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50_0010_0130


호산산성; 호산유지 (虎山山城; 虎山遺址)


형태사항 : 둘레 약 1,200m 

출토지 : 요녕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호산진 호산촌(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虎山鎭 虎山村)



https://goo.gl/maps/K7MXKReWAHbVyxQ66 https://goo.gl/maps/wgbqkJJowUbjux6q9 https://bit.ly/39hHPQb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90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10월~12월 하순 조사 진행.
1차 발굴. 장성의 동단기점의 대지(臺址; 편호 1호 대지)와 그것과 연접한 호산의 남쪽기슭으로 뻗어있는 산상의 장성 벽체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였음. 그 뿐만 아니라 또 1호대지 뒤의 아래쪽에서 거대한 석축 우물을 발견하였음. 우물의 규모가 거대하여서 이 발굴은 12월 하순까지 진행되었으나 호산 남쪽 기슭, 압록강변의 기온이 비교적 높은 특수한 지리환경임에도 땅이 얼고, 발굴 작업이 매우 거대하여 발견된 잔존 우물벽에 대한 정리로 그치고, 재차 발굴을 진행을 하지 못하였음.
1991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9월~12월 31일 조사 진행.
2차 발굴. 이번 2차 발굴에서 호산의 북면까지 뻗어있는 각 구간의 장성의 벽체와 봉화대 등에 대한 발굴은 제외되었음. 작년(1990년) 발견한 잔존 우물벽에 대해 발굴을 진행하지 못한 부분과 거대 우물의 발굴을 진행함. 우물 내부에 함몰된 흙을 정리하느라고 실제적인 발굴은 11월에 진행됨. 이 시기는 기후가 이미 한랭해져 땅이 얼고 지표의 토층에 얼음이 얼어서, (잔존 우물벽은 이미 지표하 12m에 위치함) 흙벼랑 가장자리가 항시 돌 혹은 흙덩이가 무너지거나 또 깊이를 약간만 파고 들어가도 토층이 분열되어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발굴 조건아래서, 발굴을 진행하였음. 우물내 잠수층, 즉 지하수위가 겨울철에는 비교적 낮아 쉽게 발굴할 수 있어 잠수층에 대한 발굴을 먼저 진행하였는데, 발굴 결과 우물은 규모가 거대하고 깊은 유물임이 증명됨. 우물의 내벽 직경은 4.4m, 우물 바닥은 지표에서 깊이가 23m에 달함. 우물 내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그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보존상태가 완전한 중요한 유물을 발견하였음(출토유물 부분 참조).
1992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9월 중순~12월 하순 조사 진행.
3차 발굴. 주요 발굴 대상은 우물의 구조임. 이번 발굴에서 제거한 흙의 양은 매우 많았는데, 그 범위는 동서 길이 50m, 남북 너비 20m 정도였음. 우물 입구는 두께가 12m에 달하는 토층을 전부 제거한 후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우물 뒷 부분(後部)의 윗 방향(上方)에, 원형의 돌을 쌓은 정대(井臺)가 드러남. 이는 당시 우물을 사용하던 시기의 원래 지표임. 그 북쪽에 호산상의 물을 차단하고 흙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긴 벽(長墻)을 축조하였으며, 우물 둘레를 돌로 쌓아 반원형의 배수구(排水溝)를 둘렀으며, 또 물을 길어 산위로 왕래하기 위해 2개의 석대(石臺) 계단 등을 축조하였음. 우물 내구(內口)의 직경은 4.4m, 그 바깥 부분에 돌로 타원형의 우물벽을 쌓았음. 우물 내구(內口)의 가장자리에서 외위 가장자리까지의 두께는 남쪽이 12m. 동쪽이 17m, 서쪽은 13m인데 전체 우물의 직경은 동서 길이가 35m에 달함. 우물 벽의 외연(外緣)은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가지런하고 견고함. 그 밖에 우물벽 외연(外緣)을 너비 2m인 구조(溝槽)로 한 줄 둘렀는데, 조(槽) 가운데는 가는 모래와 강자갈로 채웠음. 이는 물의 여과층임. 우물의 규모는 아주 거대한데, 우물 통내(筒內) 직경, 우물벽의 두터운 정도, 우물의 깊이 이 모든 것이 보기 드문 경우이고, 아울러 기타 건축시설을 깔아 구조가 복잡함. 공정이 정밀하고 돌로 쌓은 각각의 덩어리도 모두 평범하지 않으며, 서로 맞물려있고 엉성하지 않음. 축조 당시 왕성한 지하수를 극복하고 이 정도로 축조하였다는 것은 그 건축기술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음. 이 우물은 지금까지 보존상태가 완전하여,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최대 우물임.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거형 고정(巨型 古井)은 잘 다듬은 규정적인 쐐기형돌로 우물벽과 관련 건축물을 축조하였으며 출토유물이 드러내는 특징으로 보아, 모두가 고구려가 남겨놓은 흔적임을 설명해줌.
1993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10월 상순~12월 중순 조사 진행.
4차 발굴. 주요 발굴 목적은 호산에 고구려성터의 유무 문제를 해결하고 게시하는 것이었음. 호산위와 아래 남쪽에서 압록강변의 평지까지, 성벽 유적을 찾아 그 범위에 일반적인 트렌치를 파는 것임. 그 분포는 산위와 아래에 종횡으로 너비 1m, 길이 10m에서 100m로 같지 않게 교란(錯落)해 있었음. 깊이는 모두 토층상에 1m에서 3m 정도 고르지 않았음. 트렌치는 사실상 호산상에 혹은 산아래 평지에 성벽 유적 혹은 성내 건물지가 존재하는 곳에만 합리적으로 배열했음.
발굴결과, 산 정상부와 산아래 평지에서 모두 건물지와 유물이 발견되었음. 호산상의 북면 정부(頂部) 가장자리(변연)에, 무성한 초목의 토층하부에서 동일한 쐐기형 돌로 구성된 석축성벽을 발견하였음. 산상의 석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는데 벽체는 현재 단속적으로 남아있음. 산 둘레의 반바퀴 길이는 600m에 달함. 어떤 구간의 성벽은 상당할 정도로 완전한데, 제 6구간의 성벽은 너비가 3.5m, 잔고 1.75m, 제7구간의 성벽은 매우 뚜렷함.
호산산성의 구조와 성돌의 특징에 근거해 고구려산성임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으며, 성벽내외 양면은 모두 정밀하게 다듬은 쐐기형 돌로 축조하였고 벽체 내부는 자연석괴로 채웠는데 이러한 종류의 쐐기형 돌은 고구려의 성곽 축조에 보이는 특징임. 이런 이유로 호산산성의 시기 등을 확정할 수 있음.
호산 정상의 남부 가장자리에서는 발굴결과 성벽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음. 호산의 동단, 그 아래는 압록강에 잇닿아 있고 가파르며 암석 석벽이 서 있는 산 입구에 석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나머지는 모두 산의 험요함을 이용해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음. 호산 남쪽의 평지상에, 비교적 광활하고 평탄한 곳에 트렌치를 설치하고, 토층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성벽은 발견되지 않았음. 특별히 남부에는 성벽이 있을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한 덩어리의 성돌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완전히 진흙토층이었음. 북부에 가까운 산 아래에 석괴가 있으나 성벽이 아니며 거주 유적의 잔존 현상으로 이해됨.
발굴을 통해 호산 정상 북면 가장자리에서 성벽을 발견한 것을 제외하면, 산상의 남면 가장자리에는 성벽이 축조되지 않았으며, 이는 호산 정상에 완전한 형태의 산성을 축조하지 않았음을 설명해줌. 이러한 형태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호산은 동서방향의 독립적으로 돌출해 있는 협착한 한 줄기 산등성이여서 비교적 넓은 산정은 없으며, 또 광활한 산골짜기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고 활동할 공간을 제공해 주지 못함. 이 때문에 산상에 산정을 둘러 감싸는 성벽을 축조할 수가 없음. 그러므로 그 남쪽의 성벽은 반드시 남쪽의 산 아래 평지상에 축조할 수 밖에 없음. 무슨 목적으로 이런 고려를 하였을까? 석축의 거대 우물을 남쪽의 산 아래 평지상에 축조한 까닭은, 만일 남쪽의 성벽을 산아래 평지상에 축조하지 않았다면, 우물은 곧 성내에 포괄될 수 없으며, 이는 곧 성내에 용수를 제공하려는 것이 본래의 의도이기 때문임. 이는 호산 자체의 크기를 고려해, 성내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임. 성벽을 남쪽의 평지상에 축조하면 앞쪽에는 수심이 깊고 광활한 압록강이 위치하게 되고, 호산 자체가 천험의 요지인 이곳에 성을 축조하는 것이 되어 주요 충적지를 공제하기 좋으므로 군사방어상 가장 선봉적인 지리위치임.
1990-1993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단동시의 압록강 관광 자원을 개발에 부응해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연구원 馮永謙)는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 판공실(주임 任鴻魁)과 고고팀을 구성해, 1990
~1993년 4년 연속 호산산성에 대한 조사와 고고발굴을 진행하였음.
명대 만리장성 동단 기점 유적을 발견, 유적의 하부에서 대규모의 고구려 유적을 발견, 대량의 유물을 출토하였음. 풍영겸·임홍괴(馮永謙·任鴻魁)가 1993년 「寬甸虎山獲重大發現」『中國文物報』을 발표함.
세부 발굴 경위는 풍영겸(馮永謙)의 1997년 「高句麗泊汋城址的發現與考證」『北方史地硏究』을 통해 알 수 있음.
1990년부터 고고조사팀은 명대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 유적을 발견한 뒤, 국가문물국의 비준을 얻어 필자(馮永謙)의 영도하에 4년 연속 관전현 호산산성에 대한 고고발굴을 진행하였음. 그 결과 명대 장성의 동단기점의 구체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또 고구려 유적을 발견하여, 산 정상의 산성 1기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였음. 이 산성에 대하여 발굴현장의 관찰과 분석 비판 및 문헌기재와 결합하여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이는 고구려산성인 박작성인 것으로 추정됨.



구조특징

호산의 북면 정상부 가장자리에, 초목이 무성하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데, 그 토층 하부에서 쐐기형돌(楔形石)을 사용하여 구축한 석축성벽이 발견되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구불구불 축조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벽체는 끊어진 부분도 있어 산 둘레의 반바퀴 정도로서 길이는 600여 m임. 어떤 구간은 성벽이 상당히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음. 이에 근거해 호산 산성의 둘레는 약 1,200m로 할 수 있음(王綿厚, 1994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 『遼海文物學刊』1994-2; 수천미터). 성벽의 안팎 양면 모두 정밀하게 가공한 삼각형의 쐐기형돌(계형석)을 쌓아 축조하였으며, 벽체의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자연 형태의 석괴를 쌓아 채운 특징을 보이므로 고구려산성으로 판단됨.

호산 정상부에 각 시대의 유물, 유적이 매우 많음. 조사와 발굴 과정에서 청동시대, 漢 대, 고구려, 요, 금, 명대 등 서로 다른 시기의 역사 유적과 각종 유물을 풍부하게 발굴함.

남문의 양측에 석벽이 남아 있는데 쐐기형돌(楔形石)으로 축조한 문 기초 아래에 수도(水道)와 수정(水井)이 있음(王綿厚, 1994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 『遼海文物學刊』1994-2). 명대의 토축성벽은 호산 남쪽 기슭, 압록강변에서 山水의 충돌과 퇴적으로 인해 가려져있던 토층 아래에서 명대의 1호 대지(臺址)를 발굴하였음. 대지는 흙을 다져 축조하였는데, 가장자리 길이 36m, 잔고 4m. 대지의 동면에 석축성벽이 접속해 있는데, 굽이 굽이 이어져 호산과 연결되어 있음. 현재 성벽은 비록 많이 무너졌으나 토층 아래에 단속적이나마 석벽의 기초가 남아있는데 가장 높은 곳은 1m에 달함. 어떤 곳은 잔고 2m, 너비 5m가 남아있는 구간(地段)도 있음. 성벽 내 남면에서 산상까지 축조, 또 북쪽 비탈 아래의 산을 지나 비교적 낮은 산언덕까지 축조하였고 그 뒤로 완연하게 북쪽으로 이어져 북부의 관전과 봉성의 경계선까지 이어져있음. 토축성벽의 길이는 560m에 달하며, 2기의 전대지(戰臺址)와 3기 봉화대 및 차단벽(攔馬墻)이 있음.

고구려시기 석축성벽은 제4차 발굴과정에 토축성벽중에서 석축성벽을 발견함. 호산을 둘러싼 1,000m 길이의 발굴 구역중에서 석축벽체 500여m가 드러남. 성벽내외 양측 벽면 모두 고구려의 특징적인 쐐기형돌로 쌓아 축조하였고 가지런하고 정연하며, 중간은 자연석괴로 채워쌓았음.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벽체 너비는 3.5m, 잔고 1.75m.

청동기 시대, 한대(漢代), 고구려, 요, 금, 명대의 유물이 출토됨. 우물 내 출토유물은 길이 약 3.7m에 달하는 목선(木船)과 목제노(木槳), 삿대(鐵頭木篙), 통(木桶), 구유(木槽), 목제완(木碗), 자작나무통(樺樹皮桶), 널빤지(木揷板), 목제받침막대(木座杆), 바가지(葫芦瓢), 갈대자리(葦席), 철제저울추(鐵錘), 철제갈고리(鐵二齒鉤), 회색단지(灰陶罐), 손잡이 2개 달린 큰항아리(雙橫耳大陶罐) 및 각종 규격이 동일하지 않은 새끼줄(繩索) 등이 있음.

고구려시기 석축성벽 출토 유물은 찰갑편(鐵甲片), 화살촉(鐵镞), 투겁창(鐵矛), 쇠단지(環耳鐵罐), 솥(直口鐵鍋), 거울(鐵鏡), 가래날(鐵揷), 도끼(鐵斧), 저울추(鐵錘), 철천(鐵穿), 낫(鐵鐮), 삿대(鐵篙頭), 철제량(鐵提梁), 허리띠 걸쇠(鐵帶卡) 열쇠(鐵钥匙) 등과 같은 각종 철기류들이 있음.

 
역사적 의미
 
산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음. 첫째, 압록강 하구 방어의 중심성인 고구려 박작성설임(馮永謙, 1997 「高句麗泊汋城址的發現與考證」『北方史地硏究』).

호산 고구려산성은 이전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한 곳이었지만 문헌 기재에 근거해 이 곳 성지는 오랫동안 확실한 지점을 알지 못했던 고구려 역사상에 저명한 산성인 박작성으로 추정됨. 이 성은 애하(靉河)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독립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음. 애하첨고성과 함께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형태를 보임.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호산산성은 박작성으로 비정됨. 박작성은 가탐(賈眈)이 남긴 『道里記』에도 압록강 연안의 중요 지명으로 등장하고 있음. 박작성의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가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차지한 것은 3세기경임. 그런데 서안평현성은 현재의 애하첨고성(靉河尖古城)이고, 박작성인 호산산성의 축조는 후대일 것임. 호산산성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충성임. 강 건너편이 의주이고, 의주의 통군정이 바로 보임. 의주의 백마산성과 함께 압록강 방어의 중심성으로 기능하였음.

둘째, 명대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설임(馮永謙, 1992 「明萬里長城東端起點的發現與硏究」『歷史地理』10, 上海人民出版社).

호산의 북쪽은 명대의 장성이 시작하고 있는데, 호산 정상을 통과하는 장성의 장대 기단은 고구려산성의 성벽을 이용한 것이 확인되었음. 고구려 호산산성은 호산의 남쪽의 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모를 알 수 없음. 648년에 당 태종이 설만철(薛萬徹)과 배행방(裴行方)으로 하여금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음. 이들은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음.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배행방(裴行方)의 공격으로 패퇴하였음. 당군이 박작성을 포위하였으나, 지형이 험준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음. 고구려의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성과 안시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설만철(薛萬徹)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여 무너졌음. 호산산성의 우물에서는 고구려 유일의 배가 출토된 바가 있음.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우물을 메워버리고, 고구려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함. 그 대신 호산산성을 명나라 천리장성 동쪽 끝 기점으로 보고, 여기에 최근 중국식 장성을 세워서 관광지로 만들고 있음. 현재 호산산성의 북쪽에 중국 명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음.

 
자연환경

요녕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호산진 호산촌 호산(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虎山鎭 虎山村 虎山)의 정상에 위치. 단동시 동북 10㎞ 거리로서 애하(靉河)와 압록강이 합쳐지는 곳의 호산에 위치. 호산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가까이 있고, 서쪽으로는 애하(靉河), 북쪽으로 호산진(虎山鎭)과 접하며, 서쪽으로 단동시와 15㎞ 떨어져 있음. 이 곳은 평지에서 돌출한 독립 구릉(孤山)이어서 멀리서 바라볼 때 산의 형태가 범 모양인데다 평지상에 누워 업드려 있는 한 마리의 맹호와 같아서 호산(虎山)이라는 명칭이 생겼음. 호산진(虎山鎭), 호산촌(虎山村)의 명칭도 이로 인해 생겨난 것임.

호산은 해발 146.3m. 동서 길이 1,000m, 남북 너비 500m. 호산을 둘러싼 사면은 가파르고, 꼭대기 부분은 비교적 평탄함.


유물정보

목선(木船) 1점, 목제노(木槳) 1점, 삿대(鐵頭木篙) 1점, 통(木桶) 1점, 구유(木槽) 1점, 목제완(木碗) 1점, 자작나무통(樺樹皮桶) 1점, 널빤지(木揷板) 1점, 목제받침막대(木座杆) 1점, 바가지(葫芦瓢) 1점, 갈대자리(葦席) 1점, 철추(鐵錘) 2점, 철제갈고리(鐵二齒鉤) 1점, 회도관(灰陶罐) 1점, 쌍횡이대도관(雙橫耳大陶罐) 1점, 새끼줄(繩索) 1점, 철갑편(鐵甲片) 1점, 철촉(鐵镞) 1점, 철모(鐵矛) 1점, 쇠단지(環耳鐵罐) 1점, 직구철솥(直口鐵鍋) 1점, 철경(鐵鏡) 1점, 철삽(鐵揷) 1점, 철부(鐵斧) 1점, 철천(鐵穿) 1점, 철겸(鐵鐮) 1점, 삿대(鐵篙頭) 1점, 철제량(鐵提梁) 1점, 허리띠걸쇠(鐵帶卡) 1점, 열쇠(鐵钥匙) 1점

 
참고문헌

·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釋文匯編』 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 馮永謙, 「丹東虎山高句麗遺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92
· 馮永謙, 「明萬里長城東端起點的發現與硏究」『歷史地理』 10, 上海人民出版社, 1992
· 馮永謙·任鴻魁, 「寬甸虎山獲重大發現」『中國文物報』, 1993
· 袁輝, 「泊汋口位置考」『北方文物』 1993-2, 1993
· 任鴻魁, 「泊汋城方位考述」『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馮永謙, 「高句麗泊汋城址的發現與考證」『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7
· 遼寧省地方志編纂委員會辦公室, 『遼寧省志』 (文物志), 遼寧人民出版社, 2001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합이빈출판사, 2002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王禹浪·王文軼·王宏北, 「遼東半島高句麗山城槪述」『黑龍江民族叢刊』 2010-2, 2010
· 王禹浪·王文軼, 「丹東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2-3, 2012
· 王連春, 「丹東市區的高句麗山城」『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隨唐(二), 北京出版社, 1996



관전 호산산성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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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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