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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長壽王, 394~491, 재위 412~491)의 시대를 고구려의 정치∙사회∙문화적인 전성기로 부르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장 넓은 땅에, 가장 잘 갖추어진 제도 그리고 선진적인 문화를 이루었다. 남진정책을 펼친 끝에 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은 확실히 한반도의 그것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에 따라 신라와 백제도 자극과 위협을 받았다. 자극은 자극대로 위협은 위협대로 세 나라의 발전을 가져왔다. 장수왕의 80여 년에 걸친 재위 기간이 갖는 궁극적인 의의는 무엇일까.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왕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왕을 이어 등극, 한 해 빠진 80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 말 그대로 장수한 왕이다. 이름은 거련(巨連 또는 巨璉)이었다. 장수한 오랜 시간, 그는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한반도에서 태어난 나라 가운데 가장 큰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이름 가운데 연(璉)은 호련(瑚璉)을 말한다. 호련에 곡식을 담아 천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성스러운 제기인 것이다. 장수왕은 성스러운 제기 가운데서도 큰 그릇이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는바, 장수왕의 시대는 문화적으로도 벌써 절정의 시기에 와 있었다. 이만한 문장과 이만한 규모의 비석을 고구려는, 아니 장수왕은 자신의 문화 상징으로 만들었다. 장수왕은 장수를 넘어 문화의 왕이었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최근 평양의 위치에 대해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고구려가 한반도 안의 주권국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곧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이어지는데,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개로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는 남쪽으로 아산만부터 지금의 경상북도 일부를 차지하였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한반도를 한번 요동시켰다. 그것이 불안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면, 하나의 동인(動因)이 되어 서로가 자극을 받고 발전을 이룬 계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자주 접촉하고 교류하며, 궁극적으로 한반도 안의 사람들이 하나의 동질성을 갖추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장수왕은 한반도의 사람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공글리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맨날 조공을 바친 조공왕이라 섣부르게 비난할 수 없어

그런 장수왕인데 [삼국사기]의 장수왕 조를 보다보면,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기사에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거기 가장 빈번히 나오는 기록이 ‘사신 보내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던 모양이다.

“장수왕의 고구려본기를 보면 40여 차례 넘게 북위(北魏)에다가 조공을 바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고구려가 한 해를 안 거르고 이렇게 자주 그것도 즉위년부터 시작하여 말년에 이르기까지 78년 동안 장수왕은 북위에다가 조공을 바친 조공왕이 되었습니다. 어딘가 이상합니다. 고구려는 북위도 경계할 정도로 성장한 광개토태왕 이래 강대국이었는데, 장수왕 때부터는 이상하게 주변국에 조공을 자주 바치고 북위에는 거의 충성(?) 이상으로 조공을 바친 기사가 보입니다. 허구한 날 바쳤을까요, 혹시 비하하기 위한 과장 기사는 아닐까요?” (인터넷 카페의 어느 기사에서)

 

정말 그럴까? 열심히 조공을 바친 덕분에 장수왕은 오래 살며 나라의 영토를 늘렸던 것일까? 이 기사의 끝에 나온 ‘비하하기 위한 과장’이라는 말이 김부식을 향한 비판인지 분명치 않으나, 이 아찔한 기사와 달리 고대사 전공 학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서, 우리는 장수왕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시각과 만나게 된다.

 

“고구려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중국의 세력이나 몽고고원의 유목민 국가와의 사이에 장기간에 걸친 평화를 유지하였다. 북중국 방면의 국가와는 406년 후연(後燕)과의 전쟁이 있은 이후 598년 여(麗)∙수(隋)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근 200여 년에 걸쳐 한 차례의 전쟁도 없었다.”(노태돈, [고구려사연구]에서)

 

근 200여 년에 걸친 긴 평화의 중심에 장수왕이 있다. 이 같은 평화는 장수왕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런 평화를 이룬 장수왕의 손 안에는 조공정책의 활용(?)이라는 절묘한 정치 역량이 숨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40여 차례, 당시 중국의 실력자인 북위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했으나, 중국 쪽의 역사서를 뒤지면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이것을 겉모습만 보고 장수왕을 ‘조공왕’이라 비아냥대서는 안 된다. 자존심을 죽이며 그가 펼친 조공정책에는 본질적이고 실리적인 무엇이 있었다.



장수왕 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하는, 광개토대왕릉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복잡한 동아시아의 외교에서 더욱 빛난 대외관계의 달인

장수왕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남쪽은 진(晉) 나라가 동진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망하고 그 자리에는 송(宋)이 세워졌다. 420년의 일이었다. 중국의 한족이 북쪽의 오랑캐에게 쫓겨 본토를 내주기로는 역사상 이때가 처음이었다. 북쪽은 바야흐로 북위(北魏)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오랑캐가 세운 여러 나라가 쟁패를 벌이다 마지막에 북연(北燕)과 북위가 패권을 다투었다. 435년, 북위의 공격에 시달리던 북연은 송나라에 신하의 지위에서 섬기겠다고 하며 원병을 청한다. 아울러 고구려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장수왕은 고민에 빠졌다. 북위는 한참 기세를 올리며 새로 일어나는 나라, 북연은 그동안의 관계도 관계려니와, 중간에서 북위의 위협을 막아 줄 방패이기도 했다.

 

사실 북연은 고구려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었다. 북연의 앞은 후연(後燕)인데, 이 나라는 고운(高雲)이 세웠으며, 광개토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宗族)의 의(誼)를 표할 만큼, 고구려와 후연은 한 집안과 같았다. 고운이 피살된 후 그의 부하였던 풍발(馮跋)이 나라를 이어 북연이라 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을 후연과 같은 태도로 대하였다.

 

그러나 북연의 요청이 있던 해 고구려는 도리어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해가 장수왕 23년이었다. 그의 나이 41세, 깊이 경륜을 쌓은 장수왕의 판단에 북위의 존재가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았을 터이다. 물론 사신을 파견한 장수왕의 입장이 북위에 대한 항복은 아니었다. 이듬해인 436년,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에서 북위와 맞붙어 무력시위를 벌였고, 북연의 왕과 백성 다수를 데리고 회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북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현란한 양동책이었다.

 

이 같은 양동책은 남조의 송을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북연이 고구려에 배신감을 느끼고 송과 관계를 맺자 이에 단호히 대처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을 도와주러 출동한 송의 장군 왕백구(王白駒)를 사로잡아 들였다. 43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 큰 분쟁을 막기 위해 왕백구를 송환하고 송과 관계를 회복하였다. 이는 북위를 견제하는 데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송은 한족의 본토수복을 위해 북위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런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미묘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5세기 중반의 동아시아는 국가간의 직접적인 당사국의 분쟁에 그치지 않고 열강이 개입하여 국제적인 차원에서 밀고 당기기가 이어졌다. 그 한 축에 고구려가 놓여 있었다. 고구려는 이 복잡한 국제관계의 톱니바퀴를 현명하게 물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힘이 필요하면 힘으로, 조정이 필요하면 조정으로 장수왕은 절묘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지켜나간 현실정치의 달인이었다.



장수왕의 사신 파견, 아부가 아닌 이념을 가진 정책

북연을 둘러싼 한바탕 외교전이 펼쳐진 다음, 장수왕은 20여 년 넘게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때 북위는 확실히 중국의 패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북위와 긴장과 대립의 상태가 없었을 리 없다. 다만 북위는 서쪽과 남쪽으로의 전쟁에 더 치중되어 있을 때였다. 직접적인 위협만 가해 오지 않는다면 북위로서도 고구려에 대해 한 손을 놓아두자 했을 것이다. 이 또한 장수왕의 현명한 대처의 결과였다. 경계는 하되 자극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가 다시 북위와 사신 교환을 한 것은 465년부터였다. 장수왕 50년이었다. 이로부터 60여 년간 고구려는 북위에 60여 회의 사신을 보냈다. 북위에 쏠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만큼 북위의 세력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특히 472년에는 2월과 7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냈다. 바로 다음 달인 8월, 백제가 사신을 북위에 보내 고구려를 압박해 달라는 청을 넣기 직전이었다. 장수왕은 백제의 동태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다. 3년 뒤인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을 쳤다.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장수왕의 입장에서 자꾸만 커져가는 백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백제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앞서 쓴 대로 평양 천도와 백제 위례성 공격을 통해 장수왕은 본격적인 남진정책에 나섰다. 이것은 고구려가 북쪽으로 경계를 두고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에 안정을 가진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안정은 그냥 오지 않는다. 물론 남북조 시대의 중국이 그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대립으로 고구려가 어느 정도 이득을 보긴 했다. 그러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거중조정을 해 가며 제 위치를 올곧게 지킨 장수왕의 대처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장수왕의 사신 파견을 [삼국사기]에 일일이 기록한 김부식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의 황제 나라에 사대하는 것을 당연시한 사대주의자의 신나는 붓놀림이었을까. 적어도 김부식에게는 그런 혐의가 없잖아 보인다. 김부식 이후 조선에 들어서서는 많을 때 1년에 네 차례나 사신이 중국 땅을 밟았다. 이는 김부식의 경우에서 더 악화된 사대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장수왕의 사신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사신이 필요할 때 사신을 보내는, 사신 본연의 의의를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아부가 아니라 이념을 지닌 그들의 정책이었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미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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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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