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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답사기 5 : 집안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박물관)  - 백유선" 중 "광개토대왕비"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고구려답사기 5 : 집안 (광개토대왕비)  
셋째날(8월 7일) 2 
백유선  2005.09.14 13:36:02

        고구려답사기 5 : 집안 (광개토대왕비) - 백유선  http://tadream.tistory.com/1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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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이번 고구려 유적 답사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광개토대왕릉비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의 기상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기대하며 찾아간 광개토대왕릉비는 장군총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입장권 하나로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릉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한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태왕릉을 발굴, 정비하기 전에는 이 둘 사이에 수백 채의 민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중국이 세계 유산 등재를 위해 모두 철거하고 정비해 놓은 지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라고 우기기 전에는 얼마나 고구려 유적에 대해 무관심했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광개토대왕이 없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기상을 내세울 만한 것이 있었을까?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만큼 팽창을 부르짖고 실천하던 때가 있었는가? 광개토대왕 때를 제외한 우리의 거의 모든 역사는 한반도에 안주하며 중국의 그늘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었죠. 지금도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그럴 듯한 포장으로 자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만큼 광개토대왕은 우리의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잠재된 강대국으로의 성장의 꿈을, 그나마 역사 속 광개토대왕이 있었기에 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실천하기 어려운 팽창의 바램을 대리만족 시켜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우리의 꿈과 희망이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부푼 가슴으로 그의 능비 앞에 섰습니다. 첫 느낌은 정말 거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높이가 무려 6.39m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 키의 네 배 가까운 엄청나게 큰 비석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준 꿈과 희망만큼 큰 비석이었습니다. 중국에는 수많은 비석이 있지만 광개토대왕릉비처럼 큰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가 만주를 장악하고 대륙을 호령했듯, 그의 위용은 중국 역대 황제들의 것보다도 훨씬 우람한 모습으로, 1500여 년이 훨씬 지나서야 찾기 시작한 후손들의 발길을 질책하는 듯했습니다. "왜 이제 왔느냐?"
 
이 비에는 모두 1,775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중 1,590자가 판독 가능하다고 합니다.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기록이 희미하게 눈앞에 보였습니다.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도 들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이 이 비의 보호를 위해 방탄유리를 씌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유리창 너머로 부분적으로는 볼 수 있었지만, 반사되는 빛 때문에 전체 모습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비의 면모를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던 것은 매우 유감이었습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의 중요한 근거가 된 신묘년 기사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어디쯤 일거라고 짐작만 할 뿐 유리창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길수 교수는 광개토대왕의 호칭에 대해 달리 불러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광개토왕, 또는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호태왕이라고 합니다. 이 비석도 호태왕비라고 하지요. 우리는 흔히 광개토대왕비라고 하나 교과서적인 명칭은 '광개토대왕릉비'입니다.
 
서교수의 말에 의하면 '광개토왕'이란 호칭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쓴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 굳어진 호칭이라고 합니다.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을 분명히 한 김부식이 스스로를 낮춰  '왕'이라고 썼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그나마 조금 높여 대왕이라고 하지요. 이제는 이런 사대주의 사가들의 잘못을 반복할 필요가 없으며, 제대로 된 호칭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올바른 이야기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호칭을 찾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구려인이 쓴 금석문을 찾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 모두루묘지에 쓰인 글에는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성왕', 그리고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호우에는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 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서교수는 '태왕(太王)'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진나라이후 '왕중왕'이란 뜻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나중에 일본은 천황이라고 했지요. 고구려에서는 '태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대왕은 뒤에 왕을 높여 부르는 칭호로 사용했던 것이고요.
 
서교수는 태왕이란 칭호가 황제에 버금가는 칭호라는 것을 고구려의 세계관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본래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 하여 하늘의 아들이며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이었습니다. 왕은 황제보다는 한 등급 낮기 때문에 감히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지요. 조선시대의 왕들도 사직 즉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는 제사를 지냈어도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중국의 황제의 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태왕은 황제에 버금가는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앞의 금석문 말고도 태왕이라는 칭호는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 그리고 태왕릉에서 나온 벽돌과 청동 방울에도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 만큼 막연히 광개토왕, 또는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광개토태왕', 또는 '광개토호태왕'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제로 서교수는 늘 광개토태왕이라고 말했지요.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교수는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도 나중에는 '고려'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만주 일대에는 고려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이나 유적이 많은데, 이는 왕건이 세운 고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일컫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중국의 옛 기록에는 고구려와 고려가 함께 쓰여 있고, 일본사서에서는 오직 고려라고만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라는 기록보다 고려라고 쓰인 것이 열 배는 더 된다고 합니다. 오직 [삼국사기]에서만 고구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왜 김부식이 옛 사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고구려라고만 썼는지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지 추측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구려인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하는 것이지요. '중원 고구려비'에는 '고려태왕'이라는 표현이 있고, 6세기 불상인 연가7년명 금동 여래입상에도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분명히 쓰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장수왕 때 나라 이름을 고려로 바꾼 후 멸망할 때까지 고려라고 쓴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려를 세운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은, 고구려에서 '구'자를 뺀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나라 이름인 고려를 그대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호 문제에 대해서 학계에서 공식적인 논의가 있어야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직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공부 좀 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광개토대왕릉비 한글 안내문입니다. 좌측에는 일본어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오른쪽의 마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표시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글 표기법이 틀린 곳이 많습니다. 보의희 → 진(동진)의희의 잘못, 넓이 → 너비, 고구려 건국신학 → 고구려 건국신화, 학인 → 확인, >
 

 <광개토대왕릉비. 방탄유리에 쌓여 우람한 모양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기상이 새장에 갇힌 듯 했습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보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저만이 아닐 듯싶습니다. 다른 좋은 보존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면이라도 통유리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리창 뒤쪽 사람들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그 크기가 얼마쯤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호태왕비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을 호태왕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살펴보다가 일행중 한 분이 우연히 '태왕'이라는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서교수로부터 '태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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