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길 받아쓰기'가 초래한 결과... 처참한 기사 제목들
[박정훈이 박정훈에게] 내란 동조·부정선거 음모론 확대 재생산... 전달이 아니라 검증이 언론의 책무
사회 박정훈(twentyrock) 25.02.06 12:00ㅣ최종 업데이트 25.02.06 12:00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전한길씨가 지난 1일 부산에서 진행된 '세이브코리아' 주최 탄핵 반대 집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유튜브 채널 '꽃보다 전한길' 갈무리
 
"불의한 재판관들의 (탄핵) 심판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헌재를 휩쓸 것이고, 그 모든 책임은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윤석열 탄핵 반대 여론을 이끌며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1일 부산역 앞 탄핵 반대 집회에서 발언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재판관 네 명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 재판회피나 자진사퇴를 하지 않는다면 탄핵 심판에 불복하고 헌재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보인 셈입니다. 사실상 재판관들에 대한 '협박'이자, 폭력 행위를 조장하는 이 발언의 파장은 컸습니다.
 
 
"사제폭탄을 준비 중입니다. 전한길 선생님의 쓸어버리자는 말씀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2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바치겠습니다."
 
전씨의 유튜브에 올라간 '부산역 집회' 영상에 달린 댓글입니다. 이같은 '폭탄 테러' 예고에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결국 댓글을 단 40대 남성이 "실제로 실행할 의사는 없었다"라며 자수를 했다고 합니다.
 
정훈님, 저는 전씨의 발언이 굉장히 우려스럽습니다. 헌법재판소에 대한 테러나 폭력 행위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또 그것이 마치 '옳은 길'인 양 왜곡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탄핵 심판 불복' 선동이 이어진다면, 폭력의 씨앗은 계속 자라나게 되고, 그것은 제2의 서부지법 폭동 혹은 더 큰 폭력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번 '폭탄 테러' 예고를 결코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전한길 받아쓰기'
 
▲지난 1월 19일 유튜브 채널 '꽃보다 전한길'에 공무원 한국사 일타 강사 전한길(본명 전유관)씨가 부정선거 의혹을 설파하는 영상이 올라왔다.유튜브 채널 '꽃보다 전한길' 갈무리
 
전씨는 공무원 한국사 '1타 강사'로, 또 재치 있는 말솜씨로 상당한 인기를 끌어왔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했고, 개그맨들의 패러디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계엄령은 계몽령"이라며 '윤석열 탄핵 반대'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또한 언론은 전씨가 '유명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보도를 내며 '탄핵 반대 전선의 가장 큰 스피커'로 키워줬습니다.
 
일례로 지난 1월 19일 전씨의 유튜브에 올라간 '대한민국 혼란 선관위가 초래했다'는 영상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비상계엄을 두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영상이 화제가 되자 언론은 전씨의 말을 받아 썼습니다. 그는 유력 정치인이거나 관련 부문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심지어 개인 유튜브 방송에서 근거가 불분명한 발언을 한 것인데, 그런 일방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까지 일일이 보도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전한길씨의 발언을 따옴표만 쳐서 제목으로 쓴 기사들네이버 뉴스 캡처
 
물론 일부 언론은 그의 발언을 비판적으로 다루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전한길 "대한민국 혼란 선관위가 초래">, 이런 식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에 기반한 그의 발언을 제목에 써서 그대로 전달할 뿐이었습니다. "대만처럼 수개표하자"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이미 수개표는 한국에 도입돼 있다"라고 설명한 기사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말미에 짧게 덧붙이는 데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전한길씨의 유튜브 영상, 집회에서의 발언 내용은 검증이나 비판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씨의 영향력을 키워주는 동시에, 언론이 갖고 있는 공신력을 통해 그의 발언을 '유의미한 의견'처럼 여겨지게 합니다. 언론은 "○○이 ~을 말했다"를 전달할 뿐이지만, 독자들은 그것을 진실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짜뉴스 퍼트리는 언론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 등 법사위 소속 의원들이 1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를 항의 방문하고 있다. 이날 권 원내대표는 "2020년 이 대표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상가에 방문했고, 이를 자랑삼아 헌재 관계자들에게 얘기할 정도로 이 대표와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공동취재사진
 
"선진국 주류 언론은 기사 제목에 따옴표를 넣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은 남의 말을 옮겨주기만 하는 따옴표 제목이 넘쳐흐른다. 선전 도구로 전락하는 일이라는 끊임없는 비판에도 버텨온 관행이다. 속보 클릭 경쟁 환경에서 지금도 사이비 민주주의자의 전략적 발언을 옮기기에 급급하다. 굳이 내란 옹호 주장을 옮겨야 한다면 직접인용 말고 '홍길동, 사법 집행 또 비난'이란 식의 진짜 사실, 진실을 말해야 한다. 기사 안에서도 '그가 말했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말한 바'의 사실 여부를 알려야 한다. "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쓴 지난 2일 <경향신문> 칼럼은 12.3 내란 사태를 보도하는 언론의 '따옴표 저널리즘' 관행을 지적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음모론이나 폭력을 선동하는 주장을 기사로 옮기는 것에 신중을 기하지 않는다면, 강 교수의 말처럼 언론은 내란 옹호의 '선전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정훈님도 아시겠지만 사실 전씨뿐만이 아닙니다. 유력 정치인의 발언은 '속보'를 달고 급속도로 퍼지지만,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권 원내대표의 "한덕수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 임명할 수 없다"는 발언은 팩트체크 결과 거짓이었지만 일부 언론은 권 원내대표의 말을 그저 받아쓰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권 원내대표는 지난 1월 22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며 "2020년 이 대표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상가에 방문했고, 이를 자랑삼아 헌재 관계자들에게 얘기할 정도로 이 대표와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곧바로 <연합뉴스> 등을 통해서 보도됐습니다. 하지만 문 권한대행이 이 대표 모친상에 조문을 간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유력 정치인의 말을 빠르게 받아써서 기사화하는 관행이, 언론을 '가짜뉴스 진원지'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월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탄핵 찬성 집회는 대부분 중국인 맞네요"라는 내용이 포함된 출처 불명의 글과 사진을 올리자(나중에 삭제), 이를 검증 없이 단순 인용한 언론들도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언론이 '가짜뉴스'를 퍼트리고자 작정한 것이 아닐까요?
 
'끝나지 않은 내란'에 대응하는 언론의 자세
 
▲언론노조와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PD연합회, 한국영상기자협회 등 총 8개 언론현업단체들이 지난 1월 6일 오후 서울 중구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긴급회견을 열고 "내란범죄 지지 및 옹호 보도 즉각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이정민
 
"언어는 그것이 프레임, 원형(prototypes), 은유, 서사, 이미지, 감정에 상대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힘을 얻는다. 언어의 힘 중 일부는 그것의 무의식적 측면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가 언어가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숨겨진 채 항상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반복해서 들으면, 그 언어가 활성화하는 프레임과 은유를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언어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동일한 프레임과 은유가 활성화되고 따라서 강화된다." -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페이스북에 자신의 저서(The Political Mind: A Cognitive Scientist's Guide to Your Brain and Its Politics)를 발췌해 올린 글 (김성우 번역)
 
응용언어학자 김성우 작가가 지난 1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란 세력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 적는 언론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지 레이코프의 말"이라며 옮긴 내용입니다. 김성우 작가는 "일련의 언어 표현은 일종의 방아쇠(trigger)가 되어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그 안에 담긴 사고의 패턴을 격발하고, 이는 사람들의 생각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언론이 내란 피의자들 혹은 내란 동조자들의 말을 검증이나 비판 없이, 반복적으로 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결국 음모론을 조장하고, 탄핵 심판 불복을 운운하는 극우세력이 형성한 '프레임'이 사회적으로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일테니까요.
 
'탄핵 반대'와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전씨와 같은 이들의 말이 유튜브와 SNS를 통해서 널리 확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의 역할은 그 말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팩트체크해서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끝나지 않은 내란'에 대응하는 언론의 자세가 아닐까요?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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