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주간조선 1999.11.4 /1576호 
 
고구려 정복로 1만 3천리를 가다 3 
장수왕군이 달렸던 동몽골 대초원…곳곳에 고려성 뜻하는 '까오리청'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입구를 통해 보이는 바깥 세상의 모습을 세상의 전부인 양 오해하는 편향된 시각을 우리는 흔히 '동굴의 우상'이라고 한다. 중국 동북지역 지도는 우리를 늘 이런 편견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한반도의 역사를 움츠러들게 했다.
 

▲ 한가로이 풀을 뜯는 대싱안링의 양떼들. 대싱안링은 험준한 산맥이 아니라 거대한 평원이었다.

중국 동북평원의 왼쪽에는 거대한 산맥 대싱안링(대흥안령)이 남북으로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남북 1200km, 동서로 400km에 이르는 이 공룡 산맥은 크기가 한반도와 거의 비슷하다. 그 너머로는 동몽골 초원과 몽골 고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지도상으로만 보면 대싱안링 산맥은 그 건너편의 유목민족과 만주 쪽의 수렵·농경 민족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장벽으로 보인다. 바람이나 공기도 이 산맥을 넘어 서로 오가지 못할 것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역사가들에게 대싱안링 산맥은 늘상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우상'처럼 군림해왔다. 고구려군이 이 거대한 산맥을 넘었다는 뚜렷한 역사기록마저도 이 '우상' 앞에서는 무력해지곤 했다. 중국측 사서인 구당서는 장수왕 60년 (479년) 고구려군이 대싱안링 건너편에 있는 지두우라는 풍요로운 초원국가를 유연과 나눠 갖기로 모의했으며 거란이 고구려군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했다고 쓰고 있다.

이번 답사단의 서영수 교수는 "거란이 고구려군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는 것으로 봐서 실제 장수왕의 군대는 대싱안링을 넘어 지두우를 정복했으며 거란의 기반도 어느 정도 붕괴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4세기 후반 중국 동북부의 국제정세는 나중에 돌궐로 불리는 유연의 유목 민족 국가와 동북의 패자로 등장한 고구려, 중원의 북위가 정립한 형세였다. 어느 누구도 무시하기 어려운 삼각의 형세에서 두 강대국이 지두우라는 조그만 유목 부족을 분할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 교수의 설명은 이어졌다.

"고구려나 유연 모두 성장하는 제국들이어서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말이 풍부한 지두우를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다. 말은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는다. 지두우는 중가리아 분지와 함께 중국 변방의 2대 말 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양국은 직접 충돌을 피하면서 말 공급기지 확보라는 실리를 거두고 이곳을 양국의 완충지대로 설정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답사단은 지도가 만들어내는 '우상'과 사서 기록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대싱안링을 한번 넘어보기로 했다.
 

▲ 동몽골 초원의 유전도시 시린호터 부근에는 지상에서 10여m만 파고 들어가도 기름이 펑펑 솟구치는 유정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지난 6월 24일 밤 답사단이 탄 마이크로버스는 대싱안링의 관문도시인 울란호터(오란호특)를 향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공사중인 비포장도로는 시속 30km 이상 속도를 올리기 힘들었다. 고구려 전성기의 북쪽 요새였던 지린(길림)시 용담산성을 출발한 답사단은 눙안(농안), 다안(대안) 등을 거쳐 이곳까지 하루 종일 달려왔다. 거리상으로는 불과 320km. 하지만 내몽골의 비포장도로는 답사단의 발목을 지루하게 잡아댔다.

요나라 때 황룡부가 있었던 눙안은 초원민족과 농경·수렵민족 간의 교역 중심지로 꼽히는 곳이었다. 너른 초원 한가운데 갑자가 우뚝 솟아오른 이곳에는 아직도 요나라 때의 토성 흔적이 도시 변두리에 남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성을 현지인들은 '까오리청(고려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스스로를 부른 국호가 고려니까 까오리청이란 곧 고구려성을 의미하는 것. 이곳에서부터 대싱안링 산록 일대에는 현지인들이 까오리청이라고 부르는 성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눙안의 요나라 고성은 그 시작을 알리는 셈이었다.

다안을 거치면서 풍경은 달라졌다. 짙푸른 녹색의 초지들이 듬성듬성 이어지면서 대초원의 초입으로 들어섰다.
   

▲ 장수왕의 지두우 정복로 

밤 9시를 넘어 울란호터로 넘어 들어가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갈 무렵, 대싱안링은 진기한 장면으로 우리를 환영했다. 마른 번개가 대싱안링의 검은 능선 위로 불꽃놀이를 시작한 것. 야수의 포효처럼 으르릉거리는 소리 뒤로 능선을 비추는 연노란 불빛이 능선 이곳저곳에서 불타올랐다. 1시간 이상 계속된 이 자연의 쇼에 답사단은 잠시 피로를 잊었다.

'붉은 도시' 울란호터. 내몽골자치주 동쪽 대싱안링 산록의 대표적 도시인 이곳은 동북만주에서 동몽골 초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내외곽 곳곳에 고성들이 많이 분포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답사단은 내몽골자치주가 편찬한 현지 지도와 일제 시대에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위해 이곳을 현지 답사한 러시아 학자 렐리제프의 보고서 등을 통해 답사루트를 짜놓고 있었다. 꾸청촌(고성촌), 꾸디샹(고적향), 샤오청즈(소성자) 등 이름만 들어도 역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 도시 주변의 고적들은 불어닥치는 개발의 바람 속에서도 그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렐리제프가 1920년대에 '까오리청'이라는 주민들의 말을 들었다고 기록한 고성들은 지금도 여전히 '까오리청'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답사단이 기대하듯 그곳이 명쾌하게 고구려성이라고 하기에는 근거를 찾기가 힘들었다.

"최소한 요나라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데…" "당나라 때 동전이 나왔다는데…" 답사단원들은 끊임없이 그 땅을 한번 발굴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다. 주민들에 따르면 중국의 문화재당국은 발굴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지 조사 정도는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관광비자만을 소지한 우리 답사단이 자칫 땅이라도 팠다간 도굴 혐의로 몰릴 판이다. "지표면에서 3∼4cm 이상만 파고 들어가면 도굴"이라고 중국 현지사정에 밝은 고고학자가 일침을 놓았다.
 

▲ 노을이 지는 대싱안링 정상 부근의 신지엔(新建) 마을. 마을 사람들이 마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울란호터 인근의 빠라커타이진 치지아(제가)둔에 있는 한 이름없는 고성은 답사단의 머리 속에 두고두고 남았다. 치(제)가 성씨들만 산다는 해서 치지아둔으로 불리는 이 마을 뒷동산 베이산(북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성이었는데 고구려성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서쪽을 향해 간아지른 듯한 절벽, 그 아래를 흐르는 해자, 성 안에서 발견된 돌절구… . 비록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금나라 양식이었지만 군사기지란 왕조를 건너뛰어도 그대로 활용되는 법. 이곳을 발굴하면 고구려인들의 흔적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반유목을 하는 요나라 사람들은 결코 이런 산지성을 쌓지 않는다"고 한 답사단원이 말했다. 그들은 여차하면 도주하기 쉽게 성을 쌓아도 평지성만 쌓는다는 설명이었다.

어쨌든 이런 흔적들은 이 일대가 유목민족과 수렵·농경 민족이 만나는 접점이었으며 대싱안링을 넘어 왕래가 잦았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 옛날 장수왕이 보낸 정복군도 이 즈음에서 말의 목을 축이고 군사를 쉬게 한 뒤 대싱안링 등정길에 올랐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했다.

대싱안링으로 접어들어 수백마리의 양떼들이 지프가 달려오는 서슬에 황급히 달아나는 초원 풍경은 이국적이었다. 산 입구에서 잠시 만난 폭우가 그치자 면도한듯 가지런한 풀로 뒤덮여 있는 대싱안링의 산봉우리들이 엷은 갈색에서 연두색으로 변하는 장관이 연출됐다. 마치 잘 다듬은 천연 골프장을 보는 듯했다.
 

▲ 치지아둔 베이산에 남아있는 까오리청(高麗城) 흔적. 이 성안에서 돌절구가 발견됐다.

대싱안링을 향해 달린지 5∼6시간. 답사단은 묘한 느낌에 휩싸였다. 거대한 산맥이라곤 하지만 멀리서나 산으로 보일 뿐 가까이 다가가면 산은 사라져 버리고 초원만 남았다. 대싱안링의 최고봉은 시랴오허의 발원지 부근에 있는 황장량(황강량)으로 해발 2029m.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 폭 400km로 완만하게 퍼져 있다보니 멀리서 웅장해보이던 산도 가까이 가면 모두 나즈막한 고원의 평원으로 다가왔다.

빗물에 젖어 차 바퀴를 끊임없이 붙잡는 진흙탕길과 악전고투한 끝에 도착한 정상부도 마찬가지였다. 나즈막한 연봉 사이로 폭이 2∼3km나 되는 넓직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지도만 보면 험준한 고봉들이 즐비해야 할 이곳에 우마군양이 한가로이 뛰노는 초원 풍경이라니! 5만∼10만명쯤 되는 고구려 대군이 줄지어 통과하더라도 10여분이면 모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한 공간이었다.
 
2박 3일, 10여차례나 초원의 진흙탕 길에 차가 빠져 밀고 당기는 소동을 벌인 끝에 답사단은 동몽골 초원의 입구인 우라까이(오납개)로 빠져 나왔다. "만약 이 길을 말로 달렸다면…" 차가 진흙탕에 빠질 때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말이라면 이런 물구덩이에 구애받지 않고 이곳을 하루만에 주파할 수 있었을 텐데." 현대 문명의 이기를 갖췄다는 답사단보다 고구려 기병들은 훨씬 빠른 속도로 이곳을 지나 동몽골 초원을 향해 내달렸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과연 풍요로운 초원이 있었다. 6월 29일 오후 늦게 답사단은 지두우의 본거지였고 지금은 외몽골과 내몽골 간의 국경도시인 뚱우주무신치(동오주무심기)에 도착했다. 건너온 대싱안링 저쪽의 양들보다 훨씬 체구도 크고 수만마리를 헤아리는 양떼, 수백마리의 말과 소떼들이 초원지대를 실감케 했다. 가끔 호수라도 만나게 되면 호숫가에 점처럼 뿌려진 우마군양을 볼 수 있었다.
 

▲ 동몽골 초원에는 사방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몽골식 서낭당을 세워둔 곳이 많다. 사진은 시린호터 부근에서 우연히 발견한 서낭당.

그곳에서 남쪽으로 250km 떨어진 시린호터(석림호특)에 이르기까지 이런 풍경은 질리도록 보게 되었다. 랴오닝성에서는 시골에서도 1∼2km만 달리면 새로운 마을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 동몽골 초원에서는 보통 10∼20km를 달려야 한 채의 가옥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달려온 거리가 바로 가옥마다 소유한 수천마리의 소와 양, 말들이 풀을 뜯어먹고 사는 기름진 초원이다. 몽골식 빠오를 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검게 탄 얼굴에 적토마처럼 늘씬하게 빠진 말을 쏜살처럼 몰아가는 유목민족의 후예들은 수천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도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함께 동행한 KBS 역사스페셜팀이 "촬영을 위해 말을 몰아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자 수백마리의 말떼가 번개처럼 카메라 앞을 왔다갔다 했다. 담배 한 개피를 같이 피워 무는 우정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의 순박한 웃음을 실컷 맛볼 수 있었다.

초원의 풍요로움은 이런 우마군양에만 있지 않았다. 실린호터를 향해 먼지 날리며 달리는 초원의 흙길 양옆으로는 유정 펌프들이 숨가쁘게 석유를 뽑아내고 있었다. 실린호터가 유전도시로 내몽골자치주의 샛별로 떠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땅 위에는 풍요로운 초원이, 그 아래로는 기름진 석유까지 있으니…" 답사단원들은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한때는 고구려군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을 동몽골 초원의 모습을 아쉬움어린 눈길로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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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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