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yimworld.com/html/class/ancienthistory/baekje.htm
* "백제의 성립과 발전 - 노중국" 중 "
2.백제사의 여러 쟁점 - 1)건국시기와 건국세력의 문제"을 가져왔습니다.
 
건국시기와 건국세력의 문제
  
          1. 백제사에 대한 이해  http://tadream.tistory.com/14408
          2. 백제사의 여러 쟁점

              1) 건국시기와 건국세력의 문제  http://tadream.tistory.com/14359
              2) 한성시기의 도성 문제  http://tadream.tistory.com/14360
              3) 정치세력의 문제  http://tadream.tistory.com/14361
              4) 중앙통치체제의 정비  http://tadream.tistory.com/14362
              5) 지방통치제도의 발전  http://tadream.tistory.com/14363
          3. 백제사 연구의 과제  http://tadream.tistory.com/14408

백제의 건국시기와 주체세력의 문제는 서로 맞물려 논의될 수 있는 주제이다. 주체세력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건국의 시기가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韓末까지『삼국사기』백제본기의 건국연도의 전한 성제 홍가(成帝 鴻嘉) 3년(18,BC)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津全左右吉)이후 일본사학자들 사이에서『삼국사기』초기기록의 신빙성을 부인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백제의 기원을『삼국지』한전에 근거하여 3세기말경으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중국사서에 백제의 시조로 나오는 구태(仇台)의 고음(古音)이 고이(古尒)와 같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고이왕(234-286)이 백제의 실질적인 시조로 보았다. 이기백도 백제왕실계보의 검토를 통해 늦어도 3세기 중엽에는 백제의 국가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한편 이기동은 고이왕 때인 3세기 중엽에 마한족의 백제국(伯濟國)이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단계로 비약했고, 4세기 무렵에는 다시 고구려 계통의 온조집단이 남하하여 백제국을 정복하였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이도학은 백제의 연원을 부여에서 찾고 정복국가 설을 따라 근초고왕대인 4세기를 백제사의 전환기로 파악하였다.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삼국사기』초기기록을 국가발전단계론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삼국사기』초기기록을 국가발전단계론에 따라 재구성하여『삼국사기』초기기록 분해론을 제기한 노중국과 김기섭, 문안석, 강종원 등도 한강유역에서 백제국가의 출발을 3세기 내지 4세기로 파악하였다.

그러나『삼국사기』초기기록을 긍정론의 관점에서 보면 백제초기사의 모습은 사뭇 달라지게된다. 『삼국사기』초기기록에 대한 논의는 1970년에 들어와 초기기록의 신빙론이 강력히 대두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원용은『삼국사기』초기기록을 긍정적으로 보아 기원전 1세기에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천관우 역시 이러한 긍정론의 입장에서『삼국사기』백제본기를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우태(優台)-비류(沸流)-고이(古爾)계와 주몽(朱蒙)-온조(溫祚)-초고(肖古)계로 나누어 살핌으로써 왕실교대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연구자마다 구체적인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이를 범주화한다면, 이종욱, 김정배, 박찬규, 박현숙, 김병남, 최범호, 이용빈 등도『삼국사기』초기기록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백제의 건국시기를 온조왕대로 설정하였다.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온조설(溫祚說), 비류설(沸流說), 구태설(仇台說), 도모설(都慕說) 등 각기 다른 전승이 전해짐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설은『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의 본문에서 그 기사가 전한다. 이 설은 고구려의 주몽과 직결된다. 비류를 시조로 인정하는 설은『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 할주(割註)에 인용된 기사다. 구태(仇台)를 시조로 보는 설은 주서 이역(『周書』異域)상, 백제전에 근거한다. 마지막으로 도모(都慕)설은 『속일본기』권40, 칸무천황(桓武天皇) 9년 가을 7월조에 백제의 태조가 도모대왕(都慕大王)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백제의 건국집단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扶餘系 高句麗 流移民)’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파악했기 때문에 부여와 고구려를 굳이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천관우와 이기동에 의해 백제 왕실교대론이 제기되어 백제의 건국집단을 비류계와 온조계로 나누고, 비류를 우태와 온조를 주몽과 각각 연결시킴으로써 다시금 이 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그리고 노중국과 이종옥은 국호의 변화에 주목하여 十濟→百濟로 확대되는 표현이 백제의 성장을 그래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노중국은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는 시조형제설화는 백제가 소국 연맹단계였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건국주체에 대해서도 연속성 내지 계승성을 인정하는 입장과 불연속성 내지 단절을 강조하는 견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연속성을 인정하는 입장은『삼국지』한조의 마한 소국 가운데 하나인 3세기 무렵의 백제국(伯濟國)과 4세기 이후의 백제와의 관계를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다시『삼국사기』초기기록을 역사적 사실의 반영으로 인정하는 긍정론과 절충론으로 나뉜다. 불연속성 내지 단절을 강조하는 입장은 4세기 중반이후 백제으 갑작스런 발전에 대해 이전의 백제와는 별개의 존재로서 만주지역에 존재하던 기마민족이 남하하여 세운 일종의 정복왕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와같이 백제의 건국주체와 시기의 문제는‘『삼국사기』초기기록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사료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고구려와 친연성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부여의 계승성을 강조할 것인가, 그리고 비류와 온조의 문화적 기반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과제들이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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