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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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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6 - 경자 대원정

서기 399년 광개토 대왕 재위 9년 고구려는 위기를 맞이한다. 서쪽에선 선비족의 한 일파가 세운 후연이 점점 강성해져 북경지역(아래 그림의 전연으로 표시된 부분)까지 점령하였으며, 백제는 항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야, 왜의 3국 동맹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 백제의 목표는 고구려보다는 공격이 수월한 신라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는 물론이고 가야연맹에게도 군사력이 뒤쳐졌고 왕호체제도 이루어지지 않아 이사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광개토 대왕본기는 물론 당시 신라왕이었던 내물 이사금조를 비롯하여, 삼국사기 어디에도 경자 대원정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내물 이사금 37년 기록에 이찬의 아들 실설을 고구려에 볼모로 잡혔다는 내용이 나오고, 또 광개토 대왕비문에는 이와 관련있는 내용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더구나 내물 이사금 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닷새 동안이나 포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광개토대왕의 비문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는 아마도 광개토 대왕이 대원정에 관련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 

경자 대원정에 대한 광개토 대왕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영락 9년(399)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平穰)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와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쳐서 신라성(新羅城;國都)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 … 신라성□성(新羅城□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즉, 백제, 가야, 왜의 3국 연합군조차 고구려군의 강성함에는 적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식으로 해석 하던지 당시 한반도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 최근에는 백제의 요구에 의한 용병제공으로 해석 하는 경향이 다수이다. 아무튼 경자 대원정이 한반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우선 가야연맹의 약화를 둘 수 있다. 이것으로 인해 신라는 가야연맹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상당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 역시 고구려의 엄청난 힘을 보게 됨으로써, 고구려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고구려는 공공연하게 신라병합의 의도를 내 비치며 병력 일부를 신라 영토내에 남겨 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광개토 대왕이 삼국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신라왕으로부터 조공관계를 확립시키고, 일본과 가야군을 격파하여 백제 배후의 후방세력까지 제압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광개토 대왕으로서는 5만의 대군을 남방전선에 언제까지나 투입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 재위 9년 서기 399년에 후연에게 공격을 받아 , 무려 서쪽 당 700여리를 잃은  잃은 치욕적인 사건이 있었다. 고구려로서는 치욕이었기 때문에, 광개토 대왕비문에는 빠져 있었으리라, 비문은 어디까지나 선대왕의 치적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5만명의 병력을 남쪽 전선에 투입한 것은, 그만큼 신라의 사정이 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신라가 무너지면 남쪽 전선 전체가 적대적인 세력으로 바뀌게 되고, 그러면 결과적으로 앞뒤에서 적을 동시에 맞아야 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따라서 광개토 대왕으로서는 최대한 빠른 시기에 남쪽 전선을 안정화 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광개토 대왕은 삼국통일을 바로 눈 앞에 두었으면서도 군사를 회군 시킬 수 밖에 없었다. 보다 크고 보다 시급하며 보다 강력한 적을 막기위해....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포기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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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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