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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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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4 - 비려 정벌기

백제와의 치열한 접전에서 연이은 대 승을 거둔 광개토 대왕은 이번에는 북진정책을 실시한다. 서기 395년, 바로 광개토대왕릉비에 최초로 정복기사가 나오는 장면이다. 비문에는 영락이라는 연호를 쓰고있다. 연호란 한마디로 어떤 기준으로부터 헤아려지는 1년의 햇수를 가리킨다.. 비문에는 영락 5년이라 돼 있음으로, 광개토대왕이 재위한지 5년이 지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비려 - 혹은 패려(稗麗)로 발음 - 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현재 비려족은 거란의 한 갈래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홍안령 산맥 서쪽에서 발원하는 염수(鹽水, 시라무렌 강) 상류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목민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 학설이다. 그런데 진나라가 멸망하고 다섯개의 북방민족과 16개의 국가가 어지럽게 들어서는 중국의 혼란을 틈타 홍안령(싱안링)산맥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1영을 단순하게 백명이 사는 부락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600~700영 정도의 규모라면 작은 국가를 이를 수 있는 정도의 규모였다. 

비려족은 이미 4년전에도 고구려를 침범하여 최소 1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생포하여 갔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고구려의 원정은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을 우선 생환시키고 비려족을 국경 밖으로 밀어 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백제와의 전투를 통해 고구려군의 전투력이 극대화 되자, 태왕은 비려족 본거지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염수의 위치


일부 중국학자들은 염수를 염난수로 보고있는데, 이 염난수는 국내성을 휘감고 나와 압록강과 합류하는 강의 옛 이름이다. 그러나 국내성에는 부산이란 지명도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鹽水라는 명칭은 소금 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소금이 전혀 나지 않은 염난수나 압록강은 전혀 맞지 않는다. 또 국내성은 그때까지 고구려 수도였는데, 수도 근처에 600~700영에 달하는 이민족 부족이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며  돌아오는 길에 거쳐갔다는 양평도는 요양이었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다. 소와 말 양등을 수없이 획득하였다는 것으로 보아도, 비려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현재 중국 내몽골자치구 지역에서 벌어졌던 사건임은 틀림없다.

여러가지 고증 결과 염수는 말 그대로 소금성분의 물이 흐르는 강을 뜻하는 것이며, 이것은 요하강 상류의 사무렌강이라는 것이다. 사무렌강에는 아직도 염전이 있고, 또 소금침전물이 쌓인 호수도 있다. 더우기 돌아오는 길에 사냥까지 하였다는 것은, 그곳을 영토로 완전히 복속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광개토 대왕은 홍란령 산맥을 넘어 비려를 정복하고 그곳을 영토로 확보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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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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