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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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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2 - 관미성 공방전

광개토 태왕 즉위 원년 서기 391년 음력 10월, 만 16세의 소년왕 광개토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관미성으로 출정하였다.아마도 소년왕 광개토에겐 그것이 처음으로 직접 전쟁터를 경험해 노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관미성 전투는 백제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모두 나타나 있어, 비록 광개토대왕릉 비문에는 빠져 있지만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오두산성의 모습이다. 현재에는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있는데, 민간인 통제 구역안에 있어 자유로운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비록 산세는 험준하지 않지만 사방이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기 매우 어려운 천연의 요새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관미성은 사면이 심히 험악하고 바다에 둘러쌓여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고구려군은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하였는데, 무려 20여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함락시키고 말았다. 고구려의 관미성 원정에 대해서는 백제 진사왕본기에 보다 자세하게 나왔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왕 담덕이 군사 4만명을 이끌고 북변을 공격해 와서 석현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 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한 만큼, 백제 역시 거기에 걸맞는 대응을 해야 되었지만 진사왕은 그리 용기있는 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직접 나가지 못하였으며, 그리하여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이 함락되고 말았다. 관미성을 빼앗은 것은 이미 겨울로 접어든 음력 10월이었는데, 북방의 혹독한 추위에 단련된 고구려군에게 남쪽의 겨울은 별다른 장애가 되질 못하였을 것이다. 또 관미성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어렵사리 고구려군의 맹공을 견딜무렵, 백제 진사왕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뿐 별다른 지원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결국 승리는 7개 방향에서 총공격을 실시한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이 이끈 7개의 공격로 중에는 해상로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고구려의 주력은 보기병이다. 그러나 광개토 대왕시기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군력도 길렀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관미성 전투가 치루어진 몇년 후의 일이긴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 될 무렵 고구려의 해상작전에 대한 기사가 여러차례 나온다. 그리고 그러한 해상작전의 수행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백제는 해상권 하나만큼은 최강이라고 자부하였지만, 오히려 상대방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오히려 헛점으로 작용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백제 수도 한성으로부터의 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한강과 경기도 일대의 해상권을 우선 장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전이었다. 결국 관미성의 함락은 고구려의 이 같은 봉쇄작전이 주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견고한 요새라 하더라도 후방이 지원없이는 언젠가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관미성이 고구려군에게 점령당함으로써, 백제의 북변은 매우 불안정 하게 되었다. 당시 백제는 한반도 뿐 아니라 산동반도 방면에도 영토를 확보하고 있는 최전성기였다. 고구려와는 인구수에서 거의 대등하였으며 경제적인 규모는 오히려 앞서고 있었던 상태였다. 많은 중국 문헌등이 백제의 중국 동해안 진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만큼, 백제가 동북아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관미성을 빼앗김으로써 산동반도 일대의 영토와 뱃길이 차단될 위기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침류왕은 어떠한 방법을 쓰던 최대한 빠른 시기에 관미성을 회복해야만 되었다. 

그런데 진사왕은 재위 7년만에 고구려로부터 관미성을 빼앗긴 후부터, 돌연  拘原(구원)의 행궁으로 잠적하여 10일동안이나 사냥만 하였다. 그렇다면 왜 진사왕은 왕궁을 버리고 행궁으로 갔을까? 말 그대로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 였을까? 아니면 이미 역모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왕궁을 탈출 했던 것일까? 당시 왕의 사냥은 단순한 놀이라기 보다는 훈련받은 군사의 성과와 조직을 점검하는 일에 가까웠다. 

당시 진사왕의 왕권을 위협할 존재로는 조카 아신이 있었다. 아신은 침류왕의 원자로 정당한 왕위의 계승자이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삼촌인 진사왕이 대신 왕위를 물려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관미성 전투의 패배는 아신에게 결정적인 왕위 교체의 필연성을 촉구하였을 것이다. 왕위를 계승한 아신의 출생에 대해, 단순히 총명하다던가 용감하다는 정도의 미사여구가 아닌 신기한 광채가 밤에 비쳤다는 신화적인 문장이 곁들여 졌다는 것도 충분한 계연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서기 392년 아신왕은 백제 17대 왕위에 등극 하였다. 선대왕의 죽음이 단순한 자연사이던 아니면 반정에 의한 것이던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일은 역시 관미성의 회복 이었다. 그는 곧바로 그의 친외숙 眞武(진무)에게 군사 1만명을 동원하여 서기 393년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총공격을 시작한다. 고구려군이 동원한 4만명 보단 작은 규모였지만, 그곳은 백제 땅이었고 지리적으로도 익숙하였다. 진무는 아신왕의 기대에 호응하며 관미성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군사들의 사기는 중천하였고, 보급로도 고구려보다는 가까웠으니 어느면으로 보나 백제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좀처럼 항복을 몰랐다. 백제는 상당한 守城(수성)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구려군은 수성능력은 백제 보다도 견고하고 지독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랜기간 동안 수많은 유목민족과의 혈전을 통해서 수성전의 기술과 경험을 축적해 왔으며, 해상왕국 백제로서도 넘보기 힘든 투지를 지니고 잇었다. 더구나 고구려군의 기습적인 후방 게릴라전에 휘말려 보급로까지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도 고구려군은 백제가 가장 유리하다고 믿었던 부분을 공략한 것이다.

결국 진무는 아무런 성과없이 회군 할 수 밖에 없었고 관미성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백제 수도 공략에 가장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고구려의 경기도 일대 장악으로 이어졌다. 백제는 안정된 경제력과 인구, 그리고 해상권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비해 근소하게 앞서 나갔으나, 바로 이 관미성 전투를 기점으로 차츰 힘이 크기가 내리막으로 치달앗던 것이다.

관미성의 위치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동안 의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대륙 백제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관미성을 발해연안에서 찾고자 하기도 하였다. 이병도박사나 신채호 선생은 강화도설을 주장하였고, 해방이후에는 예성강 유역설이 등장하였으며, 임진강·한강 교회 지점설 등이 어지러이 제기되었다.

관미성 위치에 대한 기록은 우연히 한 육사생도가 찾아 낸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년) 교하편에 있었다 . 거기엔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란 문구가 있었다.

물론 이 오두산성이 관미성이라고 최종확인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우선 대동지지는 관미성 전투가 벌어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작성된 문서라는 점이다. 핵심사건과 그것에 대한 고증자료의 시차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확인이 불가능한 사건과 이야기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대동지지에서는 왜 그곳을 관미성이라고 했는지 분명한 논증이나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도 아쉽다. 그리고 몇차례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의 유물이 출토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다소 회의적으로 보게끔 만든다.

그럼에도 광개토태왕이 7개 방면으로, 20여 일에 걸쳐 힘겹게 공략한 후 겨우 함락시킬 정도로 ‘사면초절’하다는 점과, 밀물 때는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해수환요’의 역사적 기록과 부합된다. 산성이 지리적인 위치를 보아도 교동도나 강화도설보다는 훨씬 민감한 지역이다. 또 성의 축성기법 자체가 정상부를 띠로 두르듯 쌓았고, 산기슭을 ㄴ자로 파내고 한 쪽만 석축한 백제 산성의 특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이곳이 최소한 한성백제와 관련이 깊은 유적지인 것은 분명하다.
 
오두산성은 아직 확정할 수 없지만, 관미성과 관련한 여러 고증 중 가장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유적지를 통해, 고구려 역시 한강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고구려 역시 우리의 역사이고, 제국의 중심이 한반도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하는 것이다. 또 한반도를 고구려의 중심으로 보는 시각을 국수주의로 폄하 하며, 반드시 고구려의 평양의 요동이나 요서에 있어야만 합당하다는 주장은 다시 한번 생각되어져야 한다. 

일찌기 고대 로마제국 역시 수도가 이태리 반도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지 않았는가? 한마디 덧 붙이자면 이태리 반도에 수도가 있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로마제국을 소국으로 보지는 않는다.

고구려의 수도는 광개토 대왕이전에는 압록강 북부의 졸본과 국내성에 있었지만,  광개토 태왕 후부터는 평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평양을 중심으로 동북아 전역으로 세력을 떨쳐,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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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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