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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동북, 비려거란, 그리고 호태왕비문 

중국의 역사 문헌을 읽고 인용할 때 시대별로 달라지는 지리지정에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이전 시대의 지명(地名)이나 족명(族名), 국명(國名)이 처음 사용한 사람 주위로부터 시대를 거쳐가면서 자꾸 멀어지는 현상을 자주 찾을 수 있기 때때문이다. 심상지리(心象地理)의 이상 비대(異常肥大) 현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런 명칭들이 대부분 뒤죽박죽이다. 전국시대(기원전 480-221)라고 하면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에서 출발한 나라들이 서로들 싸우고 있었던 터라 자신들의 정보는 제대로 칼같이 정확할 것은 자명하지만 중원이라는 지리심리적 공간을 넘어선 그 바깥의 정보는 굉장히 뒤죽박죽인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연산 이남의 연(燕)은 동쪽의 족속, 또는 나라에게 얻어터진 적이 많아서 강성해 진 한때인 소왕 때에 고조선을 쳐서 멀리 밀어냈었다고 한다. 

지명들을 살펴보면 중원의 사람들의 문헌에는 그들의 독특한 오랑캐관이 깔려 있어서 정말 정확하게 부르고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상(商)/은(殷)이 멸망한 이후에는 ‘상인(商人)’이라는 비칭어가 생겨난 것처럼 장사치로 떠돌아 다닌 다는 말이 주(周)나라 사람들에게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은의 유민들이 이제는 발아래 있으니 그들을 은융(殷戎)으로 불렀다는 문헌도 보인다. 이름하여 은나라 오랑캐.

그래서 현재의 지명을 이야기하는 것과 과거의 중원과 만주의 지명들을 지정해서 부른 것에는 아주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문헌 해석에 역사지리적 지식과 시대적 지식들과 같은 한 차원 엄정한 해석원칙이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의 요하(遼河)라는 지명을 보자. 중국이름으로 랴오허이다. 이 현재 요동반도, 곧 랴오뚱반도의 서쪽에 위치하는 요하가 언제부터 요하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는지가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올라가도 고려시대 정도, 아니면 좀 더 줘서 삼국시대로 간다고 해도 기원후 몇 세기 정도가 된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사람인 사마천이 쓴 책이라서 사마천이 당대의 지리적 이름들을 썼다고 하더라도 300-400년 전에도 똑 같은 지명으로 불렀을까? 그냥 옛날에는 요수였는데 요즈음은 요하라고 한다면 쉽다. 한 3천년 된 지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마천 보다도 몇 세기 전의 전국시대의 현재의 연산이남, 곧 뻬이징 남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는 연(燕)에서 요수(遼水)의 동쪽을 요동(遼東)이라고 했고, 요수의 서쪽을 요서(遼西)라고 했다고 하자. 그럼 그 요수는 현재 우리가 요동반도의 서쪽으로 지칭하는 그 요하일까? 그런데 연나라 사람들이 불렀을 요수, 혹은 사마천이 적어 넣었을 당대의 요(遼)자가 의미하는 바는 자기들의 심상적 지리에서 아주 먼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저 천리만 되어도 요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적어놓은 바를 살펴보면 어떤 때는 천리, 어떤 때는 2천리가 되어 종잡을 수도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분이 바로 후대의 가필을 점쳐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문헌은 앞의 문헌들을 똑같이 베껴서 다시 쓰고, 또 다시 쓰고, 첨삭하고, 약간 후대의 것을 가미해서 올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앞에 한 번 틀리면 틀린 부분을 실은 후대의 문헌들에 똑같이 주루룩 틀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주(註)를 달아 두고 풀이도 해 두고 한 것은 아주 좋다. 한(漢)의 무제가 연나라 사람 위만의 나라 조선을 치고 설치한 한(漢)사군이 설치된 것에서도 그런 심상 지리(心象地理)의 이상비대 현상은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꼭 그 지방에서 난 것이 아닐 때가 있다. 지역 유지가 다른 나라의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그 나라의 식민지가 그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논리를 구사할 때도 있다.

그리고 일제감점기 때의 일본 관학자들의 역사 왜곡으로 불리우는 것들은 왜곡이 아니라 오히려 ‘오류’로 불러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것을 빨리 많이 찾아서 교정, 수정해 주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과거의 일본역사가들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는 중국의 현대 역사가들도 상당수 있는 것 같다.    

동북공정이라는 명칭의 ‘동북’이 나온 것은 김육불이라는 사람이 쓴 ‘동북통사’라는 책이었다고 한다. 그 책을 보면 ‘동북’은 주례라는 주나라의 관원들의 이름과 기능을 쭉 써 놓은 예제관련 책속에 포함된 천하의 지도를 관장하는 관원인 직방시(職方視)의 조에서 나오는 구절에서 연원 하였다고 한다. “동북(東北)쪽을 유주(幽州)라 하고 그 산의 진을 의무려(醫巫閭)라고 한다.” 주례는 은을 이긴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나이 어린 조카 성왕의 초기 치세에 섭정을 한 주공 단(旦)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후대의 가필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책이기도 하다.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때에 가공언이 주례정의라는 책을 지었다.
 
그런데 이것에 근거해서 김육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일제강점기 이후 시대의 동북 지역을 모두다 지칭하겠다고 나선 것 같다. 후금에서 기원한 여진족 청나라에도 반하는 성향은 ‘만주’라고 부르면 안된다고 쓰고 있다. 김육불은 서문에서 요사(遼史)와 금사(金史)를 개수하는 것을 장래의 목표로 삼고 있다. 곧 거란사와 여진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모두 발해 이후에 만주에 세워진 나라들에 대한 역사이다.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격하한 첫 근대 역사가인 것 같다. 물론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 스타일의 한국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자신이 분개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한다고 하면서도 조선역사에 대해서는 자기의 적들과 똑 같은 관념을 가진 것이다. 청대의 영토안에 있었던 과거의 나라들의 역사를 쓰면서 중원적인 심상 지리를 가지는 것이다.

광개토왕비의 정벌기사의 첫번째 단락인 영락(永樂) 5년 비려 정벌이 생각나는 것은 왠 일일까? 고구려는 거란을 선비족에서 유래한 비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대의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전의 첫 거란 공격기사가 있는데 큰 노획은 없었다고 간략하게 쓰고 있다. 당대 기사인 광개토왕비문은 영락 5년의 정벌은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넘어 현재의 시라무렌 강 건너 염수(鹽水) – 산염지역-까지 갔다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염 지역은 홍산문화, 하가점 하층문화의 지역으로 알려진 현재의 내몽고자치주 적봉 지역에서 별로 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조선의 고토가 500여년 만에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襄平道)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고 쓰고 있다. 고구려가 양평으로 불렀던 곳은 어디일가? 고구려인들은 중국과는 비슷한 지명도 쓰고 많은 다른 지명을 썼을 것임에 분명하다. 광개토왕비문의 부산(富山)을 보통 의무려(醫巫閭)산으로 비정한다. 심상지리의 이상비대가 아니길 바란다. 벽화가 나오는 고구려고분에 ‘유주’자사 누구라는 명이 새겨진 것도 있다고 한다. 광개토왕 이후이면 분명히 그는 고구려의 제후 정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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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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