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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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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8 - 북연과의 종족동맹

기나긴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고구려만큼이나 외부침략에 시달린 때는 없다.  또 그 고구려 역사속에서도 광개토 대왕만큼이나 다양한 적을 맞아 싸운 시대도 없다. 물론 그것은 광개토대왕비의 해석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다. 즉 어느시대보다 정확한 연구가 가능하기에, 보다 다양한 사건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광개토대왕 시기는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팽창정책을 펼쳤던 극성기이다. 따라서 다양한 적들과 접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남쪽의 백제가 그렇고 서쪽의 후연과 거란, 북쪽의 부여등은 모두 적대세력이라 할 수 있다. 후연의 고구려 공격은 매번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왕의 재위 15(삼국사기를 기준으로)년 서기 406년에도 이루어졌다.

원래 후연의 모용희는 거란을 치기 위해 7월에 출병하였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12월 한 겨울에 퇴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후에서 고구려가 공격해 올 것을 염려한 모용희는 고구려의 목저성을 선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용희의 큰 실책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연의 군대는 3000여리의 행군으로 얼어 죽은 자가 많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오랜 전쟁으로 심신이 피로한 병사를 이끌고 한겨울철에 공성전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모한 작전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수성전에 특히 강한 고구려였다.

이 전쟁은 후연왕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후연은 얼마가지 못하여 멸망하고 말았으며 뒤이어 북연왕조가 들어섰다. 그런데 북연왕조의 성립은 고구려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북연의 왕 雲(운)의 조부는 高和(고화)로 고구려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북연왕은 원래 모용보의 호위무사인데, 모용보가 마음에 들었던지 양아들로 삼게되었고, 마침내 왕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북연에 사신을 보내고 종족의 예를 나누었다. 또 이렇게 북연과 종족의 예를 나누게 됨으로써 그동안 늘 불안정 하였던 요서방면의 영토도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북연과 이와같은 대등외교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단지 북연의 왕이 고구려계 인물이어서만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늘 거론되는 말이긴 하지만, 권자는 오직 하나고 권력은 결코 부모 자식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고대 국제관계에 있어서 힘의 논리는 특히 중요했다. 오직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법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 대왕은 힘의 균형을 오히려 이용하였던 것이다. 북연의 고구려계 왕조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고구려의 지방정권은 아니다.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나라이다. 백제 역시 고구려계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북연 역시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쌓인 상태였고 이제막 새 왕조를 연 신생국가였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고구려 같은 강대한 나라와 적대관계를 유지한다면, 후연과 다를것이 없는 길로 빠져 들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던 차레 고구려의 종족 동맹은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서로가 이익인 윈윈 전략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반드시 어떤 나라를 점령하거나 굴복시켜, 광대하게 땅을 넓혀야지만 훌륭하고 위대한 업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전재로 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당연히 승리로 이끌어야 겠지만,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은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발위하여 북연과 종족동맹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외교 뒷면에는 그것을 성사시키게 만들었던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정치적 역량이 함께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교란 바로 그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추어 졌을 때 우리에게 우월하게 작용하도록 만들 수 있는 국제관계의 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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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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