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주간조선 1999-10-7 , 1999-12-2  http://www.dragon5.com/news/news199910072.htm

[고구려 정복로] 전설을 넘어 민족사의 무대 속으로
주간조선-고구려연구회 공동 만주벌∼동몽골 4개코스 현지답사...
광개토대왕 정복로-요서지역 고구려성터 최초 발견

광개토대왕비 등 금석문과 구당서, 수서 등 사서에 나오는 고구려의 초원 정복로가 상당 부분 실제 사실로 확인됐다. 또 고구려의 서쪽 강역도 현재 국내학계와 중국학계가 잡고 있는 요하 이동을 훨씬 넘어 한대 요서군이 있었던 자오양(조양)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서 지역의 고구려 고성이 사상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주간조선과 고구려연구회가 공동 기획한 고구려 정복로 학술 답사단이 지난 6월22일부터 25일간 중국 만주 동북평원과 대흥안령산맥, 동몽고초원 일대를 대상으로 벌인 학술 답사에서 나온 성과들이다.

이번 학술 답사는 실로 '1300년만의 답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중국 동북평원의 동쪽에서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대막 변경의 동몽고초원에 이르는 광활한 고구려의 초원 정복지는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뒤부터 줄곧 민족사의 무대에서 제외돼 왔던 곳이다. 발해가 그 뒤를 잇긴 했지만 막북의 유연, 중원의 전연, 북위 등 강대국들과 쟁패하던 그 시절의 세력권을 쉽게 회복하진 못했고 그 이후에는 아예 민족사의 무대가 한반도로 졸아들었다. 청대에는 `만주족의 발상지'라고 해서 봉금 조치가 내려졌고 근대 이후에는 이데올로기 대결 속에 찾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그곳이 '우리만의 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무대 위에는 이후 요·금·원·청 등 역대 중국의 이민족 왕조들이 차례로 일어나 융성했고 고막해, 지두우처럼 이름만 들어서는 알 수도 없는 허다한 민족들이 수없이 명멸해갔던 곳이기도 하다. 그 사이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 기병들이 말발굽 소리도 당당하게 누비고 다녔을 초원은 우리에게 잊혀진 존재가 됐다. 가도가도 끝없는 광대무변의 평원, 한반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강수량과 키 작고 비틀어진 풀들만이 듬성듬성 자라는 척박한 사막 땅은 이미 농경문화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아주 낯선 풍경이 되고 말았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이곳에 쳐진 물리적 장벽이 없어진 지금까지도 많은 국내 역사학자들이 이 지역에 대해 도상연습만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이런 '낯설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이국의 땅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하고 의아해한 건 답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구려 정복로 답사단은 1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수많은 이민족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더깨 아래로 면면히 숨을 쉬는 고구려 역사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망망대해의 초원에 와보지 않고는 어떻게 고구려 역사의 스케일을 실감할 수 있으랴!" 한 답사단원의 감탄사처럼 드넓은 초원 위로는 지금도 고구려의 전설과 신화 가 떠돌고 있었다. 정복로 답사는 크게 4개의 코스를 상정했다.

18세에 등극한 광개토대왕이 즉위 5년만인 395년에 벌인 첫 대규모 정복이었던 거란 정복로를 비롯해, 영락 12년(402년) 선비족 왕조인 후연에 궤멸적 타격을 주어 결국 멸망에 이르게 했던 숙군성 공격 루트, 북부여가 망한 뒤 권력 공백 속에 놓여 있던 부여 고토 무혈 점령로와 그 아들인 장수왕 대에 이루어진 지두우 정복로 등이다. 그중에서도 답사단이 가장 비중을 두었고 그 실체에 가장 근접할 수 있었던 코스는 거란 정복로였다. 22살의 젊은 나이에 처음 나선 이 대규모 정복전은 '광개토경(광개토경)'이라는 광대한 정복지를 건설하는 시발점이었고 고구려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 영락 5년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영락 5년 대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산(부산) 부산(부산)을 지나 염수(염수)가 언덕에 이르러 패려(패려) 3부락 6~7백영을 부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말,양을 얻었으며 돌아가는 길에 요동 일원의 토경(토경)을 순수(순수)하였다." 이 정복은 그동안 요동의 변경을 괴롭혀온 거란족을 징벌한 것이기도 했지만 요하 건너에 있는 선비족의 후연에 대한 무력시위, 갓 재위에 오른 젊은 왕의 웅지를 내외에 과시하는 등 다목적의 포석을 깐 정복전이었다. 답사단은 대흥안령 산록 남쪽의 요나라 상경성(현재의 임동) 남쪽 70~80km 지점에 있는 시라무렌장(서랍목륜강)과 시랴오허(서료하)가 비문에 나온 염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유력한 증거를 확보했다. 이 강의 하류와 시랴오허 중류에 이르는 100km의 남쪽 강안에 현지 사람들이 옌젠디(염택지)라고 부르는 강알칼리성 소금땅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한 것이다. 현지 지도에도 이 부근에 염택지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강의 북쪽 초원으로는 한동안 모래언덕 지형이 계속돼 비문에 나오는 '염수가의 언덕(염수구)'을 떠올리게했다. 이 즈음에서 수천리를 달려온 광개토대왕의 기병들이 거란 진영을 짓밟은 뒤 초원을 뛰노는 우마군양(우마군양) 이끌고 개선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무려 16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현장에서 비문의 진실이 입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비문에 나타난 부산, 부산과 염수의 위치에 대해 명확한 위치 비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 결과 염수가 시라무렌장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푸순(무순)에 있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진지 신성(신성)에서 출발해 랴오닝성과 내몽고자치주 변경 지대에 있는 남만주 서북쪽의 이우뤼(의무려)산과 누루얼후(노노아호)산을 지나 시라무렌장에서 일전을 벌인 뒤 랴오양(료양)으로 개선하는 여정의 거란 정복로가 유력해 졌다. 고구려의 기병 부대가 거란족과 일대 결전을 벌였을 시라무렌장은 시랴오허(서요하) 평원 동쪽의 사막지대를 흘러나와 시랴오허로 합쳐진 뒤 랴오허(요하)평원을 향해 흐르는 거란족의 젖줄. 그동안 이 강이 염수일 가능성이 강력히 제기돼오긴 했다. 하지만 거란의 본거지에 가까운 강이라는 이유 외에는 염수로 볼 마땅한 근거가 없었다는 게 역사학계의 고민이었다. 고구려사 분야의 소장학자인 국방군사연구소의 여호규 박사(36)도 "체계적인 연구 논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염수가 시라무렌강일 가능성에 동의한다 고 말했다. 후연 정복로에서는 한대(한대) 요서군 지역에서 처음으로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고성이 발견돼 비포장 도로의 험한 여정을 달려온 답사단을 흥분시켰다. 답사단은 요하 서쪽 100~150km 지점에 걸쳐 있는 따릉허(대릉하) 유역의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카이저우성(개주성)을 발견했다. 진저우시(금주시) 이수안(의현)의 카이저우촌(개주촌)에 있는 이 고성은 1985년 의현인민정부가 '개의현고성유지(개의현고성유지)'라는 이름의 성급 문물보호단위(보호문화재)로 지정한 곳. 넓이가 4만평에 이르는 토성으로, 성 동쪽 언덕 위에서 고구려식으로 추정되는 13기의 돌널무덤떼를 확인됐다. 돌무덤에는 도굴 흔적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답사단의 한 고고학자는 "발굴을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최소한 완형이 남아 있는 이 중 하나의 돌널무덤은 고구려 때 것이 아니라면 이 지역 전체 유물·유적의 연대 추정을 모두 뒤집어야할 정도로 확실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중국 학계는 물론, 우리나라의 학계도 요서 지역이 고구려 영토였다는 옛 문헌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요하 이동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성이 발견됨으로써 고구려 서쪽 강역이 영주(영주·현재의 자오양)에 이르렀다 는 구당서 등의 기록이 사실임이 확인됐고 이에 따라 고구려 강역에 대한 재검토도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85년 심양시 도서관 사회과 참고부가 출간한 동북명승고적질문(동북명승고적<거+실>문) 에는 의현 남쪽 40리에 고구려 고성이 있는데 남쪽 연못이 둘레가 100여보에 이르는 거성이다. 옛날 동전과 기와가 많이 나왔는데 대부분 고구려 것이어서 고구려성임을 확정할 수 있다 고 돼 있어 이 성은 고구려에 대해서는 유독 인색한 중국 문화재 당국으로부터도 고구려성임을 인정받고 있다. 답사단의 서영수 교수는 이 성은 장수왕 때 한대 요서군 지역을 영토로 확보한 뒤 건설한 지방관의 치소(치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 말했다. 장수왕대에 있었던 따싱안링(대흥안령) 원정로도 그동안 이 산맥을 거대한 지리적 장벽으로 인식해온 국내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코스였다. 도상으로만 보면 길이와 너비가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의 대규모 산맥이지만 실제 답사해본 결과 최고봉 황장량(황강량)이 2029m 정도로 산이라기보다 거대한 고원에 가까워 고구려 기병이 1주일 이내에 손쉽게 돌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산맥 너머 동몽고 초원은 이 부근에서 유일하다고 할 풍부한 말 산지여서 발전기 고구려가 이곳 정복에 나서 이유를 실감케 했다.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회장은 "정복로 답사는 사상 초유인데다 현재 우리의 영토가 아니어서 학술적으로 입증하기엔 부족한 점이 아직 많다"면서도 "민족사에서 외면받아온 이곳의 역사를 복원하려면 국가적인 차원의 연구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99-10-7)


[취재를 마치고] 허무주의를 넘어 과학으로
 
고구려 정복로 답사기가 주간조선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반응이 들어왔습니다.

한 주 정도 쉬는 주에는 `왜 답사기가 나오지 않느냐'는 전화도 있었고 `제 홈페이지에 기사를 싣고 싶은데 허락해달라'는 네티즌도 있었습니다. PC통신 천리안에는 `고구려 영토 중국 내륙까지 뻗쳤다'는 내용의 토론방이 열려 400건이 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고구려 역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고구려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습니다. 한 학생은 제게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시험볼 때 나당 연합군이라는 말이 나오면 아예 공란으로 냅니다.'

이 학생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는 `기존 고대사 연구가 신라 중심적으로 이뤄져 왔다'고 보는 사람들의 학계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이 존재합니다. 역으로 백제나 고구려사 연구에 대한 냉소도 만만찮습니다. 이를테면 `고구려가 우리 민족과 무슨 관련이 있어 하는 식의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현재의 지역갈등 구도가 투영된 듯한 이런 극단적 인식의 골은 의외로 깊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고구려 은구를 역사의 유토피아 탐구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자님도 아직 기존 역사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려면 멀었군요. 선입견에서 벗어나세요.' `고구려 유적은 서안, 낙양에도 있고 돈황과 트루판에도 있다고 합니다. 그깟 고구려 영토를 서쪽으로 조금 늘린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차피 가짜인데! 일제가 써준 역사를 텍스트로 하여 아직도 우리 역사는 한반도와 남만주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막북이나 시베리아, 연해주도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기성 언론이 인정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허무주의는 쉽고 과학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답사단도 이번 답사를 통해 많은 유혹을 느꼈습니다. 대싱안링 주변에는 곳곳에 까오리청(고려성)이라고 부르는 지역들이 나옵니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인이 스스로 부르는 자신들의 국호였으니 까오리청은 고구려성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 아닌가. 그것도 현지 중국인이. 그렇다면 대싱안링까지 고구려의 영토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불행히도 이런 상상은 현지에서 깨지고 말았습니다. 까오리청이라고 부르는 곳은 대부분 요나라나 금나라 때의 성이었습니다. 시대가 분명치 않은 지역도 고구려 유적·유물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토피아를 꿈꿨던 답사단은 허탈하고 암담한 심경이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 갖고 그곳이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과학의 한계 내에서는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사 연구가 신라 중심인 것도 사실입니다. 한 해에 나오는 연구논문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압도적으로 신라가 많지요. 그럼에도 이런 사실 때문에 신라·백제사에 대해 편견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언젠가 고구려의 역사가 시대정신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가장 절실한 것은 고구려사에 대해 정확한 인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황소처럼 차곡차곡 연구의 성과를 쌓아갈 때가 아닌가 합니다. 상상력은 소중하지만 무너지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주간조선 / 최유식 기자 199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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