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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5 - 줄타기 기술 (1) : 혼인동맹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프롤로그)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1 - 호족연합정권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2 - 호족 : 고대적인 것의 몰락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3 - 고당 전쟁과 호족 성립의 상관관계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4 - 고구려 부흥운동과 호족 성립의 상관관계 
 

드디어 군웅할거의 혼란기에서 국가를 세우고 혼란을 종식시킨 대조영. 그러나 나라를 세우고 나서 모두가 해피엔드는 아니었습니다. 건국은 오로지 현재진행형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호족들의 대거 참여로 맹을 결성하고 그로 인해 빠른 시간 내에 건국을 완료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골치거리였던 당과 안동도호부에 관한 문제가 일시적으로 해결된 뒤 두번째로 다가온 문제는 중앙 정부와 호족의 관계 문제였던 것입니다. 주변의 온갖 방해를 받아 간신히 만든 파이를 놓고 어떻게 나눠먹을 것인지 박 터지게 싸우는 일이 남은 셈이죠. OTL


보통 창업보다 수성의 단계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것은 창업의 시련을 원동력으로 삼아 구성원 간의 단결력이 최고조에 달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데 반해, 수성에 단계에서는 창업 때 만들어 놓은 파이를 두고 서로 갈라먹으려고 개싸움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특히 건국 초기에 정권 성격이 중앙집권형 국가가 아닌 지방분권형 국가에 가까웠던 고려나 샤를마뉴 제국 등에게는 국가 존립과 결부되어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점은 호족들을 건국에 대거 참여시켰던 발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호족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가 발해의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물론 관계 정립이란 면에서는 호족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건국에 참여한 호족들 중에는 당과의 관계에 의한 생존 문제로 참여한 경우도 있었고, 혹은 끈 떨어진 연처럼 철수한 당 안동도호부를 따르느니 새로운 강자인 발해 왕실에 빌붙어서 세력 좀 키워보겠다고 참여한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생존의 문제에 가까웠지만 그들도 사람인만큼 자기 지역 내에서 권력 확대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말할 순 없었고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중앙에 연줄을 만드는 것은 필수였습니다. 국가 정책의 방향이 어떻게 잡히느냐에 따라 정책에 동원된 인프라를 통해 호족간 경쟁에서 자신의 흥망성쇠가 결정되기 때문이죠. 하다못해 관도 건설이 어느 호족과 가깝게 건설되느냐를 두고 다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도로 건설 예정지 주변은 땅값이 올라가니까요. 또는 공적인 관계수로 건립이 어느 호족의 농업경영에 영향을 주는 일도 벌어질 것입니다. 호족의 사병을 혁파해서 중앙군으로 귀속시키는 문제에 대해 누구는 적용시키고 누구는 적용시키지 않는 등의 문제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호족들은 저 혼자 잘먹고 잘살 수 있는게 아니라 중앙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의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야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결국 중앙과 호족은 만들어 놓은 파이를 어떻게 갈라먹느냐의 문제, 더 나아가 어떻게 끝까지 생존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첨예한 내,외적 갈등을 벌였습니다. 

현지에서 독자적 행보를 걸으려 하는 지방 호족과 그런 호족들의 이탈을 막고 그 힘을 중앙으로 복속시켜 왕조의 흥성을 바라는 중앙의 왕실, 이 모순적 관계의 양자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정략적 줄다리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갈등에 사용된 양자의 '당근과 채찍'에 대해 서술할까 합니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려는 것은 둘다 그런 정략적 행위에 도덕적 당위가 개입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입니다.(호족의 이탈을 일방적인 국가에 대한 매국행위로 바라보거나, 혹은 중앙집권화 정책을 역사 발전의 당위 내지 무조건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여기서 배제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할 키워드는 '연줄'로 그것을 어떻게 확보하고 활용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발해 왕실의 입장에서는 가장 거슬리는 것은 호족의 지방 장악력과 그에 수반되는 군사력입니다. 호족간 갈등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왕실과 상하관계를 맺게는 했지만 그 관계가 언제 역전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들을 왕실의 진정한 힘으로 만들어야 하긴 하겠지만 그럴 수단을 발해 왕실이 가지진 못했습니다. 만약 왕실이 무리하게 호족들을 굴복시키려 했다면 권력 확장이나 생존을 목적으로 맹에 가입한 호족들이 대거 들고 일어날 판입니다. 왕실 자체의 힘은 개개의 호족들보다 우위겠지만 전체 호족의 힘을 당할 수는 없지요. 같은 호족연합정권형 국가였던 고려는 궁예 시절부터 밑바닥에서 시작해 호족들을 통합해온 정권이라 이 점이 덜했습니다만 발해왕실은 그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호족들과 별다른 군사적 충돌을 겪지 않은 채 맹을 결성하여 건국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호족 전체에 느끼는 왕실의 압박감은 더했을 것입니다.(발해 건국 시에 고려처럼 호족 통합 전쟁이 벌어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이후에 연재될 [보론 : 발해는 후삼국 같은 호족 통합 전쟁이 있었을까?] 참조 ) 결론은 이들을 힘으로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이죠. 따라서 기존에 왕실과 맹을 맺은 유력한 대호족들을 보다 왕실에 가깝게 만드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있어 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공고한 것은 없지요. 그리고 편먹고 편먹기 방법으로는 간편하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고려사에서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혼인 동맹입니다. 다음은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사료들입니다.

<冊974, 褒異1>開元六年(718) 二月 乙酉 靺鞨渤海郡王大祚榮遣其男述藝來朝 授懷化大將軍行左衛大將軍員外置 留宿衛
개원6년 2월 을유일 말갈발해군왕 대조영이 그 아들 술예를 사신으로 보내어 내조케 하니 회화대장군행좌위대장군원외치(懷化大將軍行左衛大將軍員外置)를 제수하고 숙위로 머물게 하였다. 

<冊975, 褒異2>開元十三年(725) … 五月 渤海王大武毅之弟大昌勃價來朝 授左威衛員外將軍 賜紫袍金帶魚袋 留宿衛  
개원 13년 5월에 발해왕 대무예의 아우 대창발가(大昌勃價)가 내조하였다. 좌위위원외장군(左威衛員外將軍)을 제수하였으며 자포(紫袍), 금대(金帶), 어대(魚袋)를 하사하고 숙위로 남기었다.

<冊971, 朝貢4>開元十五年(727) 八月 渤海王遣其弟大寶方來朝 
개원 15년 8월에 발해왕은 그의 아우 대보방(大寶方)을 보내 내조하였다.

<冊975, 褒異2>開元十七年(729) 三[二]月 甲子 渤海靺鞨王大武藝使其弟大胡雅來朝 授游擊將軍 賜紫袍金帶 留宿衛 … 八月 丁卯 渤海靺鞨王遣其弟大琳來朝 授中郞將 留宿衛
개원 17년 2월 갑자일에 발해말갈왕 대무예가 아우 대호아(大胡雅)로 하여금 내조하게 하여 그에게 유격장군을 제수하고 자포, 금대를 하사하고 숙위로 남기었다. …  8월 정묘일에 발해말갈왕은 그의 아우 대림(大琳)을 보내 내조했다. 중랑장을 제수하고 숙위로 남기었다. 

<冊971, 朝貢4>開元十八年(730) 正月 …… 靺鞨遣其弟大郞雅來朝賀正 獻方物 
개원18년 정월에 말갈은 그의 아우 대랑아(大郞雅)를 보내 내조해서 원단을 축하하였고 방물을 바쳤다.

<冊971, 朝貢4>開元二十三年(735) 三月 日本遣使獻方物 渤海靺鞨王遣其弟蕃來朝  
개원 23년 3월에 발해말갈왕은 아우 (蕃)을 보내 내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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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971, 朝貢4>開元十九年(731) 十月 … 渤海靺鞨王遣其大姓取珍等百二十來朝 
개원 19년 10월에 발해말갈왕은 대성취진(大姓取珍) 등 120명을 보내 내조하였다. 

위의 책부원구 원문 및 해석은 http://skkucult.culturecontent.com/ 참조 
(근데 해석이 좀 엉터리인 부분이 간혹 있어 살짝 고쳐서 올림)


사료는 책부원구에서 무왕(?~737)과 동시대에 있는 사람들을 인용했는데 언급한 것처럼 대조영의 아들은 무예, 문예, 술예란 예(藝)자 돌림의 삼형제 외에도 여러 왕자들이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정비 소생의 무예 형제 외에 유력 대호족 출신 비빈들의 자식들이 이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설마 정비 소생에서 적어도 9명 이상의 다른 돌림자를 사용하는 왕자가 나왔다고 보긴 어려우니까요.(대성취진은 일단 왕실 일원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따로 아래에서 보론으로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당의 외교 사절로 갔던 왕자들만이 기록에 남았던 것을 감안하면 다른 왕자나 왕녀가 더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물론 표본을 더 찾을 수 있지만 무왕처럼 동복과 이복관계가 분명한 경우를 찾기 어려워 표본을 무왕 때로 한정지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다 찾기에는 귀찮기도 하고..OTL) 


이렇게 혼인 동맹을 통해 유력 대호족의 지원을 얻어내고 왕실에 비협조적인 호족들을 하나씩 누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혼인 동맹의 대상이 될만한 세력으로 유력한 곳은 1. 고당 전쟁이나 나당 전쟁의 참화를 거의 입지 않은 지역인 부여 지역, 두만강 유역의 책성 주변 지역, 그리고 2. 대당 교역로가 지나가는 요동반도 일부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중 책성 세력은 양대 전쟁을 아예 겪지 않았던 곳이고 비옥한 평야와 동북변 말갈인과의 교역 센터인 점을 이용해 큰 부를 쌓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걸 통해 양성한 군사력도 대단했을 거 같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 국가 건설에 대해서는 대조영 집단의 라이벌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구당서 기록에서 큰 전쟁이 벌어진 기사가 없다는 것을 존중한다면 이들은 아마도 발해 왕실과 일찍 혼인동맹을 맺었거나 알아서 굽신거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혼인 동맹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거 같습니다. 원래 기브 앤 테이크라고 혼인동맹의 대상이 된 유력 대호족들이 댓가없이 혈연을 맺고 힘을 빌려줄 리는 없지요. 당연히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의 현지 장악력을 높이는데 이용하거나 혹은 중앙 권력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외척의 발호지요. 즉, 왕실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맺은 혼인 동맹은 양날의 칼이 된 셈입니다. 왕실을 지키라고 맺은 동맹이 뒤통수를 치는 격이니까요.

고려사에서도 왕건 사후 왕위 계승상의 혼란에 외척이 개입된 실례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2대 혜종부터 4대 광종에 이르는 왕위 교체기를 말입니다. 이때 혜종 때는 나주 호족 오씨에 의해, 3대 정종과 4대 광종 때는 충주 호족 유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이들 외척계 호족은 왕실과의 혼인 동맹 외에도 다른 유력 호족과 맺은 혼인 동맹으로 엮인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찬가지의 과정이 발해에도 일어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3대 문왕 사후(793)에서 10대 선왕 즉위(818) 전까지의 30년간은 이런 양상으로 봐야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외척계 호족의 중앙 정계 개입은 왕위 계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천도 문제와 결부되어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띌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만약 특정 기득권층이 왕실을 능가할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고 왕실은 이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한다면 그와는 반대편에 선 계층이나 세력의 뒤를 봐주고는 이들이 박 터지게 싸움하는 것을 틈타 왕실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는 부르주아나 법복귀족같은 신흥세력의 뒤를 봐주고 성직자 계층과 귀족계급을 견제하게 하여 왕권을 공고히 한 예가 있지요. 고구려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 세력과 국내성 세력을 쌈 붙이고는 왕권을 공고히 하는 한편 평원왕 시기에는 하층 귀족 세력을 키워 전통 고위귀족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조에서는 선조나 숙종도 당파 싸움에 개입하는 방식을 자주 쓰긴 하죠. 단지 너무 많이 갈아 타서 문제..OTL) 신흥세력 뒤 봐주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중에 천도도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신분 계급의 분화가 큰 사회에서는 신분간 갈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이 쉽지만 계급 분화가 아직 크지 않은 사회에서는 지역 갈등을 이용해서 중앙이 이득을 보는 방법이 쉬울 것입니다. 발해 초기는 임협관계에서 막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신분계급 분화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을 것이므로 발해왕들은 천도를 통한 방법을 선호했을 것입니다.

원래 천도는 수도 주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통 기득권 계층의 토지 기반 가치를 똥값으로 떨어뜨리거나 토지 유착성을 끊어버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도된 지역의 토착 세력은 그 반대급부로 성장하는 면이 있지요. 마치 몇년 전 행정수도 이전에 따른 연기군 땅값 상승이 그 비슷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고구려에서 평양 천도한 거나 발해에서 4번이나 천도한 것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원래 수도 주변 땅이 뭘 해먹으려고 해도 짭짤한 건 고금을 통틀은 이치니까요. 그러나  호족들이나 전통 기득권층이 빙다리 핫바지들이 아닌만큼 그 방법이 항상 약발이 먹혔던 것 같진 않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새롭게 본 발해사 62p. 인용


문왕 중기에 있었던 첫 천도인 중경 현덕부 때만 해도 꽤 잘 먹혔습니다. 중경 현덕부가 위치한 곳은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두만강 유역 부근이지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책성부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강성한 책성부 호족을 파트너로 삼다가 잘못하면 등에 칼꽂힐 우려에 비하면 중경 세력은 왕실의 확실한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천도가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던지 얼마 후 상경으로 천도하는 문왕입니다. 아마도 중경 세력의 힘이 원래 강하지 못했던 것인지 제대로 된 견제를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단 지리적으로는 첫 수도였던 구국(동모산 주변)과 책성부 사이에 있어 국초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전통 기득권층과 책성부 세력 사이에서 눌리고 있지 않았겠나 추측을 해봅니다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쨋든 중경 세력으로는 구국의 전통 기득권층을 꺾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인지 문왕은 천보(742~756) 말에 상경 용천부로 천도합니다.(이 지역은 부여 지역이란 점과 말갈 교역상의 한 센터란 관계를 보고 선택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천도도 마찬가지로 썩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탓인지 어떤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문왕은 그의 생애 말년에 위험을 감수하고 동경 책성부(용원부)로 천도하기에 이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동경 용원부로 개칭하는 책성부는 고구려 때부터 동북변의 군사, 농업 중심지이며 대말갈 교역상의 센터로서 부와 권력 집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무왕 때부터 일본교역 창구로 각광받게 된 곳임을 주지해주십시오. 상대적으로 이곳에서 자생한 토호들의 세력이 강한 탓에 국초부터 왕실에 일방적으로 따른 지역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수하고서도 문왕이 3번째 천도 지역으로 책성부를 선택한 까닭은 구국시절부터 기득권을 구축하면서 왕실로서도 제대로 제어하기 어려운 전통 기득권층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확실히 이들 책성부 세력은 이전 천도 지역 토호들보다 전통 기득권층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왕 말기부터 일본과의 교역이 군사적 성격에서 경제, 문화적인 비중이 강해지면서 그만큼 책성부가 담당하는 역할도 커지게 된 셈이니까요. 발해의 해외 교역 비중에서 안사의 난으로 인해 당의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것과 반대로 대 일본 교역 비중은 차츰 커지게 되면서 책성부가 중앙의 전통 기득권층들에게 가하는 압박과 위협 수위는 증대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때문에 책성부로의 천도는 전통 기득권층들에게 대단한 불안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문왕 사후에 사건은 벌어지지요.

문왕이 죽은 후 왕위에 즉위한 사람은 문왕의 '족제(族弟)'인 대원의란 사람입니다. 족제는 고조를 같이하는 형제간을 의미하여 8촌 내를 의미하는데 실제로는 6촌에서 12촌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더군요. 암튼 문왕의 자식이 아닌 족제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정통 왕위계승자를 제치고서 왕위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 지지기반을 임상선 선생님과 김종복 선생님은 대원의가 대일외교에 많이 관여하여 책성부 세력의 지지를 받았을 거란 추정을 하고 계신데, 제가 관련 논문을 직접 읽어보진 못해 대원의가 대일외교에 어떤 관여를 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원의의 즉위는 국인(國人)들, 즉 국정에 참여하는 귀족들의 공분을 사서 그는 1년도 안되어 살해당하고 15세 미만으로 추정되는 문왕의 손자 성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상경으로 천도해버리고 말죠.  왕위 계승과 천도에는 이처럼 중앙 기득권층과 호족들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혼인동맹을 통해 일찍이 중앙정계에 진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한 외척계 호족이 있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어휴 길다..) 이후 10대 선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모종의 사건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 혹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망하는 왕들로 인해 발해 중앙 정계는 그 이해관계를 놓고 혼란 상황이 쭉 이어지게 되는 거죠 뭐...

이렇듯 혼인 동맹과 그에 준하는 정책들은 자칫 잘못사용하면 죽쒀서 개주는 격처럼 왕실 자체의 힘을 키우기보다 왕실을 위협할만한 기득권층을 만들 우려도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혼인동맹 자체는 호족들의 경제력과 군사력 자체를 정치역학상에서 일시적으로 약화시킬 순 있어도 지속적, 구조적으로 약화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발해는 혼인 동맹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중앙의 힘을 키울 수는 없었습니다. 혼인 동맹이란 보험은 사용하긴 쉽지만 언제든지 말아먹을 공산이 컸고 때문에 다른 보험들을 몇개 더 들어두어야 했으니까요. 다음에 서술할 내용들은 다른 보험들 얘기들입니다.(참..저도 감질나게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OTL  다 끝내면 '이 숑키..별것도 아닌 글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감질나게 하냐?' 라며 돌 맞지 않을까 걱정이라능..ㅎㄷㄷ  )

- 다음에 계속 - 


덧. 혹시나 다음의 논문 가지고 계신 분은 저에게 적선 쫌..굽신굽신.. 기본적인 작업가설을 생각해두고 관련 내용을 연구 단행본에서 확인한 후 완전히 막장 떡밥은 아니구나를 확신하고 글을 올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해서 찾아봤으나 암만 찾아도 논문은 안보이는군요..쩝..

임상선. <발해의 천도에 대한 고찰>. <<청계사학>> 5. 성남: 청계사학회, 1988. 
김종복. <발해 폐왕, 성왕대 정치세력의 동향>. <<역사와 현실>> 41. 서울: 한국역사연구회, 2001. 



보론. 인용한 사료 아래에 대성취진은 따로 분리해서 배치한 것은 그가 원래는 왕실의 일원이 아닐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해서 따로 빼두었던 것입니다. 왕실의 일원이 사신으로 온 경우는 대체로 그가 왕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서술로 '아우(弟)'라거나 혹은 '아들(男)'로 표시한 것과 달리 대성취진의 경우는 어떤 수식어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대조영의 아우였던 대야발의 아들로 사촌관계여서 달리 표시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기록자가 귀찮아서 빼먹을 수도 있겠지만 전자의 경우 종형제나 아니면 그냥 '왕자'라고 표기할 수도 있는 문제이고 후자는 대체로 왕과의 관계를 거의 다 표시하던 책부원구에서 대성취진의 경우는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 미심쩍더군요. 

때문에 책부원구에서 왕과의 관계를 표시하지 않은 경우는 원래 왕실의 일원이 아닌 '사성귀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름에서 姓자가 붙은 것도 대씨 성의 취진이란 의미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싶기도 했구요. 일단 고려조의 경우 초기부터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성귀족인 '왕규'가 실존하고 있으니 발해의 경우도 혼인 동맹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시집보낼 딸래미가 양쪽 집안에 다 없는 경우랄까..? 죄..죄송하다능..)에는 공있는 신하나 세력있는 호족들에게 왕성인 대씨를 사성함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포섭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사성 귀족들은 이미 고자 묘지명에서도 등장하듯 고구려 초기부터 등장하고 있습니다.

발해에서는 유독 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정권 참여 비율이 꽤 높은 편인데 처음에 저는 신라 진골 귀족같이 왕실에서 다 해처먹는 구존가 했었습니다. 다음은 임상선 선생님의 <발해의 지배세력 연구> 225p 표를 스캔뜬 것입니다. 일일히 표로 치려니 짜증이나서 못해먹..(퍽)


이런 사성귀족들을 통해 호족들을 포섭하는 구조라면 왕성인 대씨의 비중이 이렇게 높은 것도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겠더군요. 아마 발해 초기에 이런 사성귀족들이 왕실에 꽤 많이 포섭되었고 이후에 방계 왕족만이 아니라 사성귀족 후예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의외로 고씨의 비율도 대씨 못지 않게 높은 것은 원래 고구려 사회에서 사성 고씨세력들이 꽤 많아 발해까지 이어진 까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암튼 이들도 왕실에 대한 가족적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혈연동맹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판단하고 같은 카테고리로 엮어서 연재글에 넣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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