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91357
'오만한' 광개토태왕, "복종 않으면..."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광개토태왕>, 네 번째 이야기
11.07.04 11:25 ㅣ최종 업데이트 11.07.04 11:25 김종성 (qqqkim2000)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 ⓒ KBS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다. 하지만, 고구려 기마군단의 활동범주는 이보다 훨씬 더 넓었다. 특히 광개토태왕(재위 391~412년)의 경우에는 내몽골초원 깊숙이 진출해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 점을 입증하는 자료를, 고구려인들은 수도인 국내성에 남겨 놓았다.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해당하는 국내성에 남아 있는 광개토태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가 바로 그것이다.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락 5년 을미년, 왕은 패려족(稗麗族)이 사람을 ……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징토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들의 3개 부락 600~700개 영(營)을 깨뜨렸으니, 소·말과 양떼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영락 5년은 광개토태왕의 집권 5년째 되는 해로서, 서기로 치면 395년 2월 6일부터 396년 1월 26일까지다. 이 해에 스물두 살의 젊은 태왕은 유목민족인 패려족에 대한 징토를 단행했다.
패려족은 비려족 혹은 과려족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태왕 편에 거란족이 등장한다는 점을 근거로 "패려족이 거란족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피력했다.
유목민족인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은 광개토태왕 시절만 해도 '거란'이라 불리지 않았고 당시의 거란족은 모용씨나 우문씨 같은 정치세력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란'이라 불릴 만한 또 다른 선비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채호의 주장이다. 그는 중국 사료인 <위서>나 <북사> 등을 근거로, 패려족은 흉노족의 일파로서 지금의 몽골 등지에서 활약했다고 설명했다.
그럼, 태왕이 패려족에 대한 징토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왕은 패려족(稗麗族)이 사람을 …… 하지 않았기 때문에"(王以稗麗不□□人)라는 표현이다. 편의상 이것을 'A 구절'로 약칭하기로 하자.
그런데 원문의 "□□"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핵심적인 글자 2개가 지워졌기 때문에 비문 상으로는 태왕이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A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와 패려족이 이전에 어떤 관계였고 그들이 왜 전쟁상태에 돌입했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
비문에서는 "패려족(稗麗族)이 사람을 ……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왕이 징토를 결심했다고 했다. 패려족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의 공격을 초래했다. 패려족의 작위(作爲)가 아니라 부작위(不作爲)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대체 패려족은 무슨 일을 하지 않은 걸까?
▲ 내몽골초원의 모습. ⓒ 김종성
▲ 내몽골초원에서 말을 달리는 사람들. ⓒ 김종성
패려족은 무슨 일을 하지 않았을까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일반적인 양상을 생각해보면, A 구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분류하면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대관계(조공관계)를 맺은 나라들 사이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그런 관계가 없는 나라들 사이의 관계다.
사대관계가 없는 나라들 사이의 전쟁은 대개 다 어느 일방의 불법적 침공에 의해 개시된다. 다시 말해, 일방의 '작위'에 의해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다.
사대관계가 있는 나라들 간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사대관계에서 한쪽은 상국(上國)이고 다른 쪽은 신하국이며, 양쪽은 상호 권리의무를 갖고 있었다. 이런 관계에서는 어느 일방이 자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일반적 양상이었다.
다시 말해 일방의 부작위가 전쟁을 초래한 것이다.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 상국 임금을 알현해야 할 신하국이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가 상국-신하국 사이의 분쟁을 초래하는 최대 요인이었다. 예컨대, 한·중 양국 간의 전쟁은 상당부분 신하국인 한국측의 의무불이행에서 시작됐다.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던 나라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양국관계가 이미 파탄지경에 이르렀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정기적인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상국에 대한 적대감의 표시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하국의 의무불이행이 전쟁의 단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의 강대국들이 억지를 써서라도 전쟁 명분을 만들듯이, 과거 동아시아의 강대국들도 상대방의 의무불이행 같은 것을 문제 삼아 전쟁 명분을 만들곤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항상 상국이 먼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하국이 사신 파견을 거부하면서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하국이 전쟁을 선포한다 해도, 그것은 신하국의 작위(전쟁 선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국의 부작위(의무불이행)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대관계 있는 나라들 사이의 전쟁은, 누가 먼저 도발했건 간에, 기본적으로 어느 일방의 의무불이행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료에서 어느 일방의 부작위가 문제가 되어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례가 나타나면, 양쪽이 이전에 사대관계를 갖고 있었고 그런 사대관계가 파탄되었다고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출처는 중학교 <국사>. 그림 우측 상단에서 백마를 타고 지시하는 인물이 광개토태왕. ⓒ 교육과학기술부
국제관계의 일반적 패턴, 그것에 비추어보면...
이 같은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일반적 패턴으로부터 우리는 A 구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패려족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공격을 개시했다는 A 구절의 내용을 고려할 때, 우리는 패려족이 신하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이 군사행동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비문에 나오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징토하였다"라는 부분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징토'란 표현에 주목해보자. '징벌'이라 아니하고 '징토'라 한 것은 왜일까?
맹자는 <맹자> '고자' 편에서 "천자는 징토하되 징벌하지 않고, 제후는 징벌하되 징토하지 않는다"(天子討而不伐, 諸侯伐而不討)고 했다. 군사적 응징의 주체가 천자인 경우는 토(討) 즉 징토란 표현을, 그 주체가 제후인 경우는 벌(伐) 즉 징벌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토'와 '벌'을 묶어 '토벌'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두 표현을 세심하게 분리해서 사용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을 제작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토'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구려가 천자 즉 상국이고 패려족은 신하국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신하국이라고 하여 국가적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19세기말에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이 누차 천명한 바와 같이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이면서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나라였다. 또 여진족 금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든 중국의 송나라(남송) 역시 독립성과 자율성을 향유했다.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를 형식상 평등하게 취급하는 현대 서양식의 국제관계와 달리,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는 영토나 경제력 혹은 군사력에 따라 국가의 위상을 차별했다. 큰 나라는 크게 취급하고 작은 나라는 작게 취급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상국이냐 신하국이냐'는 것은 '독립국가냐 아니냐'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강한 나라냐 아니냐'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패려족이 고구려의 신하국이었다는 표현 역시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패려족에 대한 응징을 결심한 광개토태왕은 꽤 과감한 방식으로 군사행동을 단행했다. 패려족과의 국경지역을 공격해서 이를 점령하는 방식을 취한 게 아니라 패려족 영토의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가면서 쭉 훑고 나오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군사적 자신감이 없었다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방식이다. 점령이 아니라 응징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태왕의 원정군은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거쳐 염수(鹽水)까지 밀고 들어가서 3개 부락의 600~700개 영(營)을 격파한 뒤에 수많은 소·말·양떼를 빼앗았다. 고구려 원정군이 지나간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오늘날 우리의 지리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신채호의 연구성과를 빌리기로 하자.
고구려에 복종하지 않으면 살 길 끊겠다는 강력 의사 표현
신채호는 17세기 중국의 저명한 고증학자인 고염무가 편찬한 <수문비사>를 근거로, 부산(富山)은 음산산맥의 와룡산(臥龍山)이고 부산(負山)은 중국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고 했다. 그는 또 몽골 지리에 관한 참고서인 <몽고지지>를 근거로 아랍선산 밑에 있는 길란태(吉蘭泰)라는 호수가 비문 상의 염수라고 설명했다.
▲ a는 음산산맥(인산산맥), b는 길란태(지란타이). ⓒ 김종성
신채호의 해석을 근거로 할 때, 우리는 태왕이 내몽골초원의 동쪽에서 출발하여 서쪽까지 일직선으로 진격하여 패려족에게 일대 타격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패려족 영역 내부를 뚫고 지나가면서 부락을 파괴하고 가축을 빼앗은 것은, 그들의 경제를 마비시킴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복종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목지대에 가서 가축을 빼앗는 것은, 수확기에 농경지대에 가서 벼를 몽땅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늘날로 치면 전투기 편대를 동원해서 적국의 산업시설을 집중 타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에 복종하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을 끊어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내몽골초원을 가로지르는 이 원정을 통해 태왕은 패려족을 다시 굴복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서는 태왕이 이듬해에 한반도 남부로 말머리를 돌렸다고 기술했다. 패려족을 굴복시키지 못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와 같이 광개토태왕은 만주나 한반도 북부에만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 내몽골초원의 서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고구려의 '파워'를 과시했다. 물론 그 지역을 항구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기마군단이 초원을 가로질러 타격을 가한 뒤 유유히 돌아왔다는 것은 당시의 고구려인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오만함'에 넘쳐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게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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