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7421.html
“나는 모른다”가 박근혜를 진짜 위하는 길인가
등록 : 2012.02.03 18:52수정 : 2012.02.05 15:55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씨의 유족인 장남 영구(오른쪽)씨와 차남 영우(왼쪽)씨. 김씨 유족은 2010년 6월 정수장학회 및 국가를 상대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주식반환 소송을 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부산일보 김주열 주검 보도뒤 쿠데타 정권의 언론장악 수갑차고 한 기부가 자발이냐
김기춘·강성구·신승남 등 장학금 받은 상청회원들 끈끈한 친박 지지조직으로
부일장학회 설립자인 고 김지태씨 유족이 <부산일보>와 <문화방송>(MBC) 되찾기에 나섰다. 정수장학회와 정부를 상대로 두 언론사 주식반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62년 6월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에서 김씨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을 정수장학회(당시 5·16장학회)에 넘긴 지 48년 만이었다. 지난달 10일 <한겨레>와 만난 유족은 정수장학회에 대한 실망감이 소송의 이유라고 밝혔다. 소 제기 시점은 2010년 6월이었지만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와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부일장학회 주식 기부는 강제헌납이라고 결정했는데도 정수장학회는 그동안의 불법을 사죄하지 않잖아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소송을 제외한 다른 해법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씨의 장남 영구(75)씨는 소송 배경을 밝히며 그동안 청와대와 국회에 제출했던 각종 탄원서와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보고서 등을 한묶음 꺼내놓았다. 김씨는 “5·16 쿠데타 직후 재판받던 아버님 면회를 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꼭 50년이 됐다”고 말했다.
1962년 김지태씨는 조선견직과 삼화고무 등을 경영하던 기업인이었고, 동시에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지금의 MBC), 부산문화방송 등을 소유한 언론사주였다.
기업가와 언론인으로 승승장구하던 김씨에게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은 권력기반 확보를 위해 부정부패 척결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씨도 부정축재법 위반 등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부산일보 등 김씨가 갖고 있는 3개 언론사 주식이 이때 5·16장학회로 넘어가게 된다. 김씨의 차남 영우(71)씨는 “선친이 옥중에서 쇠고랑 찬 손으로 (강압에 의해)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가 1962년 6월20일이었다. 이틀 뒤 김씨는 공소취소로 풀려났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는 보고서에서 “김씨의 재산헌납은 구속수감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박근혜 새누리당(옛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부일장학회의 재산 기부는 자발적 헌납이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이 김씨에게 강탈한, 혹은 넘겨받은 재산이 언론사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국정원 과거사위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며 부일장학회 사건 조사를 담당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를 ‘박정희식 언론장악의 결과물’이라고 지적했다. “쿠데타 직후 나라를 다 가졌는데 언론사 주식에 무슨 욕심이 있었겠어요. 재산권이 아닌 언론장악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4·19 혁명이 부산일보의 보도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아니었겠습니까.” 한 교수가 말한 부산일보 보도란 1960년 4월12일치 <부산일보> 1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을 가리킨다. 당시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했다가 숨진 채 발견된 마산상고 재학생 김주열군의 사진이었다. 한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일주일 뒤 4·19 혁명이 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부산일보 등 3개 언론사가 5·16장학회로 넘어간 지 50년이 지난 2012년, 부산일보는 다시 뜨겁다. 부산일보는 지난해 11월30일치에 박근혜 위원장을 겨냥해 “정수장학회 사회환원”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을 예정이었다. 기사를 막은 것은 장학회가 임명한 김종렬 당시 사장이었다. 기사를 들어낸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이날치 신문을 내지 않았다. 언론사 초유의 일이었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지난 1일 “편집국에서 자꾸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사를 내려 하니까 김 사장이 ‘경영상의 판단’에 따라 윤전기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며 “경영권 확보를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편집권 침해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국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는 3일 현재 편집권 독립 및 정수장학회 사회환원 등을 요구하며 신문사 1층 복도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부산일보 사태’를 바라보는 김지태씨 유족의 심경은 편치 않다. 김영우씨는 “부산일보가 엉망이 되고 있는 것은 박근혜 위원장이 이심전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어느 한 사람을 앉혀놓고 (신문사를) 100%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참 딱합니다. 도대체 언론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어요. 만약 최필립씨가 언론계 안팎에서 신망받는 분이었다면 부산일보 사태가 빚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것이 진짜 박근혜를 위하는 길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씨의 흉상.
김지태씨 유족의 요구는 두 가지다. 정수장학회가 갖고 있는 부산일보 주식 등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벌이고 있지만, 이를 돌려받는다고 해도 유족끼리 나눠 가질 생각은 없다. 대신 최근 부산일보 사태처럼 경영진의 편집권 개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유족이나 박근혜 위원장 쪽 사람이 아닌, 사회적 명망가 중심으로 재단 이사진을 새로 꾸리자는 제안이다. 또다른 요구는 장학회 이름에 김씨의 호 ‘자명’을 넣어달라는 것이다. “소송에서 이겨 언론사를 다시 유족이 가져온다 해도 우리 사회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아버지가 피땀 흘려 세운 언론사가 장학금을 내는 것인데, 장학생이 누구 돈을 받는지는 알아야 안 되겠습니까. ‘정수’라는 이름은 버릴 수 없다면 자명과 정수를 함께 써도 좋습니다.” 김영우씨의 주장은 정수장학회 사회환원을 촉구하는 시민·언론단체 요구와 크게 결이 다르지 않다.
김씨 유족과 언론단체 등에서는 문제해결의 열쇠는 정수장학회, 혹은 박근혜 위원장이 쥐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영구씨는 “정수라는 두 글자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 가족의 대표인 박 위원장이 정수장학회와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은 지난 2일 “정수장학회는 5·16 쿠데타 세력이 민간인으로부터 강탈한 언론사 주식을 기본재산으로 하고 있다”며 “박 위원장이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나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강탈한 재산의 환수에 대한 입장과 철학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수장학회와 박 위원장 생각은 다르다. 박 위원장은 지난달 31일 기자간담회에서 “(정수장학회는) 저하고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최필립 이사장도 지난 1일 “박 위원장은 법적으로 장학회와 관계가 없다”고 뒷받침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김씨 유족과 언론계 안팎에서는 박 위원장이 정수장학회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로 상청회·청오회를 지목하기도 한다. 상청회는 정수장학회 장학생의 모임으로 선거철이 되면 종종 ‘박근혜 지지조직’으로 언론에 소개된다. 3만8천여명에 이르는 상청회원은 학계와 재계, 정·관계에 걸쳐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김기춘·현경대·강성구 전 한나라당 의원과 법조계의 신승남 전 검찰총장, 주선회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이 상청회에 속해 있다. 상청회가 대학 졸업생의 모임이라면 청오회는 현재 장학금을 받고 있는 대학 재학생의 모임이다. 회원은 700여명 수준이다. 정수장학회로부터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청오회에 가입하게 되고, 졸업과 동시에 상청회원이 된다.
눈에 띄는 것은 청오회·상청회의 끈끈한 결속력이다. 부산과 대구 등 주요 지역마다 지부를 두고 있는 청오회는 해마다 하계 수련회 등 정기모임을 갖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방문 등의 행사를 치른다. 정수장학회는 숙소·교통편 제공 등의 명목으로 매년 3천만원 이상의 예산을 청오회에 지원하고 있다. 서울 ㄱ대 재학생 김아무개씨는 “매년 여름 2박3일 일정의 수련회와 송년모임, 학술대회를 포함해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만 5번”이라며 “정수장학회는 장학금 받는 것 이외에 다른 활동이 거의 없는 다른 장학회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청오회 부산지부는 아예 회칙에 “청오회의 공식적인 모임에 2회 이상 연속으로 참여하지 않을 경우 회원의 자격을 박탈하고 장학금 지급을 중단한다”고 못박아두고 있다. 이에 대해 청오회 지도교수인 이준탁 동아대 교수는 “회칙은 학생들 스스로 정한 것으로 실제로는 모임에 안 나왔다고 해서 장학금 지급을 중단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장학재단인 정수장학회가 매년 수천만원 규모의 예산까지 써가며 청오회 같은 장학생 조직을 지원하는 데 대한 언론계 시선은 곱지 않다. 부산일보 관계자는 “박근혜 위원장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정수장학회가 장학금 지급을 내세워 장학생의 청오회·상청회 가입을 강제하는 것은 ‘지지조직화’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장학회는 (청오회) 학생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한 적도 없고 박 위원장을 입 밖에 낸 적도 없다”며 “정치집단화를 꾀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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