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3092
일본 그곳엔 아직도 발해의 흔적이 남아있었네
[현장답사] 발해사절이 묵었던 교토의 홍로관을 찾아서
12.10.23 14:26 l 최종 업데이트 12.10.23 14:26 l 이윤옥(koya26)
해동성국이라 일컫던 발해(698년~926년)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을 호령하던 나라로 뛰어난 문화 국가였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고 일본과는 200여 년간 교류를 하였으며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으나 끝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유적은 지금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불가마를 연상하는 뜨거운 7월 중순, 교토의 자그마한 역 단바역에서 어렵사리 찾았던 발해유적지 홍로관터를 돌아 보고와서 발해사를 뒤져보느라 이제야 글을 쓴다.
발해 사신들이 묵었던 교토의 홍로관(鴻臚館, 코로칸)을 찾아 나선 것은 지난 7월 중순이었다. 교토시내 단바구치역(丹波口駅) 근처에 있던 홍로관은 지금은 홍로관터였음을 알리는 작은 돌비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홍로관터 옆에는 제법 근사한 일본의 전통건물이 서 있었는데 먼발치에서 이 건물이 홍로관인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가보니 이곳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요정(角室, 스미야)으로 에도시대인 1641년에 세워져 현재는 교토시의 중요문화재이다. 그 건물 끝 모퉁이에 홍로관터 돌비석은 초라하게 서 있었다.
▲ 발해관터 돌비석 왼쪽 건물(오래된 요정) 안쪽 멀리에 발해관터임을 알리는 돌비석이 서있다. ⓒ 이윤옥
▲ 요정 돌비석 옆에 있는 요정건물(1641년 세움)엔 중요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 이윤옥
일본에는 당시 발해사절들의 숙소였던 홍로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1천여 년 전 발해와 일본의 교류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사적지로 한번쯤 발걸음을 해도 좋은 곳이다. 홍로관 유적은 현재 일본에 세 곳이 남아 있는데 후쿠오카(福岡市中央区城内)와 오사카(大阪市中央区高麗橋近辺)그리고 교토 유적이 그것이다.
후쿠오카의 경우에는 홍로관 건물터 유구(遺構)가 발견되어 현재는 홍로관터전시관이 들어서있고 오사카의 경우에는 현재 홍로관터 표시조차 없지만 서기 844년에 오사카 난바(難波)에 있던 홍로관이 당시 관청(摂津国 政庁)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단바구치역과 안내지도 발해관터 돌비석은 JR단바구치역에서 나와 오른쪽 골목으로 200미터 가면 있다. 단바구치역 앞 안내도에는 홍로관터에 대한 안내가 없다(오른쪽) ⓒ 이윤옥
발해사신이 일본에 첫 사신을 파견 한 것은 727년 10월 4일로 이때 발해의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인의(高仁義)를 우두머리로 24명이 파견되었는데 불행히도 풍랑을 만나 데와(出羽, 현재 아키다현 북부)지방에서 변을 당하고 8명이 입경하게 된 이후 총 34회 200년간 교류를 하게 된다.
발해사절단은 보통 100여명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 사절단 속에는 상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들어가는 품목은 주로 담비가죽(貂), 불곰가죽(羆), 호랑이가죽(虎) 등의 모피와 조선인삼, 꿀(蜜蜂)등이었고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간 품목은 비단(絹), 면(綿) 등 이었다.
지금 사람들도 해외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듯 당시 헤이안귀족들 사이의 모피는 대단한 인기품목으로 이에 대한 재미난 일화가 있다. 서기919년에 제34회 발해사절 배구(裵璆)가 입경했을 때의 일이다. 5월12일 풍락전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연회장에는 다이고왕(醍醐天皇)의 왕자인 시게아키라(重明親王)가 검은담비 가죽옷 8벌을 껴입고 나와 배구일행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대일본사, 重明親傳>에 있다. 당시 5월 2일은 양력으로는 6월 7일로 무더운 여름에 해당된다.
▲ 발해사신기록표 발해사신기록표 중에서 -上田雄 ≪渤海?の謎≫- ⓒ 이윤옥
제30회 발해사절(서기 882년 12월)을 맞이하던 일본측 기록을 보자.
"105명의 발해 사절이 일본에 도착했다. 조정에서는 발해사신이 입경하는 동안의 편리를 봐주도록 살피고 관사와 도로, 다리 정비를 서둘렀다. 883년 6월 발해사신들이 입경하자 연도변에 나가 맞아들였고 이중 20명을 홍로관으로 모셨다. 이후 14일 동안 헤이안쿄(平安京)에 체류했는데 발해사절을 성대히 대접했다. 천황이 손수 홍로관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당시 발해사절단에는 뛰어난 문인들이 많이 있어서 일본측 문인들을 초대하여 한시교류회 등을 가졌다."
이러한 한시들은 헤이안시대 한시집인《文華秀麗集, 818년》등에 여러 편 남아 전해진다.(시 번역, 필자)
발해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일생에 한 번 취하여 천상(天上)을 만나네
궁정 바깥으로 무엇이 보이는데
오색구름이 만세에 빛나는구나 -왕효렴(王孝廉)-
귀국에 입조한 미천한 몸이지만
하객으로 정월 7일 성대한 접대를 받았네 다시 보니 춤과 노래 없이
풍류가 바뀐 것을 정월되어서야 알았네 -석인정(釋仁貞)-
석인정(釈仁貞)은 기록담당으로 일본에 와서 왕효렴 등과 함께 6달 정도 교토에 체류하다가 귀국길에 올랐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 지금의 후쿠이현(당시,越前)에 표류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병사했다는 안타까운 기록이 있다.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발해. 발해도 분명히 우리 겨레의 나라였건만 이제 잊혀진지 오래이다. 일본에 가거들랑 그 흔적이라도 더듬어보고 온다면 의미가 있을 터이다.
▲ 동홍로관터의 필자 발해사절단이 묵었던 동홍로관터 비석 앞에 선 필자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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