爲念. 乃裏五穀種以送之. 朱蒙自切生別之心. 忘其麥子. 朱蒙息大樹之下. 有雙鳩來集. 朱蒙曰. 應是神母使送麥子. 乃引弓射之. 一矢俱擧. 開唯得麥子. 以水 鳩. 更蘇而飛法云云.] 
주몽이 이별할 때에 차마 떨어지지 못하니 그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내 생각일랑 마라."

하며 오곡의 종자를 싸서 그것을 보내 주었으나, 주몽이 생이별하는 절실한 마음에 그 보리 종자를 잊어버렸다. 주몽이 큰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데 비둘기 한 쌍이 있어 날아와 앉으니[來集], 말하기를

"이는 분명 보리 종자를 보내신 신모(神母)의 사자로다."

이에 활을 끌어 그것을 쏘니 한 화살에 모두 들어 있었다.(화살 하나에 모두 명중시켰다.) 목구멍을 열어 보리 종자를 얻고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동명왕편>

 

《동명왕편》에는 유화가 주몽에게 오곡의 종자를 주었다는 언급이 있다. 기마민족 국가인 부여에서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기록은 보여주고 있다. 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기마민족으로서 수렵과 농경을 동시에 하는 반농반목(半農半牧)의 민족은 한민족과 여진족 뿐일 것이다.

 

[北史云 『高句麗常以十月祭天,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高登神, 云是始祖, 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 · 朱蒙云.』]

《북사(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며 음사(淫祠)가 많다. 신묘(神廟)가 두 곳에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이라고 하여 나무를 새겨 부인의 상(像)을 만들었다. 또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조로서 부여신의 아들이라 하였다. 모두 관청을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였으니 대개 하백녀(河伯女)와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32, 잡지(雜志)제1, 제사

 

유화는 주몽과 함께 신으로 모셔진다. 땅을 관장하는 지모신(地母神). 그것은 그녀가 물의 자손이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물은 농경의 근원이다. 하늘로부터 내린 비가 땅에 흘러 물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기름진 땅에서 인간은 농사를 짓고 곡식을 기른다. 하늘의 신으로 상징되는 해모수와 함께, 유화는 땅의 여신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유화가 주몽에게 오곡 종자를 주었다는 기록은 그러한 사실에 연유한 것이다.

 

주몽이 건넜던 엄리대수가 과연 어디이길래, 그리고 얼마나 건너기 힘든 강이길래 추격군들은 주몽을 쫓는 것을 포기했을까. 보통 송화강이라고도 하고 요하라고도 하고, 시라무렌 강이라고도 하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엄리대수가 어디인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삼국사》는 주몽이 건넜던 강을 엄사수라고 적고, '삼국유미상지명(이름은 있지만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는 삼국시대 지명)'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ㅡ그것도 《삼국사》보다 훨씬 앞선 《구삼국사》를 참조해서 쓴 기록에서 주몽이 건넜던 강은 '엄체수(淹滯水)'ㅡ다른 이름은 개사수(蓋斯水)ㅡ라 하여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쪽'이라고 적고 있다. 정말 압록강 동쪽에 엄체수 즉 엄리대수가 있었다면 부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송화강 유역에 있던 나라일까? 잘 모르겠다.

 

形勝開王都     형세 좋은 곳에 왕도를 여니   
山川鬱○巋     산천은 울창하여 높고도 크구나.
自坐茀○上     스스로 띠자리의 위에 앉아
略定君臣位     군신의 위치를 대략 정하였도다 
[王自坐之上, 略定君臣之位.] 
왕이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 군신의 위치를 대략 정하였다.

 

<동명왕편>

 

엄리대수는 건넜지만 아직 갈 길이 많다. 대략의 위치도 정했으니, 이제 졸본부여로 가야 한다.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一云『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

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

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克), 무골에게 중실(仲室), 묵거에게 소실(少室)이라는 성씨를 내렸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이 이른 곳은 졸본부여였다. 졸본부여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 이 해는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BC. 37)의 일이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전기

 

한민족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가장 위대했으며 가장 자주적이었던 나라, 천왕랑 해모수와 하백여랑 유화 두 신의 아들이, 북부여의 옛 땅 홀승골성에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은 고구려(高句麗). '높은 성곽(高城)'이라는 뜻의 고구려 방언 '구려(句麗)'에 '존귀하다'라는 뜻의 '고(高)'를 붙여 지은 이름이며, 이때부터 주몽은 아버지에게 받은 해(解)씨 성을 버리고 고(高)씨를 쓰게 되었다.

 

고구려라는 나라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졸본부여라는 나라의 존재다. 졸본(홀본)이라는 도읍지를 정하면서 동명왕은 순전히 자기 힘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 국왕의 사위로서 그의 대를 잇는 형식으로 나라를 세웠고, 졸본부여의 국왕으로서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바꾼 것 뿐이었다. 《삼국사》 백제본기에는 동명왕의 고구려 건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내용이 두 가지니까 나눠서 해야 되겠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이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삼국사> 권제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전기

 

중국에서 날아온 소식인데, 중국 길림성 통화시 일대에서 청동기시대 말기에서 고구려 초기 사이의 것으로 보이는 제사 유적이 하나, 고분군이 두 곳 새로 발견되었단다. 통화의 문물 전문가들은 이곳이 바로 추모왕이 나라를 세운 비류곡 졸본천이라고 주장하고 있단다. 4년 전에 중국 통화시 당국은 다섯 명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11월부터 20여일에 걸쳐서 혼강의 통화시 동남쪽 구역에 대한 전면적인 고고조사를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대도령향 하룡두촌 토주자 유적에서 밑부분 최대 지름이 28m, 높이 약 10m, 윗부분 지름이 7~8m인 타원형의 제단터가 발견되었고, 여기서는 청동기를 본떠 만든 정밀한 석제단검과 괭이 같은 것이 발견되었다 한다. 혼강 중류의 통화시에는 50여기의 남령둔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대부분 사각형 층층식석실묘, 같은 형태의 구덩이묘, 사각형 적석묘 같은 제법 큰 규모의 귀척 무덤과 소규모 평민 무덤이 함께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발굴 조사에 참여했던 중국의 학자 중에는 왕구이위 통화시문화국 부국장도 있었고, 왕즈민 통화시 문물보호연구소 소장도 있었다. 이들은 통화에서 발견된 이 유적군의 소재지가 바로 졸본부여국의 초기 정착지일수도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은 토주자 유적을 가리켜서 '장군묘'라고 부르는데, 이 점을 갖고 중국 통화시 문물관리위원회는 이곳에서 추모왕의 무덤이 발굴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월간사학잡지 <동북사지> 제6호에 '퉁화 장옌 유적군 조사'보고서에 소개된 이야기다.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은 졸본부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 졸본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도 부연설명이 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예전에 스크랩해둔 내용을 소개하긴 하는데, 밑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추모왕의 고구려는 환인이나 통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일단 밝혀두고자 한다.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로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은 뒤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삼국사> 권제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전기 中 '일서(一書)'

 

추모왕이 졸본의 홀승골성에 내려오기 전에 이곳에 있었던 졸본부여ㅡ그 나라는 해부루왕과도 연이 닿아있었다. 소서노라는 여자의 아버지 연타발을 졸본부여의 국왕이라 보고, 비류왕의 아버지로서 졸본에서 소서노와 처음 혼인했다는 그 우태를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으로 기록한 《백제본기》의 기록대로라면, 추모왕은 북부여에서부터 내려온 뒤 혼자 힘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연합왕국을 수립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고 한다면 부여의 왕족에 해당한다. 부여의 '총본가'에 해당하는 동부여와는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이었다. 그것은 부여 왕실의 혈통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해부루왕의 뒤를 이었다고 해도 금와왕은 해부루왕의 친자가 아니니까. 몽골제국에서 칭기즈칸의 피가 섞였느냐 안 섞였느냐의 여부를 두고 소위 '황금씨족' 논쟁이 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여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해부루왕의 서손' 우태가 금와왕과는 달리 해부루왕의 직계 혈통이라면, 금와왕과 우태 사이에 분명 알력이 있었을 것이다. 졸본부여가 '부여의 도망자' 추모를 받아 들이는데 별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졸본주, 고구려식 이름(?)으로는 홀승골이라 불린 고구려 최초의 도읍지의 위치 비정에 대해, 지금은 압록강 유역 환인 서쪽이라고 알고 있지만, 조선조에는 황당하게도 그곳이 지금의 평안도 성천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원래 사실대로라면 만주에 있어야 할 지명을 죄다 우리 나라 안으로 위치 비정을 해버린 것인데(단재 선생이 비판하시기를 '귀신도 못 하는 땅 옮기기를 했다'고 했다) 조선조 후기 '실학'의 대두와 함께, 우리 역사를 좀더 실증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자는 '국학운동'이 일어나면서,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에 의해 졸본의 위치가 새로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낸 결론이란, 졸본이 한반도가 아닌 만주에 있었다는 결론이었다.(지금이야 하품 나올 정도로 당연해서 짜증나는 소리지만 그때는 적잖이 충격이었을듯) 고려 때에 이미, 땡중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졸본은 지금의 요양에 있었다고 주장해서, 한반도 안에 졸본이 있었네 하는 황당한 '썰'들을 일소했다만, 불교승의 말을 유학자들이 눈여겨볼 리가 없으니. 이게 뭐니 대체.

 

[按通典云,『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 · 卒本, 似一處也.]

《통전(通典)》을 살펴보건대

『주몽이 한 건소(建昭) 2년(BC. 37)에 북부여에서 동남쪽으로 가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머물렀다.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라고 하였고,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쳐서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고 하였으니, 흘승골성과 졸본은 한 곳인 듯하다.

<삼국사> 권제36, 지리지4, 고구려

 

《삼국사》 편찬 총책임자였던 김부식 영감은 당의 《통전》과 우리나라 《고기》의 기록을 근거로, 일단 홀승골성과 졸본주는 동일한 곳임을 밝혔다. 『광개토태왕릉비』에선 '졸본'을 '홀본(忽本)'이라고 적고 있을 뿐 대체로 추모왕의 도읍에 대해 《삼국사》와 기본 골격은 같다. 『광개토태왕릉비』에서 말한 '홀본 서쪽'과, 《삼국사》가 말하는 '비류수 서쪽 언덕'은 서로 지명만 바꾸었다 뿐이지 일단 '서쪽'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으니. 홀본과 비류수가 서로 가까이 닿아있었다ㅡ라.

 

[漢書志云『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高句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 · 卒本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高句麗, 是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한서(漢書)》의 지(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에서 3,600리 떨어져 있다. 속현(屬縣)에 무려(無慮)가 있었다.』

고 하였으니, 곧 《주례(周禮)》의 북진(北鎭)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요[大遼]가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했고,

『현도군(玄菟郡)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000리 떨어져 있다. 소속된 현(縣)이 셋이었는데,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다.』

라고 했으니,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흘승골성 · 졸본’이라는 것은 대개 한의 현도군의 경계이고, 요[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니, 《한지(漢志)》에서 말한 ‘현도속현(玄菟屬縣) 고구려(高句麗)’는 이것이 아닌가 한다. 옛날 요[大遼]가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 요의 황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조빙 일행은 동경을 지나고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쯤 가서 의주(醫州)에 이르고, 거기서 연계(燕薊)로 향했다.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 권제37, 지리지4, 고구려

 

요의 수도 연경은 곧 지금의 베이징을 가리킨다. 《삼국사》에서 김부식 영감이 추모성왕의 첫 수도로 지목한 곳은 전한이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설치했다는 현도군의 경계, 거란족이 세운 요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동경요양부()를 설치했던 지금의 요양 서쪽이었다. 훗날 고려와 수가 결전을 벌인 요동성이 실은 고구려 첫 수도 홀승골성이었다는 것이 부식이 영감의 주장이다. 아시다시피 요양과 환인(오녀산성 있는 곳)은 서로 거리가 엄청 먼데, 김부식 영감의 《삼국사》를 무조건 깔 줄은 알면서 왜 그 양반이 우리나라 옛 강역을 지금 우리 생각보다 더 넓게 잡았던 것은 생각 못해주는지 참. 그 양반 말대로는 요양 근교에 흐르는 요하가 곧 비류수가 되는데, 부여가 송화강 유역에 있었다면 도대체 추모왕의 남하 루트를 어떻게 그려야 되는 건지 참 돌아버리겠다. 성호 선생이나, 그 제자분인 안정복 영감도 《삼국사》에서 말한 '졸본=요양설'은 그리 눈여겨보지 않으신 듯 하다.

 

주몽이 처음 졸본에 도읍한 것은, 교제(郊祭)를 지낼 돼지를 잃어버림으로써 국내성을 얻었기 때문이라 했으니 돼지를 놓친 지역이 어찌 극히 먼 지경이었겠는가? 당(唐) 총장(總章) 2년에 압록강 북쪽의 항복한 성이 이미 11개였다고 했는데 국내주(國內州)가 그 속에 끼었으니, 그렇다면 졸본은 역시 압록강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통고》에

“마자수(馬訾水)의 한 이름은 압록강인데 근원이 말갈 백두산에서 나와 국내성의 남쪽을 지난다.”

했으니, 압록강에서 멀고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고, 《성경지》에,

“옛날 부여국이라는 것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 리에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었다.”

하고,

“동명(東明)의 무덤은 개평현(盖平縣) 동병산(東屛山)에 있다.”

했으니, 또한 증명할 수가 있다 하겠다. 대개 해부루가 처음 졸본으로부터 성천(成川)으로 옮겨갔으므로 해모수는 실상 졸본의 옛 땅에 웅거했었으며, 주몽이 또한 성천에서 화를 피하여 졸본으로 들어와서 아비를 계승하여 임금이 되었던 것인데, 똑같이 부여라는 국호를 썼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성천을 졸본이라고 했던 것이다.

<성호사설> 권제2, 천지문2, 졸본부여

 

조선조 성호 이익 선생도 《성호사설》에서 졸본의 위치는 만주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부여가 한반도 안에 있다는 '땅 옮기기'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셨다. 《성경지》의 기록대로 부여가 현도의 북쪽 천리에 있었다면, 오늘날 현도의 위치는 한반도 안이 아닌 만주, 그것도 요서 지역에 있었다는 견해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부여라는 나라가 지금의 몽골초원과 가까이 있으면서 중국의 북쪽에 있었다고 봐야 한단 말인가?

 

졸본은 곧 발해(渤海) 대씨의 솔빈부(率賓府)다. 솔빈부는 화주(華州)ㆍ익주(益州)ㆍ건주(建州)를 관할하였다. 《성경지》에

“솔빈부와 화주ㆍ익주는 다 봉황성의 관할 경내에 있고, 익주는 봉황성 동남쪽 1백 20리에 있으며, 조선령 의주(義州)의 압록강을 또한 익주강(益州江)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그 땅을 대략 상상할 수가 있다. 《성경지》에 또,

“건주(建州)는 명(明)이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였으니 지금 흥경(興京)이 바로 그곳이다.”

“영길주(永吉州)는 요(遼)가 솔빈부를 설치하였으니, 본래는 솔빈국(率賓國)이며, 금(金)에서는 휼품로(恤品路)로 고쳤는데, 지금 흥경 동남쪽 변방에 있다.”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영길주의 남쪽 지경에서 봉황성까지는 다 옛 졸본국(卒本國) 지역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통전》에 ‘주몽이 북부여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도읍하였다.’ 하고, <《북사》에도 같다.> 《고기》에는 ‘주몽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흘승골성과 졸본은 한 곳인 것 같다. 《한서》 지리지에는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에 무려(無慮)가 있다.’ 하였는데, 무려는 《주례(周禮)》에서 말한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요가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현도군의 속현 중의 하나이니, 〈주몽이 도읍하였다는 흘승골성과 졸본은〉 대개 한 때 현도군의 경내요, 요의 동경(東京)의 서쪽이니, 《한서》 지리지에 말한 현도군의 속현인 고구려가 혹시 이것인가?”<김씨의 말은 여기까지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고구려현은 요동 동북쪽 즉 지금의 무순(撫順) 지역에 있으니, 여기서 ‘요국의 서쪽에 있다.’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하물며 졸본과 고구려현은 본래 서로 같지 않은데도?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말한다.

“졸본을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천(成川)이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은 요동과 현도의 지경에 있는데, 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한다.”

“흘승골성은 대요(大遼)의 의주(醫州)에 있다.” <《삼국유사》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상고하건대, 화주는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요, 영흥부에 비류수(沸流水)가 있어 이걸 갖고 졸본이라 한 것이리라. 성주(成州)는 지금의 성천인데, 성천을 졸본이라 한 것을 《삼국유사》에서는 잘못이라 하였다. 《여지승람》에서도 지리에 대해서는 으레 《삼국유사》를 따랐는데, 여기서는 갑자기 성천을 졸본부여라 하고, 비류강(沸流江)을 졸본강(卒本江)이라 하였다. 또

“흘골산성(紇骨山城)이 있는데, 비류왕 송양(松讓)이 쌓았다.”

하였으니, 그 설은 아마 《고려사》를 따른 것이리라. 《고려사》 지리지에

“성주는 본시 비류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하였다. 한번 성천이 졸본이란 말이 있게 되면서부터 산천 이름을 모두 비슷하게 지어서 그 일을 사실화시켰는데, 후인들은 다시 상고해보지 않고 그대로 잘못을 전하니, 매우 탄식할 일이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졸본이 요동 현도의 지경에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사실을 얻은 것이요, 동진(東眞)은 고려 고종 때 북방에서 일어나 그 땅이 백두산 안팎을 포괄하였으니, 지금의 흥경 등지가 다 그 경내다. 흘승골성이 의주에 있다고 한 것은 김씨의 설이 잘못을 이어받은 것인데, 그 말이 또한 모순된다. 한(漢)ㆍ위(魏) 때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항시 현도를 경유하고, 고구려가 중국에 품명(禀命)할 때도 항상 현도를 지났으니, 그 지역이 서로 가까웠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일 지금의 성천을 졸본이라 한다면, 이때 한(漢)의 낙랑군치가 평양에 있어, 성천과의 거리가 백 리도 못되었는데, 고구려가 어찌 낙랑에 속하지 않고 현도에 속하였으며, 낙랑 또한 어찌 남으로 하여금 지척의 땅에 나라를 세우게 했겠는가?

지금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이 바로 옛날의 살수(薩水)이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한의 광무제[光武]가 살수 이남은 한에, 이북은 고구려에 속하게 했다. 태조왕(太祖王) 때에 지계(地界)를 논하면서 남쪽은 살수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고구려가 살수 북쪽 땅에 있었음이 더욱 명백하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졸본고'

 

순암 영감은 영길주 남쪽에서 봉황성까지가 졸본부여국의 영역이라고 했다. 김부식이 주장한 '졸본요양설'에 대해서 안정복 영감은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가 요동의 동북쪽 지금의 무순 지대에 해당하므로(정말?) 요하 서쪽이 졸본이라는 김부식 영감의 말이나 요의 의주에서 졸본을 찾아야 한다는 일연 땡중의 말은 틀렸다고 하면서도, 의주나 성천 같은 오늘날 우리나라 경내에서 졸본을 찾는 것도 잘못이라고 했다. 일단 대한민국 국경 안에서 동명왕의 졸본을 찾으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안정복 영감이 일소를 시켜서 그 폐단을 없애기는 했지만, 그래서 졸본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다는 건지. 콕 집어서 말 못하기는 순암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문헌인 《삼국사》나 《삼국유사》 모두 요양과 요하 일대에서 졸본을 찾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왕의 수도는 압록강 너머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다. 한 마디로 미치겠다.

 

약용이 살펴보건대, 옛 졸본 지역은 지금의 개원현 동남쪽으로 두 물을 건넌 곳에 있다.<개원은 옛날 부여다.> 지금 살펴보건대, 개원현 남쪽 10여 리에 청하가 있으니, 곧 옛 이하의 하류로서 서쪽으로 대요하로 흘러들어간다. 주몽이 처음 도망치고 말탄 사람들이 쫓아올 때, 이른바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루었다'는 곳이 지금의 청하수다. 또 이른바 보술수는 청하를 건너고 나서 동남쪽으로 2백리 가까이 달려서 첨정산 북쪽에 이르면 강이 하나 가로지르는데, 곧 지금의 혼하 상류, 납록하 하류인데 그것이 이른바 비류수다. 지금의 흥경 북쪽 다섯 강물이 합쳐져 흥경 서남쪽을 돌고 또 북쪽으로 흘러 소자하가 되고 서쪽으로 혼하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이것이다. 다섯 강물이 서로 가깝기 때문에 어느 것이 비류수인지 알수는 없지만, 요컨대 졸본은 지금의 흥경 북쪽의 물 건너편 지역이며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아방강역고> 권제7, 졸본고

 

<요양은 훗날 심양이라는 이름으로,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세운 아이신(金) 왕조의 첫 도읍지가 되었다.>

 

다산의 《아방강역고》에서 말한 흥경은 곧 싱징라오청(興京老城)ㅡ지금의 요령성 심양. 만주어로는 '가로지른 산'이라는 뜻의 허투-알라(赫圖阿剌)라고 불리는 곳, 곧 청(淸) 황실의 발상지다.

 

참고로 만주어로는 '허투-알라(Hetu-ala)'를 이렇게 쓰지. 궁금하신 분이 있으면

http://www.anaku.cn/index.php (사이트 사라졌음)

여기 가보시라. 영어 발음만 입력하면 만주어로 바꿔주니까. 고구려(Goguyeo)는 만주어 표기로 (   ) 이렇게 적는다나? 여담이지만 내 이름은 (  ) 이렇게 쓴다는데, 만주어로.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낄낄낄.

 

옛날 선배님들이 수고는 많이 하셨는데,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한계이신지라 정확히 어디라고 콕 집어 말씀은 못 하시고, 그저 어디어디에 있었을 거라고만 말씀하시고 그러면서도 한반도에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라는 것, 하나만은 밝혀놔 주셨다. 다산 선생은 혼하 상류, 납록하 하류에 비류수가 있었고, 흥경 북쪽 강 건너편 지역이 졸본이었다고 했다. 조선조 이래로 선진 학자들이 주장하신 것이 다 이렇게, '졸본=요양 or 심양 근교'라는 학설이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졸본을 지금의 환인으로 보게 된 거지? 그리고 그 근거는 대체 뭐지?

 

선배들이 이만큼 밝혀놓으셨으니, 그 뒤의 틀린 것은 후배들이 수정해서 바로잡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애석하게도 이 미천한 촌뜨기는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 참.

 

 

그건 그렇고, 저기.... 진짜 멋지긴 하네.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靺鞨)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의 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서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원년(BC.37)

 

말갈 제족(諸族)들을 쳐서 고구려의 발 아래에 평정한 주몽. 아직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추모왕으로서는 국방상의 문제로든(배후 위협 제거) 나라 건국의 문제로든 주변의 이족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홀승골경 인근의 예 부족들을 제압해서 고구려의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말갈은 고구려의 세력권에 놓였다. 그들은 뒷날 대조영을 위시한 고구려계 세력과 함께 발해를 세우게 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국의 역사라 주장하면서,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이 말갈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그것은 '신당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의 건국세력중 하나인 '말갈'이, 처음부터 고구려의 권속에 놓여있었다고 친다면, 그들은 이미 고구려인이지 말갈인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말갈'과도 차이가 있다.

 

'말갈'은 9세기 무렵부터 등장하는 단어다. 사료에는 '물길(勿吉)'이라는 이름이 그 이전에 등장하는데, '읍루', 즉 지금의 만주족(여진족)의 조상뻘 되는 종족이 이 물길이다. 물길이라는 이름이 말갈로 변해서, 대조영이 발해를 세울 무렵에는 말갈이란 단어가 지금의 여진족을 가리키는 단어로 변하게 되었다. 북방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던 신라에서 역사를 기록하는데 북방 세력을 모조리 '말갈'로 고쳐 적어버린 것이다ㅡ라는 것은 조선조 다산 정약용이 이미 《아방강역고》에서 주장한 것으로, '말갈'이라는 단어가 아무리 높이 잡아도 7세기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라는 점에서 날카로운 지적이다.(단재 선생은 고구려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말갈족은 예족을 가리키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咄哉沸流王     불쌍하구나[咄] 비류왕이여,
河奈不自撥     어찌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若矜仙人後     선인의 후예인 것만 지나치게 자랑하여
未識帝孫貴     천제 손자의 귀함을 알지 못했느뇨.
徒欲爲附庸     그저[徒] 부용국(속국)으로 삼으려 하여

出語不愼葸     말함에 있어 조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느냐
未中畵鹿臍     사슴 그림의 배꼽도 맞히지 못하고
驚我倒玉拍     옥가락지 깨는 것에 놀랐으면서

 

[沸流王松謙出獵, 見王容貌非常, 引而與坐曰 "僻在海隅, 未祥得見君子, 今日邂逅, 何其華乎? 君是何人 從何而至?" 王曰, "寡人天帝之孫, 西國之王也. 敢問君王繼誰之後?" 讓曰, "子是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地方至小, 不可分爲兩王, 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王曰 "寡人, 繼天之後, 今主非神之孫, 强號爲王, 若不歸我. 天必殛之." 松讓以王累稱天孫, 內自懷疑. 欲試其才. 乃曰 "願與王射矣" 以畵鹿置百步內射之, 其矢不入鹿臍. 猶如倒手. 王使人以玉指環, 懸於百步之外射之, 破如瓦解, 松讓大驚云云.]
비류왕 송양이 나와 사냥을 하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초대하여[引] 더불어 앉아 말하기를

"(나는)바다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를 못 뵈었는데, 오늘 만나게 되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손자이며 서국의 왕이오. 감히 묻건대 군왕은 누구의 후손이시오."

송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으로 여러 대(代)를 이어 왕노릇 했소. 지금 이 땅은 작아서 두 왕으로 나눌 수 없고, 그대는 나라를 만든 것이 일천하니, 나의 부용국이 옳을 것이외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과인은 하늘의 후손인데, 지금 왕[主]께서는 신의 자손도 아니면서 제멋대로 왕이라 칭하시니, 만약 나에게 복종하지[歸] 않으시면 천벌이 내릴 것입니다."

송양은 왕이 누차 천손을 칭함을 듣고 속으로 의심을 품어 그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왕과 함께 활쏘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림 사슴을 백 보 안에 놓고 그것을 쏘았는데, 그 화살은 사슴의 배꼽도 맞히지 못하고 그것마저도 쩔쩔맸다[倒手]. 왕은 사람을 시켜 옥지환을 백 걸음 바깥에 매달고 그것을 쏘셨는데, 기왓장 부수듯 깨지니 송양은 크게 놀랐다 한다.

 <동명왕편> 본장(本章)

 

말갈 제족들을 토벌한 다음에 추모왕이 눈을 돌린 곳은 비류국ㅡ.

《위서》에서는 '보술수'라고 기록한 비류수의 상류에 있는 나라였다.

 

[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왕은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시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沸流國)에 이르셨는데,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는 말하였다.

“과인(寡人)이 바다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다. 오늘 서로 만나니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주몽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

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하였다. 땅이 좁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왕은 그 말을 분하게 여기셔서, 그와 더불어 말다툼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는데, 송양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원년(BC.37)

 

비류왕 송양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다만 비류수의 중류나 상류에 위치한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제왕운기》에서는 비류국을 가리켜 단군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고 했고, 단재 선생은 비류국이 곧 《삼국사》에서 말한 졸본부여라고 했다. 활쏘기 잘하는 것을 보고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칠 왕이 설마 있겠나. 활쏘기로 비화가 되었을 뿐, 사실은 고구려와 비류국 사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쟁이 있었겠지. 눈썰미 좋은 분들은 아마 보셨을거야. 《삼국사》에서 뭐라고 했는지. '사냥하면서' 찾아갔대. 비류국의 왕궁을. 대체 사냥하기는 뭘 사냥하면서 찾아갔다는 거지? 사슴이나 큰 곰이라도 잡았나? 혹시.... 사람? 

 

來觀鼓角變        와서 고각이 변색한 것 보고는
不敢稱我器        감히 내 기물이라 말하지 못하네.

[王曰 "以國業新造, 未有鼓角威儀, 沸流使者往來, 我不能以王禮迎送. 所以輕我也." 從臣扶芬奴進曰, "臣爲大王, 取沸流鼓角." 王曰 "他國藏物, 汝何取乎?" 對曰 "此天之與物, 何爲不取乎? 夫大王困於扶余, 誰謂大王能至於此? 今大王奮身於萬死之危, 揚名於遼左. 此天帝命而爲之. 何事不成?" 於是扶芬奴等三人, 往沸流取鼓而來, 沸流王遣使告曰云云. 王恐來觀鼓角, 色暗如故. 松讓不敢爭而去.]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국업(國業)이 새로 창조되었으나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서 맞이하고 보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하시니, 시종하는 신하[從臣] 부분노(扶芬奴)가 앞에 나와,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
하였다. 왕께서,
“다른 나라의 감추어 둔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려느냐?”
하시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이니 왜 못 가져오겠습니까? 대왕께서 부여에서 곤욕을 당하실 때에, 누가 대왕께서 여기까지 이르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선 만 번 죽음을 당했을 위태로운 땅에서 몸을 빼쳐 나와 요좌(遼左)에 이름을 날리고 계십니다. 이것은 천제의 명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한다. 왕께서는 비류에서 와서 고각을 볼까 두려워하여 오래된 것처럼 빛깔을 검게 칠해 놓았다.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동명왕편>

 

이제는 남의 기물까지 훔쳐다가 꾄다. 《삼국사》에는 없는 고구려의 생생한 기록. 후대 조선조에 이르러 순암 노인네가 쓰신 《동사강목》에도, 뭐 왕이 하늘에서 왔다느니 거북이가 다리를 만들어줬다느니 하는 걸 '괴설변증'이라고 해서 어디서 줏어들었는지 모를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이야기로 몰아붙였으면서, 어째 이 이야기는 반듯이 실어놨다. 나중에 《동사강목》 읽어볼 기회 있는 분은 한번 보시길. 민족문화추진회 홈페이지 가면 다 있으니까니.


來觀屋柱故        집 기둥이 묵은 것을 와서 보고
咋舌還自愧        말 못하고 도리어 부끄러워했음이여.

[松讓欲以立都, 先後爲附庸. 王造宮室, 以朽木爲柱, 故如千歲. 松讓來見, 竟不敢爭立都先後.]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국(附庸國)을 삼고자 했다. 왕께서는 궁실을 지을 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서 천 년 묵은 것같이 했다.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지지 못하였다.

<동명왕편>

 

썩은 나무를 구해서 지은 궁궐이 얼마나 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송양왕은 이번에도 속아넘어간다. 하지만 아직 고구려에 완벽하게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명색이 선인의 자손인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갑자기 나타나서 나는 천손이다 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새파랗게 젊은 놈(?)의 말을 차마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류국왕은 그 자존심 때문에 크게 된통 당하고 만다.

 

東明西狩時       동명왕이 서쪽에서 사냥하실제
偶獲雪色麂       우연히 큰 노루를 잡았더니
<大鹿曰麂>      <
큰사슴을 궤(麂)라 한다.>

倒懸蟹原上       해원 위에 거꾸로 매어
敢自呪而謂       감히 스스로 하늘을 저주하며

天不雨沸流       "하늘이 비류에 비를 내리시어
漂汝其都鄙       그 서울과 변방을 물바다로 만들지 못하면
我固不汝放       내 너를 놓아주지 않으리니,
汝可助我       너는 나의 분노를 돕는 것이 마땅하니라."

<동명왕편> 본장(本章)

 

주몽은 더 '강력한' 방법을 쓰기에 이른다. 자신의 능력으로, 아버지 계신 하늘에 힘을 청하는 것이었다.

  

鹿鳴聲甚哀       사슴의 울음소리가 심히 애절하여
上徹天之耳       위로 하늘의 귀에 닿으니
霖雨汪七日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쏟아지는 것이
霈若傾淮泗       저 회수와 사수의 강물을 기울인듯 하구나
松讓甚憂懼       송양이 심히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沿流謾橫葦       흐름을 따라 부질없이 갈대를 가로놓았다
士民競來攀       백성들이 다투어 와 붙잡아서 
流汗相○       서로 쳐다보며 땀을 흘리는데
東明卽以鞭       동명께서 곧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畫水水停沸       물이 곧 멈추었노라.
松讓擧國降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是後莫予訾       그 이후로 우리를 헐뜯지 못하였다

[西水獲白鹿, 倒懸於蟹原, 呪曰 "天若不雨而漂沒沸流王都者, 我固不汝放矣. 欲免斯難, 汝能訴天." 其鹿哀鳴, 聲徹于天, 霖雨七日, 漂沒松讓都. 王以葦索橫流, 乘鴨馬, 百姓皆執其索. 朱蒙以鞭水, 水卽減. 六月松讓擧國來降云云.]

서쪽을 순행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얻었는데 해원에 거꾸로 달아매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 비류왕의 도읍을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 곤란을 면하고 싶으면 네가 하늘에 호소하라.”
하였다. 그 사슴이 슬피 울어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의 도읍을 가라앉혔다. 송양왕은 갈대 밧줄로 흐르는 물을 횡단하고 오리말[鴨馬]을 탔다. 백성들은 모두 그 밧줄을 잡아당겼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한다.

<동명왕편> 본장(本章)

  

900년이라는 길고도 긴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은 주몽의 고구려에 최초로 복속된 국가이며, 복속된 이후에는 다물도(多勿都)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다물이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말로 '도로 물러오다(되찾아오다)'라는 말을 한문으로 음역해서 적은 것인데, 그렇다면 원래 자신의 땅인 비류국을 되찾아왔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고구려와 비류국 사이에는 '활쏘기 시합' 따위로 미화된 전쟁이 있었을 것이고, 그 전쟁에서 비류국은 고구려에 패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빼앗은 비류국의 영토에 '다시 찾은 땅'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예전에는 우리 땅이었으니 다시 찾은 것 뿐이다'라고 무마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처럼.《제왕운기》에서 송양의 '선인의 후손'운운한 것은 곧 단군의 후손이란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적어놓은 기록을 생각한다면, '다물'이라는 말이 고구려가 옛 조선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에서 조선의 옛 땅을 모두 찾기 위한 전진거점으로 이 비류국, 즉 단군의 후손이 세운 이 나라를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BC.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으셨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비류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비류국왕 송양이 '바닷가 치우쳐 있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서는 적어도 바닷가에 있는 국가임을 알 수 있겠다. 또한 주몽이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라고 한 내용을 보면 비류수는 강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류는 비류수 상류이면서 또한 바닷가에 있는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에는 주몽이 망명하여 처음에는 비류수 강가에 머물렀다고 했는데 이는 비류수가 주몽이 살던 졸본과 인접한 곳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리라. 또한 졸본이 난하와 요하 일대였다면 비류수 역시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주몽왕이 건넜던 엄리대수를 찾는 지침이 될지도 모르겠다.

 

玄雲冪鶻嶺         상서로운[玄] 구름이 골령을 덮으매
不見山邐迤         비스듬한 산줄기 보이지 않네
有人數千許         수천 명쯤[許] 되는 사람들이
斲木聲髣髴         나무 베는 소리인듯
王曰天爲我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날 위하여
築城於其趾         그 터에 성을 쌓아주심이로다."
忽然雲霧散         구름안개 홀연히 흩어지니
宮闕高류嵬         궁궐이 높이 솟았구나

[七月, 玄雲起○嶺, 人不見其山. 唯聞數千人聲以起土功. 王曰 "天爲我築城." 七日, 雲霧自散, 城郭宮臺自然成. 王拜皇天就居.]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니 사람들은 그 산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수천 명의 사람이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以] 소리만 들렸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이레만에 구름과 안개가 스스로 흩어지고 성곽과 궁대가 스스로 이루어졌다. 왕께서 황천에 절하고 나아가 사셨다.

<동명왕편>

 

필시, 썩은 나무로 지은 궁궐이 오래 못가 망가진 것이 틀림없다. 그 궁궐 대신 주몽은 새로 왕궁과 성곽을 짓는다. 동명왕의 궁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세월이 지나 궁궐은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기록뿐. 그 모습은 상상 속에서나 겨우 찾을수 있으리라.

 

하늘이 자신을 위해 왕궁을 지어주었다ㅡ. 동명왕의 아버지가 하늘나라 천제의 태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鶻嶺. 秋七月, 慶雲見鶻嶺南, 其色靑赤. 四年, 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宮室.]

3년(BC. 35) 봄 3월에 황룡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년(BC.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이레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같은 기록이라도 이렇게 틀리다. 《동명왕편》에서는 하늘이 자신의 자손에게 왕궁을 지어주었다고 환타스틱하게 해놓았는데, 《삼국사》에서는 멋대가리 없게도 그냥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라고만 해놓았으니. 아마도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그 이후 동명왕 주몽의 영토 '다물'을 위한 정복활동에 대한 기록은 동명왕편에는 없고, 오직 《삼국사》에 기록되어있는대로만 기록할 따름이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 · 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爲城邑.]

6년(BC.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행인국은 어디인지 모른다. 혹자는 이곳이 유화부인의 귀양처였던 내몽고자치구 호화호특 지방에 있었다는데 알수 없다. 4년 뒤에 동명왕이 다시 복속시켰다는 북옥저에 대해서도, 지금의 러시아령 니콜라예프스크가 바로 그곳이라는 주장도 봤다. 

 

[十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 伐北沃沮滅之, 以其地爲城邑.]

10년(BC. 28) 가을 9월에 난새[鸞]가 왕대(王臺)에 모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희한하게도 새만 나타났다 하면 정벌해서 빼앗는다. 동명왕 6년에는 신작(神雀), 10년에는 난새.... 모두 신비로운 상상의 동물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은 고구려가 가진 동아시아 샤머니즘적 요소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새는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닌가.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 饋方物, 以報其德.]

14년(BC.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유화는 미혼모로서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여자였다. 강을 지배하는 수신(水神)의 딸로 태어나 해모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런 해모수에게 배신당하고 입술이 잡아 늘여진 채로 강물에 버려졌던, 그럼에도 아들 주몽(알)을 훌륭하게 키워내었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뒤를 보아준 한 사람의 위대한 어머니가, 지금 막 사랑하는 남편 해모수가 있는 하늘로 떠난 것이다.

 

在位十九年        자리에 있으신지 19년
升天不下莅        하늘에 올라 내려오지 않으시네
[秋九月, 王升天不下, 時年四十. 太子以所遺玉鞭, 葬於龍山云云.]

가을 9월에 왕이 승천하여 내려오지 않으시니 이때 나이가 40세였다. 태자가 (왕이) 남기신 옥채찍을 용산에 장사지냈다 한다.

<동명왕편> 본장(本章)

 

동명왕은 재위 19년만에 죽는다. 사망 당시 동명왕의 나이는 40세.(조선조 《해동이적》에는 119세) 지금 생각하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 죽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동명왕이 죽기 직전에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오고 왕은 그를 태자로 삼는다. 어쩌면 왕은 죽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미리 지목하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유리왕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따로 이야기하기로 한다.

 


동명왕이 묻힌 용산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구려의 고도(古都) 평양. 평양 역포구역 무진리에는 동명왕의 묘가 있다. (427년의 평양성 천도 때에 옮겨왔다는 것이 북한 학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묘에는 가장 중요한 왕의 시신이 없다. 도굴당했는지, 처음부터 없었는지 모르지만 평양은 한때 고구려의 수도였던 탓에 고구려의 영향이라던가 관련 전설은 강하게 남아있다. 그중의 하나가 주몽이 평양에서 기린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인데, 주몽이 기린을 길렀었다는 기린굴과 기린의 발자국이 찍혀있다는 조천석은 아직도 평양 지역에 그대로 남아있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기린>

 

실상 주몽은 졸본주(요양)에서 죽었으므로 평양에 그의 유적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평양 사람들은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러한 이야기를 믿으며 살아왔다. 그들의 조상 고구려인들이 그랬고 고려인들이 그랬고 조선인들도 그러했다. 해와 달의 자손,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물의 신 하백의 따님, 천하 사방에서 가장 성스러운 핏줄을 타고나신 성왕(聖王). 지금 그분의 왕묘에 왕의 시신은 없지만, 왕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나라 고구려를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느니라. 평양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믿으며 1600년 세월을 버텨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저 왕묘에는 주몽의 시신 대신,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채찍ㅡ주몽이 진실로 사용했던 그것ㅡ이 보관되어있었던 것일까.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19년(BC.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왔다. 왕께서 기뻐하시며 태자로 삼으셨다. 가을 9월에 왕께서 승하하셨다[昇遐]. 그 때 나이가 마흔이었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죽음을 보통 영면(永眠)이라고 부르는 것을 간혹 듣곤 한다. 《동명왕편》에서 천왕랑 해모수가 낮에는 나라를 다스리고 밤에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한 것이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평양 지역의 전승에서 추모왕이 기린을 타고 낮과 밤으로 하늘과 땅을 오가며 다스렸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ㅡ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인간의 하루나기를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낮에는 '왕'의 모습으로 인간의 대궐에서 나라를 다스리지만, 밤이 되면 대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숨어 낮에는 깊이 감추어두었던 '인간다움'을 드러내보인다. 인간이 감정없는 기계와 다른 점은 스스로가 피곤함을 느낄줄 알고 지칠 줄 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누적되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두 '잠'을 자야 한다. 잠을 자든 죽음을 맞든 '눈을 감는다'와 '쉰다'는 점은 공통이니까.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면 마치 죽은 것처럼 잠이 들었다가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에서 깨어 나랏일을 보살피는 왕을 보고, 사람들은 낮에는 인간세상에 있다가(깨있을때) 밤에는 하늘로 올라간다(잘때)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날 하늘로 올라간 왕이 눈을 감은 채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간 왕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신다며,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신다며 슬퍼했을 것이다. 

 

 

보통 황제의 죽음을 가리켜서는 '붕(崩)'이라고 하고, 제후나 대부가 죽으면 '훙(薨)'이라고 한다.(백제 무령왕의 죽음도 황제의 죽음인 '붕'이다: 무령왕릉 지석) 고대 세계에서 왕은 하늘이 임명한 것, 하늘과 대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왕권신수설(王權神受說). 백성들은 하늘을 대신하는 왕을 받들며 왕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받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왕이 죽으면 마치 하늘을 잃고 어버이를 잃은 듯이 슬퍼하고 통곡한다. 죽은 선왕은 최고급의 예를 받들어 장례를 지내고 호화스러운 왕묘에 모시며,나라가 망하지 않는한 해마다 최상급의 제사를 받는다. 

 

그러나, 황제의 죽음과 제후의 죽음을 '글자'로서 달리 표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에서의 얘기고, '죽음'에도 천자와 제후의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하물며 '하늘'을 상징하는 국왕에게 있어서랴. 그것보다는 차라리, 왕은 죽지 않고 하늘에 승천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성스럽고 자주적인 일이 아닐까. 하늘의 자손이신 왕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 이 고구려의 수호신이 되셨다면, 그 수호신의 가호를 받아 어떠한 걸림도 외침도 없이 무궁히 발전하여 이어나갈 천년왕국이 되리라. 그것이 바로 천손지국(天孫之國) 고구려ㅡ그 5천년 한민족의 자존심은,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 『광개토태왕릉비』에서도, 주몽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랐다고 기록함으로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중 동명왕설화 부분>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왕이)세상의 지위를 싫어하시니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셨다. 왕이 홀본(忽本)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세자 유류왕(儒留王)에게 고명(顧命)하여 도(道)로써 나라를 흥성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이도여치(以道與治). '밝은 도리로 정치의 기본을 삼는다' 즉 '도(道)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단군의 가르침. 고려 태조 왕건이 남겼던 '훈요십조'처럼 주몽은 그것을 자신의 아들 유리에게 가르쳐 변함없는 치국의 근본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위대한 왕의 이야기는 비로소 끝이 났다. 가장 방대하고 가장 장엄하며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삼국사》나, 주몽이야기를 기록한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는 주몽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 비중을 주지 않지만, 고구려 『광개토태왕릉비』와 고려의 《동명왕편》, 평양 지역의 전승에서는 주몽이 죽지 않고 기린(혹은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혹은 승천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그 사후를 신비화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선 황룡이라고 했으니, 여기서 황룡의 황색은 오방사상에서 가운데(中)을 의미한다. 가운데는 곧 중심이며,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황룡의 의미는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의미가 된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의 이름은 우리나라 이두문으로 '가운데'라는 뜻의 '가우리'라는 말을 음차한 것이라는 단재 선생의 말까지 갈 것도 없이, 고구려인들이 그들 자신을 얼마나 긍지높은 종족으로 생각했는지를 우리는 『광개토태왕릉비』와 동명왕편의 말을 읽고서 느낄 수 있다.

 

<신라의 무덤에서 나온 말안장에 그려진 기린>

  

한때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의 전승에서는, 주몽이 대동강 근처의 영명사 옆에 있는 '기린굴'이라고 하는 동굴에서 기린을 길렀으며 죽을 때 그 기린을 타고서 하늘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그때 기린의 발자국이 남아있다는 조천석은 지금도 가뭄 때 대동강물이 빠지면 드러난다고) 기린은 예로부터 용, 봉황, 거북과 함께 사령수(四靈獸)의 하나이고, 고대 중국에서는 성왕(聖王)의 출현을 예고한다 하여 무척 성스럽게 여겨졌던 동물. 고려 시대에는 그 기린을 무척 받들어서 왕의 직속 근위부대를 '기린군(麒麟軍)'이라고 불렀으니 그 섬김이 어떠했는지 알만하다. 그 기린을 타고서, 왕은 하늘로 올라 신이 되었다.

 

<동명성왕 초상화. 횡성고씨 종친회 소장>

 

부여 동명왕, 고구려 추모왕의 이야기는 고구려인들뿐 아니라 모든 부여계 제족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심점이었고, 고구려인들에게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만들어 주었다. 중국의 문물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와도,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소위 '줏대'를 고구려인들에게 심어주고, 추모왕은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왕력편에는 추모왕에 대해서 "갑신(BC. 37)에 서서 18년을 다스렸는데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추몽(鄒蒙)이라고도 쓰며 단군의 아들이다[甲申立, 理十八年.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라고 했다. 추모왕이 스스로를 단군의 후손이라 자처한 것인지 후대의 부회(附會)인지는 알수 없지만, 우리 역사에서 단군은 2천년 가까이 나라를 다스린 뒤(《삼국유사》의 설명대로라면)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아사달이라는 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비록 주몽은 하늘로 사라져 신이 되었지만, 주몽왕의 고구려는 죽지 않았다. 그의 아들 유리왕, 손자 대무신왕을 거쳐 19대 손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7백년 동안 주몽왕의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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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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