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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6>후고려기(後高麗記)(9)  
2009/04/25 06:26

발해 초년의 역사가 문득, 조선조 초년의 역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왕은 이태조처럼 고려의 왕위를 찬탈하지도 않았고 많은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지만, 무왕은 문왕을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태종이 세종을 위해 그랬듯이.
 
태종이 자신의 장인이나 처남들도 모자라 며느리 소헌왕후의 집안까지 멸문에 가까운 숙청을 단행하고 많은 대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오늘 생각해 보면 세종의 앞에 놓인 잡초며 유리조각들을 손수 주워주고 뽑아주어 세종이 조선의 황금기를 열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 자신의 아들이 정치에는 이골이 난 노회하기 짝이 없는 너구리같은 노신(老臣)들에게 휘돌리는 일 없이 자기가 가진 소신과 목표를 마음껏 펼쳐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손자가 다스릴 나라가 외부의 누구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무왕은 스스로 발해 역사의 '악역(?)'을 자처했던 것이리라.
 
자신의 나라와 아들을 위해서 총대를 메줄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잔악무도한 살인마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린 손으로 자칫 가시나무 작대기를 들려다가 다치지 않도록 자기 손이 다칠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나무의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주고픈 마음이야 잘 알겠습니다마는 그게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실패했더라면 붓 들고 이리저리 수식하기 좋아하는 문장선비들이 대놓고 그걸 비판하고 헐뜯고 해서 남아나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발해라는 왕조가 무왕의 대에서 끝났더라면, 임신년의 서정도 중국 사가들에 의해 변방 해적들의 도둑질 쯤으로 기록되고 끝났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당조가 발해를 무시하는 일도 무왕 이후로는 그닥 없었다.
 
[文王諱欽茂, 武王子也. 改元大興.]
문왕(文王)의 휘는 흠무(欽茂)이며 무왕의 아들이다.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대흥 원년 무인(738)
 
흠무왕의 연호는 대흥(大興). '크게 떨쳐 일어난다'는 의미다. 아버지이자 선대 가독부(황제) 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이어받은 그가 선포한 이 연호처럼, 발해라는 나라는 흠무왕의 손에서 황금기를 맞이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대흥 원년은 곧 당 현종 개원 26년, 신라 효성왕 2년 태세 무인(738)에 해당한다.
 
[開元二十六年, 唐遣內侍段守簡, 冊王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 王承詔赦境內, 遣使隨守簡入朝. 玄宗授王左金吾大將軍.]
개원 26년(738)에 당에서 내시 단수간(段守簡)을 보내어 왕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 왕은 조칙을 받들고 나라 안에 사면령을 내렸고, 사신을 시켜 단수간을 따라 당에 입조하게 했다. 현종은 왕에게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의 직을 주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대흥 원년 무인(738)
 
당은 예전에 외교기밀(발해의 망명객 대문예를 빼돌렸다는)이 발해로 새는 바람에 쓴맛을 본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았고, 그래서인지 흠무왕 이후로는 시어사나 낭장 대신 내시를 보내서 화답했다. 지금이야 '내시'라고 하면 거세된 고자 즉 환관을 떠올리지만, 사실 내시라고 하면 당조까지만 해도 황제의 최측근 관료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내시=환관'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은 고려조 이후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천자의 좌우에 드나들 수 있는 최측근을 가리켜 내시라고 불렀다. 그래 내시를 파견해서 문왕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받았던 것과 같은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 발해군왕'에 덧붙여, 좌금오(위)대장군이라는 정3품 직위를 더 내린다.
 
《구당서》나 《당회요》에도 좌금오위대장군이라는 흠무왕의 직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727년 9월에 데와노쿠니에 온 발해의 사신들을 좌금오위대장군이라 불렀음을 일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772년의 고닌 덴노의 발언에서 나온 것이고 흠무왕이 즉위하고 30년은 족히 지난 뒤의 회고라서 현재사실과 과거사실이 서로 헷갈렸을 수도 있다.
 
윤8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서피(豹鼠皮) 1000장, 말린 문어(文魚) 100마리를 바쳤다.
《책부원귀》
 
여담인데 《구당서》에 따르면 당에서 파견한 책사(冊使) 단수간이 당으로 귀국할 때에 발해 사신이 따라 들어와서 조회하면서, 당조의 법령인 《당례(唐禮)》 및 진수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晉書)》를 베껴갔으면 한다고 청했고 이걸 허락해주었다고 나온다.(《해동역사》에서는 이것이 인안 말년에서 대흥 원년ㅡ서기 738년 사이에 있었던 사건임은 분명한데 자세한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겠다고 적었음)
 
발해에서 당조의 법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이건 늦어도 꽤 늦은 축에 속한다. 신라에서는 이걸 이미 다 한 뒤였거든. 신문왕 6년(686) 측천무후가 신라 조정의 요청으로 공문서양식 및 유교제례에 대한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관사림(文館詞林)》을 50권으로 축약해 베껴준 것이 벌써 50년이 다 되어가고, 《진서》는 따끈따끈한 초판본(그것도 한정판) 두 본 가운데 하나를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가서 받아왔으니까 (다른 하나는 당 태종의 황태자가 가졌고) 만약 정치적인 이유로 유교를 본격적으로 도입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신라보다 발해가 좀 뒤처지긴 했다. 하긴 그때는 발해라는 나라가 서기도 전이니까.
 
2월에 발해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매[鷹]를 바쳤다. 정미에 왕의 동생인 대욱진(大勗進)이 와서 조회하니,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원외치동정(員外置同正)을 제수하고 자포(紫袍)와 금대(金帶) 및 백(帛) 100필을 하사한 다음 머물면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대흥 원년 2월, 흠무왕은 사신을 당에 파견해 매를 선물한다. 이미 무왕 때인 인안 무인(737) 4월에 당조에 매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로 발해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매를 당조에 조공으로 바친 것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개원(開元) 27년(739) 2월에 발해왕의 동생 대욱진에게 내전에서 연향을 베풀었다.
《책부원귀》
 
흠무왕 대흥 2년 태세 기묘(739)에 당 황궁의 내전에서 열린 연회에는 흠무왕의 아우 대욱진도 있었다. 현종에게 개원성문신무황제(開元聖文神武皇帝)라는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해서 당의 전역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관리들 품계를 높여준다거나 백성들 세금 면제해주고 하는 파격적인 조치들이 내려졌는데, 기사일부터 시작해 무려 닷새 동안이나 잔치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놀기만 하는 것도 일은 일이지)
 
《구당서》에 이른바 3품 이상 관료에게는 각기 작(爵) 1급씩을 내리고, 4품 이상에게는 1계를 더해주는 와중에, 발해왕의 아우로서 이 연회에 참석한 대욱진에게는 정3품의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원외치(員外置)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흠무왕은 우복자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 무엇인가를 사은(思恩), 즉 '은혜에 감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흠무왕에게 좌금오위대장군 지위가 내려진 것에 대한 감사표시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뿐이다.(이 주장 자체는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가 <발해국 흥망사>에서 밝힌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즉위할 무렵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좌효위대장군 책봉을 받았다가, 739년경 왕제 대욱진의 파견과 맞물려 좌금오위대장군으로 격상된 것인지도.
 
[癸夘, 渤海使副使雲麾將軍己珎蒙等來朝.]
계묘(13일)에 발해의 사신 부사(副使) 운휘장군(雲麾將軍) 기소몽(己珎蒙) 등이 내조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권제13, 천평(天平, 덴표) 11년(739) 7월
 
운휘장군은 당의 무산계 45위 가운데 귀덕대장군과 함께 종3품상(上)에 해당하는 직위다.
 
10월 을해(16일)에 신하 우복자(優福子)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니, 과의(果毅)를 제수하고 자포와 은대(銀帶)를 하사한 다음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책부원귀>
 
《해동역사》에는 수복자(受福子)로도 기록된 발해의 사신 우복자는 당으로부터 과의 벼슬과 함께 자주색 옷과 은색 허리띠를 하사받아 본국으로 돌아왔다.

[丙戌, 入唐使判官外從五位下平郡朝臣廣成, 并渤海客等入京.]
병술(27일)에 입당사판관(入唐使判官) 외종5위하 평군조신(平郡朝臣, 헤구리노아손) 광성(廣成, 히로나리)이 발해의 손님들과 함께 미야코로 들어왔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3 천평(天平) 11년(739) 10월
 
대흥 3년 7월에 일본으로 간 발해의 사신들이 일본으로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저 자. 일본에서 당에 보냈던 견당사 평군광성(헤구리노 히로나리)로부터 비롯되었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바, 지금으로부터 6년 전ㅡ아직 무왕이 다스리고 있을 때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十一月辛夘, 平郡朝臣廣成拜朝. 初廣成, 天平五年隨大使多治比眞人廣成入唐, 六年十月事畢却歸, 四船同發從蘇州入海, 悪風忽起彼此相失. 廣成之船一百一十五人漂着崑崙國. 有賊兵來圍遂被拘執, 船人或被殺或迸虜, 自餘九十余人着瘴死亡. 廣成等四人, 僅免死得見崑崙王, 仍給升糧安置悪處. 至七年, 有唐國欽州熟崑崙到彼, 便被偸載, 出來既歸唐國, 逢本朝學生阿倍仲滿, 便奏得入朝, 請取渤海路歸朝。天子許之。給船粮發遣。十年三月, 從登州入海, 五月到渤海界. 適遇其王大欽茂差使, 欲聘我朝, 即時同發. 及渡沸海, 渤海一船遇浪傾覆, 大使胥要徳等■人沒死, 廣成等率遣衆, 到著出羽國.]
 
11월 신묘(3일)에 평군조신광성이 배조하였다. 처음 광성은 천평 5년(733)에 대사(大使) 다치비진인(多治比眞人, 타지히노마히토) 광성(廣成, 히로나리)를 따라 당에 들어갔고, 6년(734) 10월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事畢却歸]. 네 척의 배가 함께 소주(蘇州)를 출발하여 바다로 들어갔다가 악풍(悪風)이 갑자기 불어 서로 떨어졌었다. 광성이 타고 있던 배의 115명은 떠내려가서 곤륜국(崑崙國)에 닿았다. 적병(賊兵)이 나타나 와서 무리를 포위하고 잡아두니[拘執], 배에 탔던 사람들은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히고, 남은 이들 가운데 90여 명은 천연두[瘴]에 걸려 죽었다. 광성 등 네 사람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곤륜왕(崑崙王)의 눈에 띄어 이에 얼마 간의 양식[升糧]을 받고 악처(悪處)에 안치되었다. 7년(735)에 이르러 당의 흠주(欽州)에서 곤륜이 숨겨두고 있는 것을 알고 몰래 구출했다[便被偸載]. 빠져나와 기어이 당나라로 돌아왔다. 마침 본조(本朝)의 학생인 아배중만(阿倍仲滿, 아베노 나카마로)이 입조하여 강하게 아뢰어[便奏] 발해의 길을 따라 돌아가기를 청하니 천자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배와 양식을 딸려 보냈다. 10년(738) 3월, 등주(登州)에서 바다로 들어가 5월에 발해의 국경에 도착했다. 마침 그 왕 대흠무는 사신에 부쳐 우리 조정에 사신을 보내고자 즉시 함께 출발하게 했다. 비해(沸海)를 건너기에 이르러 발해의 배 한 척은 풍랑을 만나 뒤집혀서 대사(大使) 서요덕(胥要徳) 등 40명이 물에 빠져 죽고, 광성 등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착하여 출우국(出羽國, 데와노쿠니)에 닿았다.
《쇼쿠니혼키(続日本紀)》권제13, 텐표(天平) 11년(739)
 
평군광성의 발해 입국은 흠무왕을 책봉하기 위해 파견된 내시 단수간을 따라 이루어졌다. 일본의 견당사로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 길비진비(吉備眞備, 기비노 마키비. 695년∼775년)와 아배중마려(阿倍仲麻呂, 아베노 나카마로. 701년∼770년)인데, 중마려는 '조형(晁衡)'이라는 이름으로 당 조정에서 '비서감(秘書監)'이라는 고위벼슬에 오르고 안남도호부의 장관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무왕이 장문휴를 시켜 공격했던 등주에 당은 발해관이라는 것을 설치해 발해 사신들의 영접소로 삼았다. 그리고 평군광성이 발해로 가는 데에도 이 등주의 길이 사용되었다.

<평군광성의 일본 송환을 이루어낸 아배중마려. 당에서 '조형'이라는 이름으로 10년 가까이 관료 생활을 했다.>
 
그 유명한 견당사 아배중마려나 길비진비가 활약하던 시대도 바로 이 시대였다. 중국문화 섭취 욕구를 놓고 볼 때, 일본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김운경이나 최치원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이미 당의 빈공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당의 고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위 관료로 성장한 사람이 일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몹시 기분 나쁘고 자존심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신라의 의상이나 원측, 김교각 같은 승려들이 당에서 활약하며 그들의 불교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를 생각한다면 뭐 그리 기분나빠할 것도 없지만 본인도 유학자를 자처하는 몸인지라 불교 승려들이 유학자보다 먼저 당에서 우리의 우수성을 드러냈다는 것이 썩 기분좋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현실의 문제가 아닌 종교의 문제에서 활약했잖아.
 
그리고 말이 좋아 견당사지 견당사들은 대부분 저런 식으로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 무엇보다 일본의 배는 거대한 바다를 헤치고 중국까지 가기에는 기술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의 문물을 들여와 자신들의 나라에 전하고, 아울러 자신의 지위를 높여 출세해 보겠다는 마음을 품은 호족 자제들 (중마려나 진비도 이들에 속함), 먼 길을 거쳐 서역에서 범어로 된 불교경전을 가져와 당에 퍼뜨린 현장법사처럼 소위 '구법(求法)'의 뜻을 높이 세운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 그 조각배보다도 못한 배에 자신들의 몸을 실었다. 일본의 배로 당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에 가고자 했고, 그 길은 신라나 발해의 배편을 빌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으로 가는 일본의 호족 자제나 승려들, 특히 승려들이 가장 많이 택한 대당항로는 신라나 발해의 길을 경유하는 것. 사이가 좋지 못했던 신라를 차치하고, 우호국이었던 발해의 뱃길을 따라 당으로 가는 것이 일본의 허술한 배를 타고 목숨 건 도박항해를 하는 것보다는 더 안전한 방법이었겠지. 아배중마려는 도박항해를 해서 갔는지 아니면 안전하게 갔는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아무튼 평군광성은 발해의 사신들과 함께 동해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十二月戊辰, 渤海使己珎蒙等拜朝. 上其王啓并方物. 其詞曰 "欽茂啓. 山河杳絶, 國土夐遥, 佇望風猷, 唯増傾仰. 伏惟, 天皇聖叡, 至徳遐暢, 奕葉重光, 澤流萬姓. 欽茂忝繼祖業, 濫惣如始, 義洽情深, 毎脩隣好. 今彼國使朝臣廣業等, 風潮失便, 漂落投此. 毎加優賞, 欲待來春放廻, 使等貪前, 苦請乃年歸去. 訴詞至重, 隣義非輕, 因備行資, 即爲發遣. 仍差若忽州都督胥要徳等充使, 領廣業等令送彼國, 并附大虫皮羆皮各七張, 豹皮六張, 人參三十斤, 密三斛進上. 至彼請検領."]
 
12월 무진(10일)에 발해의 사신 기진몽 등이 배조하였다. 그 왕의 계와 방물을 올렸다. 그 글에서 말하였다. "흠무(欽茂)는 아룁니다. 산하가 까마득히 멀고 국토가 아득히 멀어 풍교와 덕화를 바라보면서 오직 우러르는 마음만 간절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황(天皇, 미카도)의 성스러운 예지(叡智)는 지극한 덕이 멀리까지 퍼져 대대로 성덕(聖德)을 이어 빛내고 은택이 만백성에게 흐를 것입니다. 저 대흠무는 선조들의 왕업을 이어받아 외람되이 국정을 총괄하기를 처음처럼 하고 있는데, 의로움은 두루 미치고 정은 두터워지도록 매번 이웃 나라와 우호를 닦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귀국의 사신인 조신광업(朝臣廣業, 아손 히로타리) 등이 풍랑을 만나 길을 잃어 표류하다가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에 넉넉한 상을 매번 내리면서 내년 봄이 오면 돌려보내려고 하였는데 사신 등이 굳이 올해 안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청하는 말은 지극히 중하고 이웃 나라와의 우의는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노자[行資]를 갖추어 즉시 돌려보냅니다. 이어 약홀주도독(若忽州都督) 서요덕(胥要德) 등을 사신으로 차임하여 조신광업 등을 데리고 귀국으로 가게 하였으며, 아울러 범가죽[大蟲皮]와 큰곰가죽[羆皮] 각 일곱 장, 표범가죽[豹皮] 여섯 장, 인삼(人蔘) 서른 근, 꿀[蜜] 세 말[斛]을 진상하니, 그곳에 이르거든 살펴보고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3, 천평(天平) 11년(739)
 
이제보니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죽었군. 무왕이 보낸 국서와 흠무왕이 보낸 국서가 서로 다른 것이 있다면, 무왕이 왜왕을 가리켜서 '대왕'이라고 부른 것과는 달리, 흠무왕은 번듯하게 '천황(天皇)'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 천황에게 본래 저들이 부르는대로 천황이라고 불러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일왕이라고만 부를 것인지를 두고 논쟁하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저것도 뭐 나중에 《속일본기》편찬과정에서 부분부분 고치고 윤색했겠지만.
 
범가죽에 곰가죽, 표범가죽도 모자라서, 인삼에다 꿀까지... 몸에 좋은 건 바리바리 다 싸서 보내주셨군.

[正月十二年春正月戊子朔, 天皇御大極殿受朝賀. 渤海郡使新羅學語等同亦在列. 但奉翳美人更着袍袴. 飛騨國獻白狐白雉.]
봄 정월 무자 초하루에 천황이 대극전에 행차하여 조하를 받았다. 발해군의 사신과 신라의 학어 등이 나란히 서있었다. 다만 일산을 든 시녀[奉翳美人]가 포고(袍袴)로 고쳐입었다. 비선국(飛騨國, 히다노쿠니)에서 흰 여우와 흰 꿩을 바쳤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3, 천평(天平) 12년(740)
 
천평 12년 정월의 헤이죠쿄에서 열린 정월 조하에서는 발해 사신도 참가했는데, 그 옆에 신라학어가 있었단다. 신라학어라면 일본어를 배우러 신라에서 온 통역관지망생쯤 되는 위치로 정월 조회의 정식 참석자로는 보기 어려운 지위임에도, 마침 정월 조회에 참가해서 발해의 사신 옆에 가서 서있었던 것이 《쇼쿠니혼키》에 실렸다. 발해 사신의 말을 통역해주기 위해서 신라의 학어가 옆에 서있었던 것이라면, 두 나라 사람들은 통역도 필요없을 정도로 언어가 비슷했다는 반증일까?
 
하지만 학어잖아. 일본어 배우러 온 통역관 지망생. 명색이 통역관을 꿈꾸는 학생이 설마 일본어 하나만 알고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조선조 역관들은 한어(중국어)와 왜어(일본어)에, 청어(만주어)와 몽어(몽골어)까지 모두 네 개 국어를 익혔다는데 조선보다 세계관이 탁 트여있었던 발해와 신라에서 겨우 그 정도만 배우진 않았을 거다. 중국어와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뿐 아니라, 저너머 위구르와 티벳, 심지어 동남아나 아랍의 언어까지도 익혔겠지. 단지 옆에 서있었다는 것만으로 두 나라 사이의 언어가 비슷했다고 하면, 내 옆에 미국놈 하나 서있으면 난 영어 천재였게?
 
발해 사신과 신라 학어가 나란히 서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두 나라 사이의 언어가 비슷했을 거라고 속단하지 말자는 거다 내 말은. 뭐 이런 것도 있잖아. "난,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고..."
 
[甲午, 渤海郡副使雲麾將軍己珎蒙等, 授位各有差, 即賜宴於朝堂. 賜渤海郡王美濃絁卅疋, 絹卅疋, 絲一百五十■, 調綿三百屯. 己珎蒙美濃絁廿疋, 絹十疋, 絲五十■, 調綿二百屯. 自餘各有差.]
갑오(7일)에 발해군의 부사 운휘장군 기진몽 등에게 각기 차등있게 위를 내려주었고 곧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발해군왕에게 미노(美濃)의 시(絁) 30정, 견(絹) 30정, 실[絲] 150궤, 조면(調綿) 3백 둔을 주었다. 기진몽은 미노의 시(絁) 20정, 면 10정, 실 50궤, 조면 2백 둔을 주었다. 나머지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3, 천평(天平) 12년(740) 정월
 
《속일본기》에 보면, 이때 발해에서 온 사신들은 무척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날 열린 연회뿐 아니라 아흐레 뒤에 다시 조당에서 잔치를 열어 주었고, 다음날 17일에는 대극전(大極殿) 남문에서 열린 5위 이상만이 모이는 활쏘기 경합에도 참가했다고. 활쏘기라. 발해 사신들의 활쏘기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丙辰, 遣使就客館, 贈渤海大使忠武將軍胥要徳從二位, 首領无位己閼棄蒙從五位下. 并賻調布一百十五端, 庸布六十段.]
병진(29일)에 사신을 여객관(就客館)에 보내서 발해의 대사 충무장군(忠武將軍) 서요덕에게 종2위를 추증하고, 수령으로 무위(无位) 기알기몽(己閼棄蒙)에게도 종5위하(下)를 주었다. 아울러 조포(調布) 115단과 용포(庸布) 60단을 주어 부조하였다.
《쇼쿠니혼키(続日本紀)》권제13, 텐표(天平) 12년(740) 정월
 
사망한 발해의 대사 서요덕에 대해서도, 일본 조정에서는 종2위의 예우로 대했고, 관위도 없는 일개 수령에 불과한 기알기몽에게도 종5위하(下)라는 벼슬과 함께 조포 115단과 용포(庸布) 60단을 주었다. (저것들은 옷만 해입고 살았나. 옷감만 잔뜩 주고 그래) 같은 관리인데 어떤 사람은 종2위고 어떤 사람은 종5위하. 하긴 중앙에서 파견된 관인과 지방의 촌주를 동급으로 쳐주기는 쉽지 않지. 게다가 '기알기몽'이라는 이름은 어쩐지 고려인이라기보다는 말갈인의 이름에 더 가깝다는 것이 하마다 고사쿠의 지적이다.

[丁巳, 天皇御中宮閤門. 己珎蒙等奏本國樂. 賜帛綿各有差.]
정사(30일)에 천황이 중궁 각문에 행차하였다. 기진몽 등이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포백을 각기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3, 천평(天平) 12년(740) 정월
 
기진몽 등이 연주했다는 본국악은 곧 발해악이다. 아마도 발해 사신단 속에 음악을 잘 하는 악사가 몇 명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발해의 음악은 지금 전하는 것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몇몇 기록을 보면 발해의 음악은 무곡(巫曲) 즉 무속과 관련한 노래가 많았다고. 2006년인가 그때 인천방송에서 발해 역사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한·중·일·러 추적 보고-왕국의 부활>에서 일본에 전해진 발해악 네 소절을 복원해 배경음악으로 썼다던데,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방송국이 폐지가 되는 바람에.... 쩝.
 
[二月己未, 己珎蒙等還國.]
2월 을미(2일)에 기진몽 등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3, 천평(天平) 12년(740)
 
대력 3년 2월 2일,《속일본기》에 기록된 바, 일본의 견발해대사(遣渤海大使) 외종5위하(下) 대반숙니(大伴宿祢, 오오토모노스쿠네) 견양(犬養, 이누카이)와 함께, 발해의 사신 기진몽은 본국 발해로 떠났다.
 
10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초서피(貂鼠皮)와 곤포(昆布)를 바쳤다.
《책부원귀》
 
곤포는 이름을 한자로 써서 그렇지 단순하다. 너구리(라면) 사서 끓여 먹을 때 들어있는 다시마. 그게 곤포다. 위진(魏晉)시대에 성립된 《명의별록》이라는 책에 주석을 달아놓은 당조 시대의 《명의별록주》에서는 이미 '고려에서만 나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나라 자체 브랜드, 고유 특산품으로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조선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명의 사신 동월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도 나오고, 17세기 백과사전인 《재물보》에는 이 다시마가 동해에서 나오며 손바닥만한 이파리 크기에 색깔은 황흑색이라고 설명했다. 신라에서는 이걸 바다에서 캐내서 새끼를 꼬아 배 위의 그늘에서 말려서 중국까지 가져와 팔았고, 《신당서》에는 발해의 특산품 가운데 하나로 이 다시마를 거론하면서 그 산지는 남경남해부라 적고 있으니 아마 발해에서 가져간 것도 거기서 캔 것일게다.
 
북송 때(1061)의 《본초도경》이라는 중국 의학책에 보면 고려의 곤포 즉 다시마로 국 끓이는 방법이 실려 있는데, 재미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우선 곤포(다시마) 한 근을 쌀뜨물에 담가서 하루저녁을 묵혀 신맛을 씻어 낸 다음, 물 한 말을 넣어 끓인 것을 세 촌(寸) 간격으로 잘라 4, 5분가량 걸쭉하게 하고, 파 한 줌을 두 촌(寸) 간격으로 썰어 넣고 거의 문드러질 때까지 끓인다. 여기다 소금, 식초, 된장, 쌀가루를 넣어 간을 맞춘 뒤, 국 끓이듯 끓여서 생강, 귤껍질, 후춧가루[椒末] 같은 걸을 넣어서 간을 맞추면 조밥이나 쌀밥과 먹기에 좋다ㅡ고 하더라.(무슨 가사시간 같군)
 
눈여겨볼 것은 초서피, 즉 담비가죽이다. 유명한 중국의 의학서 《본초강목》은 초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초서는 크기가 수달[獺]만 한데, 꼬리가 크다. 털의 깊이는 1촌가량 되는데, 자흑색(紫黑色)이며, 빽빽하게 나 있고 광택은 없다. 가죽으로 갖옷이나 모자, 풍령(風領)을 만들어서 추울 때 입는다. 바람이 불면 따뜻해지고, 물에 담그면 젖지 않으며, 눈을 맞으면 눈이 녹고, 얼굴을 문지르면 불꽃처럼 따스하고, 눈을 문지르면 티끌이 즉시 나오니, 역시 기이한 물건이다.
 
담비는 이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나올 정도로, 부여 때부터 중국에 잘 알려진 우리나라 특산품이었다. (고구려 동천왕이 오의 손권에게 담비가죽으로 지은 옷을 선물한 일도 있음은 앞서 설명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초피(貂皮)를 돈피(獤皮)라 불렀던 것을 《조선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유송시대의 《이원(異苑)》이라는 책에 보면 초서피를 얻는 방법에 대해 재미있는 설명이 있다. 고구려에서 나는 담비는 항상 어떤 괴물, 사람처럼 생긴 석 자 정도 되는 녀석과 함께 동굴에서 살고 있는데, 녀석이 특히나 칼을 좋아해서 초피가 얻고 싶으면 그 동굴 앞에다 칼을 갖고 와서 던져놓으면 된다. 이 괴물은 담비 잡는 데에는 귀신이기 때문에 누가 칼을 던져 놓은 것을 보면 와서 담비가죽을 그 옆에 내려놓고 다시 동굴로 들어가고, 사람이 담비가죽을 가져가고 나면 그제야 나와서 칼을 주워서 동굴로 들어간다는 것.
 
지금은 거의 천연기념물, 나아가 국제보호동물로까지 지정될 만큼 그 수요가 줄어서 거의 '밀렵'이 아니면 담비가죽을 공적인 정상교역루트로 구하기는 어렵게 되었다지만, 조선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에도, 지금의 함경도 이성과 홍원 두 현에서 조정에 진상하는 물품의 하나로 초서피(담비가죽)을 들고 있을 정도로 후대까지도 북도 지역의 주요 특산품 가운데 하나로 기능했던 이 초서피 무역은 발해 때에 이르면 '비단길'과 '초원길'에 이어 '검은담비길(Sable Road)'이라는 이름으로 실크로드 무역의 일익을 담당할 만큼 성황을 이루게 된다. 이건 나중에 좀더 자료가 모이면 얘기해야 되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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