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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태왕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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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왕 광개토 7 - 광개토대왕의 위기

즉위 초부터 팽창정책을 펼쳤던 광개토대왕. 그러나 재위 14년 서기 404년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미 재위 9년에 신성과 남성을 포함한 요서지방의 영토 700여리를 빼앗았던 후연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 온 것이다. 서기 400년에 있었던 경자대원정으로 남쪽 전선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고 생각했던 광개토 대왕은 그동안 잃어버린 영토를 찾기 위해 꾸준히 서진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재위 11년 서기 401년에는 후연의 평주지방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재위 13년 음력 11월에 군사를 내어 후연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하기에 이르렀다. 

광개토 대왕의 후연에 대한 공략은 비문에는 없고, 삼국사기에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원정이어서 대왕의 비문에는 생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당시 공략지점이 어디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미 평주성을 점령한 것으로 보아, 후연의 도읍이자 현재 중국의 수도인 북경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광개토 대왕 재위 13년과 14년 사이 삼국사기에는 빠져 있지만 매우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우선 광개토 대왕의 비문부터 살펴보자.

14년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지역을 침략하였다.  백잔국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連船(연선).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죽은 적은 수없이 많았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나와있는 14년 갑진년이라면 서기 404년에 해당한다. 즉 삼국사기에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략하고 있었던 그 시점이었다. 광개토대왕은 후연 공격을 위해 대부분의 전력을 서쪽 전선에 투입해야 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정보는 백제에게 입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백제가 역으로 해상을 이용하여 대방지역을 침략한 것이다. 여기서 연선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줄지어 늘어선 배'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체적이다. 연선이라고 해서 연결되어진 배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변화 무쌍한 파도와 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수십여척의 배를 연결시켜 놓는 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꺼번에 자살할려고 작정한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는 사행진이란 전략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략은 배의 늘어선 형태가 뱀처럼 길고 유연하다는 뜻으로, 적 함대의 대열을 돌파하거나 흩트려 놓는데 매우 효율전인 전략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전술이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승산이 높지 않은 백제와의 해상전을 피하고 육상전을 선택하였다. 육지에서라면 우수한 기마병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그런데 백제는 다소 방심한듯하다. 왜냐면 그동안 백제를 줄곧 괴롭혔던 고구려의 수군이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시에 상륙하여 석성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석성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평양성으로 들어오는 매우 중요한 관문인듯 하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석성의 언덕에서 만났다. 정확한 지명은 지워져 알 수가 없지만 기마병들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정도로 완만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광개토대왕은 직접 기마병을 이끌고 백제군의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비문에는 한결같이 왜군으로 나와있지만, 그것은 백제가 부족한 병력을 충원시키기 위해 일본군의 비율을 높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비문에는 백제와 일본 연합작저은 일본이 전쟁을 주도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당시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백제는 속국과 같은 나라이고 또 일본 보다 낮게 평가하였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즉 광개토 대왕비는 철저하게 고구려적 관점에서 쓰여졌던 것이다.
   
전쟁은 일방적인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승리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이제 고구려는 더이상 후연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후방의 백제는 몇번이나 거듭 패하였으면서도,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새로운 심장부를 공격해 오지 않았는가? 백제는 여전히 엄청난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언제든지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할 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전력이 분산되자 후연은 다시 기세를 올려 요동성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서기 405년에는 요동성이 함락위기까지 몰리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총력을 다해 요동성을 지켜내고 후연을 서쪽으로 다시 밀어내기는 하였지만, 요서지방은 황폐해졌고,  영토로서의 가치도 낮아졌다.

이후 한동안 고구려의 팽창정책은 주춤하게 된다. 군대를 양성하고 국토를 복원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광개토 대왕비문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광개토대왕은 결코 전쟁에만 능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와 경제에도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뛰어난 재응이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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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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