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311 
* "이다조" 관련 내용은 http://tadream.tistory.com/5653 로 옮겼습니다.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2>후고려기(後高麗記)(5)
 
[武王諱武藝, 高王子也. 初封桂婁郡王.]
무왕(武王)의 휘는 무예(武藝)이며 고왕의 아들이다. 처음 계루군왕(桂婁郡王)에 봉해졌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발해의 2대 가독부(태왕)는 무왕이었다. 발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던 무골군주.
 

<조선 시대의 호렵도 민화. 고려인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일상생활도 이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開元七年六月丁卯, 唐以左監門率吳思謙攝鴻臚卿, 充使吊祭. 冊王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 王遂改元仁安, 開斥土宇.]
개원 7년(719) 6월 정묘일에 당이 좌감문솔(左監門率) 오사겸(吳思謙)에게 홍려경(鴻臚卿)을 겸직시켜 사신으로 보충해 조문하였다. 왕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드디어 왕은 인안(仁安)으로 연호를 고쳤고 나라를 개척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원년 기미(719)
 
당이 발해에 대해서 기록한 것 가운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연호'를 빠짐없이 적어주었다는 것이다. 신라야 처음부터 군사를 빌리기 위해서 저자세 있는대로 다 갖추느라 결국 자기들 고유의 연호마저 버렸지만, 발해는 당에 대해 처음부터 적대적...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뭐 받으려고 굽실거릴 이유가 없었고, 당에게 눈치보일 일이 없었다. 즉 얽매일 것이 없었다.
 
연호는 대체로 그것을 정한 왕의 통치철학을 반영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광개토태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정한 것은 고려의 무궁한 영화와 영원한 번영을 만들겠다는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었고, 진흥대왕이 연호를 세 개나 바꿔가며 나라를 일으키려 한 것은 불교의 교리로 나라를 일신하겠다는 의미였다. 두 왕 모두 자신의 통치철학에 따라 연호를 정하고 그 연호에 따라 자신의 뜻을 펼쳐 자신의 치세에 가장 강대하고 부한 나라를 만들어냈으며 역사에 모두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무왕의 연호 인안(仁安). 그것은 다분히 유교적인 색채를 짙게 드러내고 있는 단어다. 인(仁)으로 세상을 편안하게(安) 하겠다는 뜻이니까. 인이야말로 공자가 설파하려던 유교의 핵심 사상이다. "인한 자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논어》 이인편) 라고 말할 정도로, 유교에서 충(忠)과 서(恕)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높은 가치를 매겼던 미덕이 바로 인이었다.
 
한대 이래로 여러 위정자들이 유교의 윤리로 세상을 다스리려 하면서 유교를 높이 떠받들고 그 경전의 이해도를 따져 고관을 임명하는 것에서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다졌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만, 무왕의 이야기를 쓰려고 갖가지 자료를 조사하면서 개인적으로 무왕의 성격과 인(仁)이라는 글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무골군주에게 '인(仁)'이라는 부드럽고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는 글자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럼에도 무왕은 어째서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을 듯한 저 글자를 갖고 자신의 연호를 선포한 것일까.
 
[因其俗不立館驛, 處處置村落, 以靺鞨爲民. 大村置都督, 次曰制史, 其下曰首領. 東北諸夷皆畏而臣之.]
그 습속에 관역(館驛)을 두지 않으므로 곳곳에 촌락을 두고 말갈을 백성으로 삼았다. 큰 마을에는 도독(都督)을 두었는데 그 다음을 자사[制史]라 하고 그 밑은 수령(首領)이라 한다. 동북쪽의 여러 오랑캐 모두 그를 경외하여 신하가 되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원년 기미(719)
 
《발해고》에 나오는 이 대목은 일본에서 편찬한 《유취국사》와 내용이 비슷하다.
 
[渤海国者, 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 為唐所滅也. 後以天之真宗豊祖父天皇二年, 大祚栄始建渤海国, 和銅六年, 受唐冊立其国. 延袤二千里, 無州県館駅, 処々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為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俗頗知書. 自高氏以来, 朝貢不絶.]
발해국은 고려의 옛 땅이다. 아메미코토히라카스와케노스메라미코토[天命開別天皇] 7년(668) 고려왕 고씨가 당에 멸망당하였다. 뒤에 아메노마무네토요오호지노스메라미코토(天之眞宗豊祖父天皇) 2년(698)에 대조영이 처음으로 발해국을 세웠고 카도(和銅) 6년(713)에 당으로부터 그 나라의 책립을 승인받았다. 사방이[延袤] 2천리요 주(州)ㆍ현(県)에 관역(館駅)이 없고 곳곳마다 촌리(村里)가 있는데 모두 말갈(靺鞨)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은 적다. 모두가 토인을 촌장(村長)으로 삼으니 큰 마을은 도독(都督)이고 그 다음은 자사(刺史)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 모두 수령(首領)이라 부른다[其下百姓皆曰首領]. 토지가 몹시 추워서[極寒] 논농사[水田]에 맞지 않다. 세속에서는 자뭇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고씨 이래로 조공이 끊어졌었다.
《뤼죠고쿠시(類聚國史)》권제193, 발해(渤海) 인용
《니혼고키(日本後紀)》권제4 일문(逸文), 엔랴쿠(延暦) 15년(796) 4월
 
일본의 역사책인 《유취국사》193권에 기록된 발해연혁조. 이 기록은 발해 초년에 일본을 방문했던 일본 사신들의 견문기록과 신라, 당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발해고》에 기록된바 발해 땅을 최초로 밟은 사람은 인안 10년(728년) 무왕의 사신과 함께 발해로 온 히키타노 무시마로라는 사람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 모루키미노 쿠라오(諸君鞍男)를 비롯한 여섯 명의 일본 사람이 발해의 말갈 거주 지역으로 들어가 풍속을 살핀 일이 있다.
 
이 기록이 작성되던 시기 발해의 수도는 동모산ㅡ훗날 중경현덕부라 불리게 되는 '구국(舊國)'에 있었고, 지방행정체계가 아직 다 정비되기 전의 상황이었던 듯 하다. 관역 즉 관청이나 역참 같은 것은 주와 현에는 꼭 있어야 할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주현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초기 형태의 주현제도가 시행되었음에도 아직 체제에 맞는 지방관청시설이 없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무왕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발해의 지방행정체계는 부(도독)-주(자사)의 2단계, 혹은 대촌(도독)-차촌(자사)-하촌(수령)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국의 왕진쿤이란 학자는 '그 백성이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은데 모두가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다'는 《유취국사》의 문구를 갖고, 남북국시대론자가 '토인은 곧 고구려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원주민이란 의미의 '토인'은 곧 말갈의 한 갈래지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방증한답시고, 그는 고려 멸망 이후 말갈의 이합집산 과정을 나름 가정하면서, 고려에 더부살이해서 살던 말갈이 고려 멸망 이후 그 일부는 당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흩어졌으며, 그 흩어진 말갈들이 어느 부락으로 투항했을 때에 전입된 그들을 포함해 말갈이라 통칭했을 것이고, 그 부락의 추장은 세습이므로 여전히 원주민 즉 토인이 추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즉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는 구절에서 토인은 역시 말갈의 한 갈래지 고려인이 아니라는 말.
 
《유취국사》의 이 기사는 그 당시의 발해 상황을 알려주는 그 때에 작성된 것이라 발해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고 하더라). 지금까지 이 사료를 통해서 발해는 대다수 말갈인과 소수의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봤고, 이것이 발해가 거란족에게 변변한 저항도 못한 채 갑자기 멸망된 주요인으로 판단했다. 종래에는 대개 박시형의 주장을 따랐다. 그러나 그의 논지에도 여러 가지 미심쩍은 것이 있다. 특히 토인은 곧 고구려사람이라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확정한 점이 그렇다. 이 점을 놓치지 않고 토인은 곧 원주민이란 의미에 근거해서 왕진쿤처럼 가정에 가정으로 연상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첫째, 《유취국사》의 맨 첫구절에 '발해국은 주(州), 현(縣), 관(館), 역(驛)이 없다'고 했는데, 중국 사료에서 '발해의 행정구역이 5경 15부 62주'라고 한 기사는 뭐야? 왕진쿤 그 자는 사료 그대로를 인정한다지만, 정말 발해에는 주현 등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말갈 부락이다(유취국사 中)'라는 표현대로 되었을까?
 
둘째, 고대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단순히 인민(人民)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까? 
 
셋째, 그의 말대로 모두가 말갈부락이라면 굳이 말갈은 많고 토인은 적다고 구분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 기사에는 말갈과 토인을 구분하고,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다고 했다. 
 
넷째, 토인이 촌장이 되는데 그 촌의 규모로 도독(都督), 자사(刺史), 그리고 수령(首領)이라고 했다. 그는 말갈인이 도독, 자사, 수령 모두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발해에 고려 유민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인가?
 
이 점들을 고려하면 토인이 곧 말갈이라는 왕진쿤의 주장은 합리성이 결여되었고, 또 별다른 근거 없이 토인=고려인이라 보고서 발해의 주민 구성을 언급한 박시형도 잘못 해석했기는 마찬가지. 더구나 이 사료는 발해 전체를 골고루 살펴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발해를 오고가는 길목의 정황ㅡ일본도(日本道)가 있었던 발해의 동부(지금의 간도, 연해주 일대)를 묘사한 것이다. 이곳은 나중의 금과 청이 일어난 이른바 여진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당조는 698년 6월에 안동도호부를 도독부로 격하시키고 난 뒤, 거의 요동 지역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말하자면 지금의 요하 동쪽의 옛 고려령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셈이다. 제깟 놈들이 중화사상 어쩌고 하면서 자기들 중심의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했고, 신라의 원조까지 얻어가며 백제와 고려를 멸한 것도 부질없이 나당전쟁이며 거란, 돌궐의 반란에 결국 발해의 건국까지, 자기들의 머릿속 구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는 현실 앞에서 당은 신라나 발해에게 자기네들 중심의 세계질서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언제나 고분고분할줄 알았던 것들이 '이것들이 한판 뜰래?!'하고 버럭 소리치고 눈 부라리면서 작대기 휘두르고 정말 한판 뜨려는 작정으로 달려들면 일단은 움찔하면서 '이거 왜이러니'하고 달래야지.
 
신라의 경우는 어땠을까. 당군 축출(676)에 보덕국 철폐까지 거쳐 신문왕 5년(685)에 편재한 이른바 9주 5소경.
기존의 신라 영역(지금의 경상도 일대), 옛 백제령(지금의 전라도-충청도 권역), 그리고 옛 고려령(지금의 황해도-경기도-강원도 권역)에 각기 세 주씩 아홉 주를 설치하고 수도 서라벌의 동쪽 편향을 보완하고자 주마다 소경(小京) 즉 부수도를 하나씩 설치했다. 고려령에는 기존의 한산주와 우두주, 하슬라주를 당풍의 한주(漢州)와 삭주(朔州), 명주(溟州)로 개편하고, 국원성과 평원군에 중원경과 북원경이 설치되었는데, 지방군사조직인 10정을 지방 각 주마다 하나씩 배치하면서 한주에다가는 하나를 더 두었다. 여기는 지역도 넓고 국방상의 요지였기에 남천정과 함께 골내근정을 하나 더 둔 것이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신라라는 것들은 이 나라를 통일할 능력은커녕 그럴 의지도 없는 벌레같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왕조만 유지할 수 있다면 대동강이남이 되든, 한강 이남이 되든 관심없는 족속들이었기에, 서북 일선의 중심은 전반적으로 한강 이남에 치중될 수밖에 없었다. 게으른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신라가 겨우 예성강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10년이나 지나서의 일이었고, 그 이전까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북부 일대ㅡ지금의 평안도와 함경도를 포괄하는 남부 고려령까지 신라도 당도 범접할 생각을 않는 '중간지대', 힘의 공백지였던 것이다.
 
이곳을 고왕이나 무왕은 집중적으로 포섭해나갔다.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옛 수도 평양의 수습, 그리고 당이 방치한 요동 지역에 대해서도, 고려 계승의 타이틀을 내건 이상 그 일대의 땅은 발해 조정이 모두 수습해야 할 고토였다.
 
8년(720) 8월에 무예의 적자인 대도리행(大都利行)을 책봉하여 계루군왕으로 삼았다.
《책부원귀》

무왕에게는 훗날 문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대흠무 말고도, 대도리행이라는 아들이 따로 있었다. 물론 장남이었고. 무왕이 당으로부터 아버지 대조영의 작위인 발해군왕의 지위를 형식책봉받기 전에 계루군왕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계루군왕은 발해에서 '태자'에게 수여하던 지위였던 것. 그렇다면 개원 8년ㅡ발해 무왕 인안 2년(720)은 발해 무왕이 처음으로 태자를 책봉한 해가 된다. 즉위한 바로 이듬해에 태자를 정했다는 것은 혹시라도 유사시에 생길 수도 있는 왕위계승분쟁을 일찌감치 차단해버리겠다는 고전적이고 상투적인 수단. 그런 점에서 무왕의 정치수완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알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가 성이고 도리행이 이름이니까 이름이 세 글자인데, <발해국 흥망사>에 보니까 이런 이름은 주로 말갈계 이름이라네. 말갈족 고유의 어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데... 니미럴, 이름이 네 글자면 말갈어인가? 그럼 연개소문은 뭐야?
 
[二十年, 秋七月, 徵何瑟羅道丁夫二千, 築長城於北境.]
20년(721) 가을 7월에 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장정[丁夫]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성덕왕
 
한편 발해의 팽창에 신라 역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슬라ㅡ그러니까 북쪽 변경에다 장성을 쌓게 한 것이다. 이병도의 말에 따르면 지금 함경도 영흥에 있는 고산성이 바로 그곳이라는데, 요하 동쪽이나 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은 발해로서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거란다. 부여부에는 거란을 방비하기 위한 상비군이 상주하고 있었고, 요하 동쪽 유역까지는 거란이 당과 발해 사이에 끼여 자연경계를 이루어주었기에, 당의 위협을 덜 받고 옛 땅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무왕 시대의 경계는 동남쪽으로 평양 일대까지 연결된 요동 남쪽 지역을 완충지대로 해서, 신라와는 지금의 영흥을 경계로 맞닿게 되었다. 발해는 옛 고려령인 만주를 중심으로 고려 고토를 수습하고, 신라는 발해를 막기 위해서도 패강 이남에 대한 지배권을 착실하게 다져나갔지만, 두 나라 모두, 고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 옛 고려의 중추부까지는 미처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기유에 발해의 대수령(大首領)이 와서 조회하니,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임명하고[除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수령은 발해라는 나라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방행정단위이자 발해 중앙정부가 지방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매개, 지방행정의 가장 말단에 속하는 촌락을 다스리는 재지세력가 즉 토호(土豪)였다. 촌락은 발해에서는 가장 말단에 속하는 행정구역이었지만, 발해 초년만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지배계층의 하나였다. 9대 간왕 때까지 발해 조정은 수령을 규합해 정권안정을 꾀하려 했고, 발해 사신단의 최고 수장으로 삼아 당과 일본에 보냈다.
 
선비족의 경우에서 보이듯 기마유목민족들은 자신들이 속한 부락의 우두머리를 대인(大人)이라 불렀는데, 고려 말년 연개소문 역시 아버지로부터 '서부 대인(大人)'의 지위를 물려받았었다. 한대 중국인들 사이에서 '대인'이란 '큰 세력을 가진 자'나 '덕망과 능력을 갖춘 자'라는 의미로 통했는데, 그것은 유력한 호족과 같은 의미로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해 바깥 세상에 대한 대응력과 내부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냥 토호 정도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들은 신라의 촌주(村主)처럼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며 자연촌락 두세개를 관할하고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세금 징수나 성곽 축조 같은 행정업무를 담당하면서 중앙권력이 지방에 침투할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발해의 수령이란 곧 재지수장으로서 발해 안에 사는 말갈족의 우두머리이고,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 부락 구성원을 다스리고 때로는 하급관리로 임명되거나 외교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고 본다.
 
도독과 자사는 고려인이고, 수령은 말갈인이라 고려인이 말갈을 지배하는 체제에서 말갈족을 대표하는 것이 수령이었고 고려인들은 말갈족 수령을 통해 말갈족을 지배했으며, 발해 말년에 이르러 두 종족 사이의 알력이 표면화되고 폭발하면서 수령들이 일탈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발해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ㅡ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수령이란 곧 발해의 고려인들이 말갈인들을 다스렸던 이중지배체제의 흔적이라는 것.
 
하지만 발해보다 후대에 이르러 중국 북부를 차지하고 지배한 정복왕조인 요(遼)나 금(金)과는 달리, 발해에는 그들에 준하는 이중지배체계란 것이 존재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거란족 정복왕조인 요는 자국 안에 거란족만 있지 않았다. 돌궐이나 중국인, 발해인들도 많이 있었고, 거란족보다 결코 적지는 않은 숫자였다. 거란족의 고유 풍속을 지키고 지배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 요의 조정은 남북 면관(面官) 제도라는 것을 시행했는데, 요의 주류인 거란족이나 돌궐족을 거란 부족의 고유한 관습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북면관제, 송인과 발해 유민들을 중국식의 군현제도로 다스리는 남면관제, 이러한 이중지배체제에 따라 요는 그들의 제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여진족의 금에서도 맹안모극이라 해서 요와 마찬가지로 주류종족과 비주류종족에 대해서 적용하는 지배체제가 서로 달랐는데, 이는 한 나라 안에서 두 개 이상의 종족, 그것도 엄청나게 이질적인 문화와 풍습을 지닌 자들이 뒤엉켜사는 나라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동화되거나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요나 금과는 달리, 도독-자사-수령으로 이어지는 발해의 지배체계에는 뭔가 다른 이민족이 끼어들 건더기가 없어보인다. 서로 다른 둘 이상의 민족이 공존하던 요나 금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굳이 이중으로 지배체제를 만들어가며 다스릴 필요 없이 그냥 도독-자사-수령 한 줄로 쫙 그어지는 지배체제로 다스려도 될 정도로 고려인과 '말갈'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발해가 멸망할 무렵에 수령들이 일탈하는 모습을 두고 고려인과 말갈이라는 이질적인 두 종족 사이의 알력이 폭발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발해 수령들의 일탈은 그것보다는 신라 말년에 중앙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독립성을 지닌 토호로서 세력을 키워가는 촌주들의 모습과 같다고 보는 것이 사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당으로부터 절충장군이라는 관직을 받은 발해의 대수령이란 자도
아마 발해 전역에 흩어져 있던 '토호'의 일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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