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5999 

"KBS 기자들 '자기분열증'... 고통스럽다
 공영방송 엉망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자"
[인터뷰] 6개월 '정직투쟁' 앞둔 엄경철 전 KBS 새노조 위원장
12.02.13 14:45 ㅣ최종 업데이트 12.02.13 16:11  백병규 (peacebkb) / 남소연 (newmoon)

▲ KBS 새 노조의 엄경철 전 위원장이 8일 오전 KBS 신관 로비의 농성 천막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남소연

"KBS의 DNA가, 체질이 바뀌어야 한다. 인적 청산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당연히 나올 것이다. 사회 환경이 바뀌고, 권력이 바뀌고, KBS에 제대로 된 공영방송 철학을 가진 사장이 온다고 하더라도 지난 4년 동안 KBS를 이렇게 망가뜨린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KBS가 어떻게 바뀔 수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은 당연하다."

엄경철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KBS 새노조) 위원장. 그는 외부환경이 바뀌어 KBS가 새롭게 거듭날 기회를 갖게 되면 인적 청산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이라고 보았다. 공적 책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책임을 묻고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적 청산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 공적 책임에 대한 분명한 처벌을 통해 또다시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지금 KBS 신관 로비에서 천막 농성 중이다. 1월 30일 6개월의 정직 처분을 통보받았다. 그와 함께 노조를 이끌었던 집행부 간부와 조합원, 전 KBS PD협회장 등 12명도 감봉 2개월에서 정직 6개월의 징계처분을 받았다. 2010년 파업이 '불법'이라는 사유를 들었다. 한참 철 지난 뒤늦은 징계다. 이사회 방해, 노보에 의한 명예훼손도 징계 사유로 들어가 있다.

엄경철 전 위원장을 비롯해 징계를 통보받은 13명은 징계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여러 통로를 통해 재심을 신청해줄 것을 당부해 왔지만 그러지 않았다. 징계 그 자체가 부당하다고 보았다. 바로 법정으로 가 그 부당성을 따질 생각이다.

뉴스 앵커를 맡는 등 기자로서 잘 나가던 그는 2010년 2월 기자들과 PD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KBS 새노조 첫 위원장을 맡았다. 이명박 대통령 특보 출신 사장이 취임하는 등 권력의 KBS 장악이 정점에 있던 때였다. 그는 언젠가 "자신은 '기자의 길'만을 생각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노조의 필요성과 그 역할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자신이 굳이 나설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새노조 첫 위원장을 맡을 때까지 노조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는 평범한 조합원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가 가장 어려울 때 새노조 초대 위원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맡고 나선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였고, 그렇다면 피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위원장에 출마하면서 "15년 동안 평범한 조합원으로 있던 자신이 급격하게 위원장에 나서고자 한다"면서 "이런 급격한 변화, 평범하게 살기 힘든 현실이 지금 KBS의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6개월의 '정직투쟁'을 눈앞에 둔 그를 8일 KBS 신관 로비 농성 천막에서 만났다. 누구보다 '기자의 길'만을 걷고자 했던 그가 체감한 공영방송의 '급격한 몰락'의 실상과 요인, 그 타개방안을 들어보았다. 그는 정권의 향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공영방송을 위해서는 기자들의 프로페셔널리즘 강화, 공적 기구로서의 공영방송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자각과 학습이 중요하며, 인적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적 책임에 반한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묻고 처벌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임 보도본부장 후임 인사에 경악... KBS 기자들도 제작거부 찬반투표
 
 
▲ 2010년 7월 2일 당시 엄경철 언론노조 KBS본부장이 여의도 KBS 신관앞에서 열린 KBS새노조 파업 2일차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권우성

- 고생이 많다. 뒤늦게 징계를 받았는데.
"징계사유란 게 새노조가 출범한 2010년에 일어난 일들이다. 파업까지 하고 그해 12월 회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그때까지 별일 없었다. 그런 뒤 <추적60분> '4대강' 편이 2주 연속 불방되는 일이 있었다. 그때 (보도국의) 정치외교부에서 작성한 '정보보고'를 노조가 입수해 공개한 적이 있다. 청와대의 외압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다.'KBS가 천안함도 하고 4대강도 다루고 왜 이러냐. 시청료 문제도 있는데 이러면 곤란하다'는 내용이었다.
 
파장이 컸다. 바로 그 다음 날 징계카드를 꺼냈다. 노조간부와 조합원 60여 명을 무더기로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저와 부위원장까지 하고 인사위원회를 중지했다. 우리가 하루고 이틀이고 진술투쟁하겠다, 그러니까 인사위원회를 중지했다. 더 이상 열리지 않다가 1년이 훨씬 넘어 올 1월에 인사위원회를 재개하겠다고 통보가 왔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회사가 왜 뒤늦게 이 문제를 다시 꺼내 들어 문제를 만드는지 회사 간부들까지 의아해 한다."

- MBC 노조가 끝장파업에 들어갔다. 기자들의 제작거부가 도화선이 됐다.
"여러 생각이 하게 되는데, 기자들이나 저널리즘을 맡고 있는 구성원들이 이렇게까지 하게 된 근본에는 마음에, 정신에 심각한 자기분열증 같은 게 있다. 회사는 공정방송, 언론의 독립, 자유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자신의 기사나 프로그램은 반대로 가고 있는 상황 아닌가. 개인적으로 저항하고 싸워봐야 아무런 소득 없이 다치기나 하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개개인 내면에서 심각한 자기분열증을 앓아온 거다.
 
너무 힘들다, 고통스럽다, 이렇게까지 해서 밥벌이하는 게 맞나, 이런 근본적인 자기 질문을 내내 해왔던 거라고 본다. 그게 쌓이고 쌓여 이런 형식으로 돌출된 게 아닌가 싶다. KBS와 MBC 기자들이나 PD들은 정말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보수와 직업적 안정성, 사회적 인정을 받고 일하는 집단인데 그에 걸맞은 밥값을 하고 있느냐고 자문해 보면 할 말이 없다. 아주 쉬운,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서부터 꽉 막혀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싸움들이 잠시 잦아들었다가 돌출된 게 아닌가 싶다."
 
KBS 기자들도 제작거부 찬반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7일 KBS기자협회는 222명의 기자들이 참석해 86%의 찬성으로 제작거부 찬반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2∼3일 안에 KBS 기자들도 압도적인 찬성으로 제작거부를 결의할 것 같다"는 게 엄 전 위원장의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공영방송의 정상적인 뉴스 제작이 모두 멈추게 된다. KBS, MBC 공영방송 양 방송사의 일선 기자들이 전면적으로 마이크와 카메라를 놓는 것은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다.

- MBC의 경우 기자들이 불공정 보도에 대해 보도책임자들의 문책을 요구했지만, 사장이 이를 거부한 것이 결국 제작거부, 노조파업으로 이어졌다. KBS에서는 보도본부장에 대한 노조의 불신임을 사측이 받아들였던 셈인데.
"보도본부장 신임 투표 결과 압도적인 불신임이 나왔고, 고대영 보도본부장이 사의를 표명하고 그만두었다. 고대영 보도본부장을 왜 불신임했겠느냐. 국장, 보도본부장 재임 시절의 여러 가지 편파적인 행위에 대한 심판인데 그 후임을 그 사람과 거의 동일한 사람, 더 심한 사람으로 앉힌 것은 불신임을 수용한 게 아니고 수용한다는 제스처만 취한 것이다.
 
이런 점도 있을 것 같다. KBS에서는 지금 많은 간부들이 보도본부장을 하려 하지 않는다. 사장 임기가 1년도 안 남았고, 권력도 끝나가는 것 같고, 이 난파선에 타봐야 아무런 득이 될 게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다 안 하려고 하는데 그나마 하겠다는 사람이 그런 사람밖에 없는 거다. 사장은 또 인사권이 훼손당하고 휘둘리게 되면 리더십이 무너진다고 판단하니까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MBC 상황도 비슷하다고 본다."

KBS 새노조와 기존노조는 1월 12일부터 18일까지 고대영 보도본부장과 박갑진 시청자본부장에 대한 신임투표를 실시했다. 고 본부장은 84.4%, 박 본부장은 60.7%로 불신임했다. 노조는 단협에 따라 사측에 이들 두 사람의 '해임'과 '인사이동'을 촉구했다. KBS 단협은 노조의 불신임 투표 결과 불신임 비율이 3분의 2가 넘으면 '해임'을, 과반이면 '인사조치'를 건의할 수 있다. 고대영 보도본부장은 불신임 결과가 나오자 자신 사퇴했다. 김인규 KBS 사장은 그 후임에 <추적60분> '4대강' 편의 불방 등으로 논란이 됐던 이화섭 부산방송총국장을 임명해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진실 '탐색'은 하지 말고 '중계'만 하자는 'KBS저널리즘'

엄경철 전 위원장은 MBC나 KBS 노조가 뒤늦게라도 싸움에 나선 것에 대해서 이런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KBS와 MBC 구성원들이 싸우는 근본적 이유로는 어떻게 항상 권력이 바뀌는 것에 승차해 시스템을 바꾸고 보도를 바꿔야 하나, 그것이 결코 정답일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우리 힘으로 뭔가 기반을 만들고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아니냐는 자괴감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도 권력의 변화, 정권이 추구한 각 분야의 자율성, 자유라는 정책에 따라 KBS가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사실은 외부의 환경변화에 따른 내부변화였다. 제대로 된 구성원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할 수 있는 환경, 의식, 문화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이를 제대로 못 했다. 지금이라도 그것을 해서 나중에 외부 환경이 바뀌면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목소리라도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 권력이 바뀌어 사장 한 사람 왔다고 해서 공영방송이 뿌리부터 송두리째 무너진다? 지금 현실이 그렇고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다. 간부들이나 일선 기자, PD들이 끝까지 저항했다면 이렇게 됐을까.
"사실 사장 한 명 바뀌었다고 KBS가 무너지고 바뀌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장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내부에 충분히 그렇게 바뀔만한 허약한 체질이 있었던 것이다. 가령 KBS의 보도 철학, 원칙을 말하자면 크게 사실의 전달, 진실의 탐색 두 가지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다. 사실의 전달은 불편부당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진실의 탐색은 어떤 정치적인 외압이나 힘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불편부당한 사실 전달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지키려고 한다. 좌우, 여야의 목소리를 공평하게 전달하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일정하게 하고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사실 자체를 전달하지 않는다. 노동관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 데서 구멍이 크게 나 있다.

두 번째 진실 탐색은 더 어려운 것 같다. KBS의 과거의 역사는 철저하게 진실 탐색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왜냐면 진실을 탐색하다 보면 분명히 강자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권력에 대한 진실을 탐색하다 보면 권력 비판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KBS가 여야 관계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정치적인 프레임으로 환치시켜 버린다. 진실의 탐색은 누구에게 유불리한지를 따져서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보도해야 하는 데 어느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한 쪽만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프레임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 KBS가 문민정부 들어서면서 군사정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데서는 벗어나 어느 정도는 기계적 균형을 지키자는 데까지는 왔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기계적 균형 속에서 진실 탐색을 포기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권력을 편드는 꼴이 됐다."

그는 그런 배경에는 이른바 'KBS저널리즘'의 폐해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 속에 체화돼 있는 KBS의 DNA, 체질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력 20년 30년 선배들의 의식구조에는 진실을 탐구하다 보면 정치에 개입하게 되는 것 아니냐, 그것은 KBS 저널리즘에 옳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 KBS의 DNA와도 같다. 여야 편을 들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전달해주면 된다, 진실을 파헤치고 해석하면 결국 주관성이 개입하고, 그게 KBS 저널리즘을 편파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들이 밀고 있다. 외견상으로 보면 옳은 것 같지만 거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많다. 권력이 하는 말은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 서구 저널리즘에선 너무 당연한 원칙 아니냐. 그런데 지금 그것을 검증하지 말고 전달만 하자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1인 저널리즘이 그것을 검증하고 진실을 탐색하고 있는가. 그런데 거대 언론인 KBS가 그것을 하지 말자는 게 말이 되나. 근본적인 체질의 변화, 유전자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정치적인 외풍에 따라 KBS가 흔들리고 좌우되는 그런 상황은 언제든 벌어질 수밖에 없다."

- 간부급 선배들이 실제 검증하지 말고 전달만 하자, 이렇게 내놓고 말하나.
"그렇다. KBS 보도가 뭐가 문제냐, 당신들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 저널리즘을 행사하자는 것인데 곤란하지 않느냐, 이런 말 되게 많이 한다."

1분 30초짜리 보도하려고 그 어려운 '언론고시' 준비했나?
 
 
▲ "지난 몇 년간은 노조는 노조대로 제 역할을 못하고, 회사는 희한한 방향으로 가고, 사회적으로도 원칙이나 상식이 무너졌다. 이런 요소들이 복합되면서 KBS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나 싶다." ⓒ 남소연

- 그것이 그분들의 신념일까, 아니면 자기분열적 합리화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기자 사회만 놓고 본다면 프로페셔널리즘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 빈 곳에 자리욕심이 자란다. 기자 사회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한다면 1시간짜리 심층 탐사 보도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하는 거다. 기자의 자긍심과 프로페셔널리즘을 높일 수 있는 계기나 장이 마련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굳이 자리를 크게 탐하지 않게 된다. 그런 작업을 하게 되면 어떤 자리를 맡지 않더라도 충분하게 자존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지금 <9시뉴스>를 보자. 1분 30초짜리 보도다. 그런 보도는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다. 굳이 100대 1 시험 보고 들어와 해야 할 보도가 아니다. 전문성도 생겨날 수가 없다. 그러면 자기 자존감을 높이는 길은 특파원 가고, 앵커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그러는 것이 된다. 자리에 대한 욕망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KBS의 현재 권력에 충성하게 된다. 기자들은 탐사보도 같은 큰 프로그램들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자리를 탐하지 않고, 조직이 건강하게 될 수 있다."

- 그렇게 해야 하는데, 현실은 한참 과거로 퇴행했다.
"20, 30년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도 순식간에. 물론 완벽하게 과거로 회귀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내부 구성원들의 건강성이 과거보다 훨씬 낫다.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런 열망도 크고…."

그는 기계적 균형의 함정에 빠진 'KBS저널리즘'의 문제와 함께 KBS에 대한 구성원들의 '공적의식'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대단히 많은 KBS 구성원들이 KBS를 우리기업, 자기회사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기구라는 생각이 무척 약하다. KBS는 국민의 돈으로 만들어져 운영되는 사회적 기구이고, 이런 공영방송사를 만든 사회적 합의의 근본에는 언론의 자유를 대신 표현하고 문화를 대리 표현하는 역할을 맡아달라는 주문이 담겨 있다. 우리는 대리인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기구를 어떻게 잘 운영할 것인가 하는 공적 마인드가 앞서야 하는데 창피하지만 나부터도 회사 들어와 그런 공적 마인드를 제도적으로, 시스템적으로 교육받아 본 적이 없다. 물론 KBS는 어떤 기구이며 어때야 한다는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명제들은 많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어떻게 고민해야 하고, KBS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각성하는 계기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각성의 계기가 있었다면 이런 파업,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서다. 회사를 통해 각성해본 적은 없다."
 
 
▲ 여의도 KBS 전경. ⓒ 민원기

- 정치권력의 향배에 따라 공영방송이 휘둘리는 상황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노조 위원장을 2년 하고 이런 싸움을 하면서 많이 했던 고민이 있다. 어떤 권력이 오더라도 공영방송으로서의 독립성을 지키고 자율성을 갖고 제 역할을 하자면 뭐가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크게 3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큰 틀에서 보면 공영방송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전통의 수립,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KBS 내부의 제도적 시스템, 그리고 내부 구성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영국 BBC 이야기를 많이 한다. BBC도 정치적으로 사장이 임명된다. 총리가 임명한다. 당연히 정치색이 짙을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BBC의 고유기능은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있다. 그럴 수 있는 큰 전통 중 하나는 BBC라는 문화기구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각, 자부심이 굉장히 크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장이 와도 BBC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게 되면 그것이 고스란히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권력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BBC를 손대는 게 권력에 해가 되는 시스템이 돼 있는 거다. 마찬가지로 KBS나 MBC를 손대면 권력에 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학습, 전통이 크게는 필요한 것 같다.

두 번째로는 내부의 제도적 시스템인데, 지금은 사장의 권력, 회사의 권력이 일방적이다. 기자나 PD들이 자율성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자신의 양심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그래서 국민들의 언론 자유를 대리 실현할 수 있는 자율적 공간이 너무 적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KBS는 협치가 중요하다. 사장이 일방적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끌어나가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KBS라는 공익을 실현하는 기관은 공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토론과 비판이 필요하기 때문에 협치를 해야지 사장이 독단적으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BBC처럼 이사회가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BBC 트러스트는 수시로 영국인들이 BBC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사해서 집행부에 제시하고, 왜 그렇게 못하는지를 따져 묻는다. 그런데 KBS 이사회는 사장이 하는 일을 감시하고, 조금 비판하고, 거수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것에 대한 보충이 필요하다.

세 번째 내부 구성원들의 의식문제는 우리 구성원들의 몫이다. 이런 싸움들을 자주 해나가면서 스스로 각성하고 학습하는 것, 공영방송의 역할에 대한 자기학습, 이런 게 쌓이면 나중에 외부의 압력이 있더라도 덜 일탈되지 않을까. 노동조합을 새로 만들고 이런 싸움을 하는 것도 그런 각성과 학습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게 다 욕망을 갖고 있다. 추상적인 이념이나 사명감, 역할 같은 것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희석되고 일탈할 수 있다. 그것을 바로 잡아 주는 게 여러 가지 시스템인데, 노조도 그 하나다. 또 회사의 분위기, 사회의 분위기 같은 것도 중요하다, 지난 몇 년간은 노조는 노조대로 제 역할을 못하고, 회사는 희한한 방향으로 가고, 사회적으로도 원칙이나 상식이 무너졌다. 이런 요소들이 복합되면서 KBS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나 싶다."

KBS∙MBC 망가뜨린 사람들 '공적책임' 물어야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엄경철) 파업 7일째인 2010년 7월 7일 저녁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 거리에서 새 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들이 '시민과 함께하는 KBS 개념탑재의 밤' 문화제를 벌이자 KBS 청원경찰들이 참가자들을 둘러싼 채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유성호

- 앞으로 권력이 바뀌고, 외부 상황이 좋아져 공영방송으로서 KBS를 정상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내부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권력의 주문에 순응하거나 앞장선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정상화가 가능할까.
"사회 환경이 바뀌고, 권력이 바뀌고, 지금 사장과는 다른, 공영방송의 철학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사장이 왔다고 치자. 그런데 KBS를 엉망으로 만든 사람들은 그대로 다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 나오는 것이 인적청산 이야기다. 지난 4~5년간 KBS를 개판으로 만든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어떻게 KBS가 바뀔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KBS가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반한 사람에게는 공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급하게 표현하면 되갚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우창 교수 책을 보면 '복수가 정의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는 말이 있다. 복수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시스템화된 것이 법이고, 복수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는 풀이다. 우리 사회는 복수의 문화가 거의 없다. 복수하면 안 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 그 자체는 좋다. 그러나 복수를 통해서, 진상규명이나 처벌을 통해서 미래의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처벌하지 않으면 미래에 똑같은 일을 해도 아무 문제될 것 없다는 심리를 유발하게 된다. KBS를 망가트린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책임을 묻고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 MBC 노조가 끝장 투쟁을 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번엔 결판을 보겠다는 각오다. 정권도 말기다. 환경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김재철 사장이 완강히 버틸 것도 분명하다. 정치권도 총선 일정에 정신이 팔려 있어 이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이기면 MBC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자체 기반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50일, 60일 파업을 해도 김재철 사장이 끝내 물러나지 않고 조합의 내부 사정으로 싸움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된다면 국민에게 이런 호소가 가능할 것이다. '국민 여러분, MBC노동조합의 힘만으로는 이런 사장을 퇴진시킬 수 없고, MBC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 권력을 바꿔주십시오.' 결국 권력 교체 싸움으로 가는 거다. 노동조합도. 노조가 괴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권력을 바꿔서 사장을 바꿔 달라, 이런 호소가 먹히지 않을까.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게 싸움의 종착점이 될 것이다. 사장이 물러나거나, 노조가 지면서 국민에게 바로 호소하거나."

- KBS 기자들도 제작거부를 예고하고 있는데. 
"KBS도 비슷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4년 동안 당할 만큼 당해왔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게 내부 구성원들의 생각이고 감성인 것 같다. 이런 시스템에서 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다. 그 마음을 서로 믿고 그냥 가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고민해본들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이 길이 맞다면 그냥 무식하게 가는 거다. 장렬히 산화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역사적 자산이 될 것이다."

그는 설령 해고자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모두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해고자들을 두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제대로 기자생활, PD생활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게 '힘'이라고 했다.

"잘 웃고, 잘 공감하고, 타인과 눈을 잘 맞추고, 그러나 속생각이 많아 오히려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가끔씩 세게 표현합니다."

그가 2004년 진행하던 8시 <뉴스타임> 누리집 코너에 올린 자기소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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