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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미성 위치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 만에야 함락시켰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원년(391)

 

태왕이 쳐서 함락시킨 백제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 관미성은 『능비』에서 말하는 각미성(閣彌城)이다. 태왕의 정벌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어디인지를 확실히 짚을 수가 없다. 기존의 학설은 조선조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를 따라 오늘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의 오두산성이라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꼭 정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북한의 박시형은 지금 북한의 예성강 하구 지역에 있었다고도 했다.) 그 뭐냐, <고구려 해양사 연구> 쓰신 분이(뗏목 자주 타신 분) 오두산성 지역을 여러 번 답사를 하셨단다. 고구려 기와도 많이 나오고, 전략적 가치도 뛰어난 곳으로 고구려 산성임에는 틀림없는데, 이 성에는 임진강 하구를 이용하는 적을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예성강 하구를 통해 내려오거나 수군을 경기만 이북에서부터 진주시켜 내려오게 되면 방어력을 상실한다는 결함이 있다고. 게다가 예성강 남쪽과 임진강 사이에 있는 내륙과 해안을 유기적으로 써먹는 방어망은 구축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이미 임진강이 아닌 예성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국경선에서는 오두산성은 자체의 방어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보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의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바닷물이라는 천연의 해자를 갖고 있었다는 관미성의 주변지형상, 관미성은 내륙이 아니라 강 하구의 해안가나 섬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강의 수계와 직접 연관되고, 고구려의 바닷길을 통한 접근을 폭넓게 차단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디가 적합할까. 북한의 손영종은 개풍군에 있는 백마산 부근을 관미성으로 추정했는데,이곳도 강화 북부 양사면 대안에 위치한 요충지이긴 해도 강화도 내륙의 움직임이나 강화도 바깥쪽 해상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탐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후보는 지금의 김포반도와 강화도, 개풍군이 마주하고 있는 김포반도의 동북쪽이 훨씬 가능성이 있겠다. 혹시 지금처럼 둥글둥글하게 개척되기 전의 리아스식 해안처럼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갖고 있던 강화도의 교동도가 관미성이었던가? 나는 모르니 말하지 않는다.

 

왕이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수군을 동원해야 했다. 따로 해자를 파지도 않고, 드넓은 바다 그 자체를 해자로 삼았으니, 사람을 꺾으려면 먼저 자연을 꺾어야 하는 곳이 바로 이 관미성이었다. 바다와 싸우고 산과 싸우기 위해 담덕왕은수륙 양동작전을 펼쳤고, 전군을 일곱으로 나누어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압박해왔다. 그리고 20일만에, 관미성은 함락당한다.(어쨌거나 이곳이 엄청난 대역사의 현장이라고 하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를터.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이곳의 주변 지리를 죽 한번 둘러봤으면 좋겠는데....)




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7648355http://tadream.tistory.com/585 

아신왕의 관미성 수복 실패

한성별궁에서 태어날 때 이미 오색의 기운이 궁 안에 서리는 등 태어날 때부터 신령한 조짐을 보였다는 아신왕. 숙부에게 찬탈당했던 왕위를 되찾아 한창 끓어오르는 정치욕심에 덧붙여, 이 무렵 백제의 주적이었던 고구려에게 설욕하고 백제의 위상을 되살리겠다는 강한 의지에 불타있던 왕은 우선적으로 백제가 관미성을 잃으면서 고구려에게 빼앗기다시피한 해양에서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방 경영의 중요한 전초기지 관미성을 꼭 되찾지 않으면 안되었기에(더구나 관미성을 놔두고 북쪽으로 계속 가면 후방을 위협당할 소지가 있다) 자신의 외숙부이자 좌장(佐將)이었던 진무(眞武)를 부른다.(※원래는 '왼쪽'을 뜻하는 '좌左'이지만 <새로 쓰는 백제사>에 의거해 '보좌한다'는 뜻의 '좌佐'로 고쳐썼음)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2년(392)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이 무렵 백제에는 진사왕의 아우 아신(아화)이 즉위해 있었다. 침류왕의 원자이면서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울분을 삭혀오다가, 진사왕이 고구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지지를 잃게 되자, 그것을 빌미로 구원행궁에 사냥나간 진사왕을 살해한 것이다. 

 

한성별궁에서 태어날 때 이미 오색의 기운이 궁 안에 서리는 등 태어날 때부터 신령한 조짐을 보였다는 아신왕. 숙부에게 찬탈당했던 왕위를 되찾아 한창 끓어오르는 정치욕심에 덧붙여, 이 무렵 백제의 주적이었던 고구려에게 설욕하고 백제의 위상을 되살리겠다는 강한 의지에 불타있던 왕은 우선적으로 백제가 관미성을 잃으면서 고구려에게 빼앗기다시피한 해양에서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방 경영의 중요한 전초기지 관미성을 꼭 되찾지 않으면 안되었기에(더구나 관미성을 놔두고 북쪽으로 계속 가면 후방을 위협당할 소지가 있다) 자신의 외숙부이자 좌장(佐將)이었던 진무(眞武)를 부른다.(※원래는 '왼쪽'을 뜻하는 '좌左'이지만 <새로 쓰는 백제사>에 의거해 '보좌한다'는 뜻의 '좌佐'로 고쳐썼음)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가을 8월에 왕이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설욕하라.”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아신왕 원년(392)

 

이 기록은 《백제본기》에서 원래 아신왕 2년(393)의 일이라고 적었지만 여기서는 고구려본기의 기년에 맞춰서 1년 앞당겨 392년으로 적었다.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고 기록한 진무. 조카이자 어라하(국왕)인 아신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빼앗긴 관미성을 되찾고자, 군사 1만을 내어 관미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아신왕 원년(392)

 

하지만 실패했다. 백제 아신왕의 관미성 탈환전은. 《삼국사》에서 전하는 바, 관미성 탈환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고구려의 수성전과 군량 수송의 문제에 있었다고 했다. 고구려 사람들 성 잘 지키는 거야 다 아는 사실인데, 군량 수송이 안 됐다ㅡ후방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설마 태왕이 후방으로 군사를 보내서 백제의 군량수송을 끊어버린 걸까?


....

한편 관미성 탈환에 실패한 백제는 곧장 관미성을 우회해서, 평양의 코앞인 수곡성으로 직행해 들어왔다. 일찌기 백제의 태자가 이르렀던 그곳이었다.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3년(393) 가을 7월에 백제가 쳐들어왔다.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은 밤에 도망쳤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이것을 백제본기는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水谷城) 밑에서 싸워 패하였다[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고 적고 아신왕 3년(394)의 일로 기록했다.(여기서는 마땅히 아신왕 2년(393)의 일로 끌어올려 적었다.) 서해의 관미성(강화도)이 수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백제가 그 관미성을 제치고 황해도에 있는 수곡성(신계)을 질러 공격한 것은 일단 관미성은 놔두고 북쪽부터 먼저 친 다음에 관미성을 감싸서 되찾는다고 하는. 백제의 외통수였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위도상 수곡성은 관미성보다는 훨씬 더 위에 있다. 후방 연결이 안 돼서 관미성 탈환에 실패했던 백제다. 수곡성을 치게 되면 관미성에 있는 고구려군에게 배후를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데도 그런 무모한 작전을 펼친 이유는 이제 와서는 알기 어렵다.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전장이었던 한수(한강) 이북과 패수(예성강) 사이의 전선은 아직 불확실했다. 백제도 고구려도 모두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기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이었고, 관미성이라는 이 성이 지리적으로 봐서 백제의 최북변에 있던 건 아니다보니(안 그랬으면 백제군이 관미성을 후방에 두고 수곡성까지 치고 올라갈 리가 없으니까) 이 안에서는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막 뒤섞여서 혼전을 벌이는 판국이 됐다.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3년(393)

 

백제의 이러한 '외통수'가 고구려에게 살짝 위협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수곡성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막아낸 고구려는 바로 다음 달에 변경에 백제를 막기 위한 일곱 요새를 만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황해도 방면에 있었다. 태왕은 이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구역 편제, 나아가 황해도 남부 해안 지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백제 수군을 막기 위해서도 축성은 필요했다.


황해도 남부 해안 지대에는 배천 치악산성이나 연안 봉세산성, 해주 수양산성, 옹진 고성 같은 고구려 산성들이 많이 있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성들도 여럿 있는데, 최창빈이라는 학자는 그 성들을 모두 고구려 때에 7성을 쌓으면서 방어성으로 함께 쌓았다고 했다. 일종의 해양방어기지인 셈이다. 수양산성이 있는 해주도 고구려 때에는 내미홀(內未忽)이라고 불렸는데(고려 방언으로 '바다'는 '내미內未'였는데 이 단어는 훗날 일본어 '나미'의 어원이 됐다) 다른 이름으로는 지성(池城)이나 장지(長池)라고도 했다. 치악산성은 치양산성이라고 해서 고구려 때에는 도랍현이라고도 불렸던 배천에 있고, 예성강에서 봐서 가장 전방에 있는 성으로서 한성으로 가장 빨리 진격할 수 있는 곳이다. 연안은 고구려 때에는 동음홀(冬音忽), 또는 시염성이라고도 불렸던 곳으로 황해도 남부 지역의 중심지다.

 

이들 국남 7성에 남평양이 있는 장수산성(신원)과 성황산성(태백산성)이 있는 평산(고구려 다지홀), 고구려 때의 옹천이었던 옹진현이 백제와의 해안 접경지대를 방어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수곡성이 공격당한 바로 다음에 담덕왕이 국남7성을 쌓았다는 것은 후방에서 칼날을 들이댈 소지가 다분한 관미성을 두고 모험을 감행한 백제에 적극적으로 맞서기 위한 보다 강력한 방어책이었다. 백제에 대한 좀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공세를 감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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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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