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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근령·지만, 그들만의 '흑역사'
[추적] 근령 씨 남편 신동욱, 박근혜 비방해 징역형…왜?
박세열 기자  기사입력 2012-11-30 오전 7:57:23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비방한 제부 신동욱 씨가 결국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살인 교사 의혹'까지 등장한 박 후보 주변 친인척들의 행태가 결국 박 후보 동생 남편의 실형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법원 3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29일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된 신 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신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근령 씨의 남편이자 박 후보의 제부다.

신 씨의 '전력'은 화려하다. 자신의 처남인 박지만 씨, 박 씨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정용희 씨, 그리고 박근혜 후보의 5촌 조카 박용철 씨 등이 자신을 중국으로 유인해 살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가 무고혐의로 기소를 당했다. 또 박 후보의 미니홈피 등에 박 후보 비방글을 40여 차례 올려 역시 재판에 넘겨졌고,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에 박 후보가 개입됐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언론사에 보낸 혐의로 추가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을 통해 납치 살해 청부 의혹 등이 박 후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허위로 판단했다. 다만 지만 씨가 연루된 육영재단 운영권 분쟁과 관련해 재판부는 "신 씨의 처남인 '박지만 씨가 육영재단 폭력강탈 사건을 사주하고 자금을 지원했다'는 내용은 허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 박지만 씨와 박근혜 후보 ⓒ뉴시스

자신의 남동생을 폭력 배후로 지목 했던 근령 씨

육영재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육영재단 폭력 강탈 사건과 관련해 지난 2007년 11월 박근령 씨는 입장문을 발표한다.

근령 씨는 이를 통해 "2007년 11월25일 오후 6시경 박지만의 지시에 의해 청담동 커피숍에서 EG 정용희 실장의 주도로 오우제, 박상목, 조락기, 박용규, 박용철(5인은 현재 출입정지가처분 받음), 정용희, 이기삼(임시이사를 위해 2월달에 경찰청 협조) 등 11인 등이 육영재단을 폭력강탈하기 위해 거사비로 1인당 500만 원씩을 모금하자고 결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당시 정용희 실장 왈 '거사비를 박지만 회장님이 주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으니 사건 후 지불할 것을 약속'하며 모금을 주도하였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근령 씨는 "2007년 11월 28일 오후 1시 한센인복지협 임두성 회장(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지휘로 한센인과 조직폭력배 100여명을 동원해 1시간 만에 집무중이던 박근령 이사장을 강제로 끌어내고, 근무 중이던 간부 25여명을 폭력으로 쫒아낸 사실이 있습니다"라고도 주장했다.

임두성 회장은 후에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친박계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가, 과거 폭력 전과를 신고 누락한 사실이 드러나 망신을 당했고, 건설업체로부터 수십억 원을 받은 혐의로 체포 구속됐다.

최태민, 육영재단 간여로 '첫 분쟁' 일어나

육영재단 사건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박근혜, 근령, 지만 씨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세 자녀간 복잡한 반목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육영재단은 육영수 여사가 69년 4월 14일 설립했다. 당시 설립에 참여한 인사 명단에는 정주영 전 현대 회장,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이름도 보인다.

당시 육영재단 설립 목적은 "청소년에 대한 반공 정신의 앙양, 과학지식의 보급, 문화 예술과 체위 향상 등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제공하여 건전한 민족 사상을 함양 고취하고 체력의 보양과 정서의 순화를 통한 청소년의 복지 증진에 이바지한다"였다. 육영재단의 상징과도 같은 어린이회관 개관식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석해 서울 시내 당시 국민학교 어린이 대표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육영재단 이사장 직은 박근혜 후보가 맡게 된다. 박 후보는 83년 1월 제 3대 이사장으로 정식 취임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여러 잡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박 후보가 이사장을 맡은지 4년 후인 87년 9월 3일자 신문들은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직원 150여 명이 2일 저녁 6시 30분 부터 회관 앞마당에서 '어용간부 퇴진', '족벌 인사 체제 종식'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박 후보의 측근인 최태민 목사였다.

<여성중앙> 87년 10월호는 당시 육영재단 분쟁을 상세히 전한다. 박근혜 후보는 취임 후 1년에 한 두번 어린이회관 방문을 하다 84년쯤부터 회관 일에 적극 관여했다고 한다. <여성중앙>은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회관의 모든 일을 박 이사장이 결재를 했다는 것이다. 어린이회관의 운영결재권은 상임이사인 관장의 고유권한"이라며 "문제는 이사장 결재에 잎서 최태민 씨가 먼저 결재를 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최 회장'으로 불리던 최태민 씨가 어린이회관 문제에 간섭하고, 최 회장의 다섯 째 부인의 6녀이면서 당시 '한국아동교육문제연구소'와 C종합학원, C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던 최순실 씨가 어린이회관이 펴내는 잡지 <어깨동무> 등에 간여하고 있고, 이들이 손을 떼야 한다는 게 회관 직원들이 농성장에서 내 놓은 주장이었다. 최순실 씨의 남편이 박 후보의 '입법보좌관'을 지냈고, 2007년 경선 당시 이명박 캠프 측으로부터 "비선 실세"로 지목됐던 정윤회 씨다.

"이들이 농성에 즈음해 내건 이슈는 지나친 인사 이동에 따른 부당해고와 회관신규건설사업의 지나친 상업성 추구, 새로운 예절교육을 위해 지은 근화원 건설에 따른 잡음, 직제 개편과 신규 채용의 비리 등이다. 이들 내용들이 모두 최 회장이 관련됐다는 것이 농성의 핵심"이라고 이 매체는 전했다. 당시 최순실 씨는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씨가 자문 요청을 해 왔다"고 주장했다.

▲ 박근혜, 근령, 지만 씨의 어릴 적 사진 ⓒ연합뉴스

"박근혜를 최태민으로부터 구출해주세요" 탄원서 보낸 두 동생

불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근령 씨와 지만 씨가 직접 나섰다. 근령 씨와 지만 씨는 90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기꾼에게 포위당해 있는 박근혜를 전 국가 원수 가족 보호 차원 아래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탄원서를 올렸다. 최태민 씨가 박 후보 주변에 맴돌며 육영재단을 주무르는 등 전횡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육영재단 사태가 3년만에 전면 부상한 계기가 된 일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인사이더월드>라는 제호의 월간지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이상스러운 관계를 조사해 온 수사관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영(박근령)과 박지만은 증언을 통해 '우리 형제들도 언니나 누나를 마음대로 만날 수 없다. 근혜 언니가 살고 있는 집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으며 우리들이 만나려고 하면 며칠씩 미리 연락을 해야 하며 전화통화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무렵 근령, 지만 씨는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 11주기 추도식을 육영수 기념 사업회 주최로 하려던 데 대해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결국 박근혜 후보는 90년 11월 3일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사퇴하고, 근령 씨를 후임으로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먼센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근령 씨는 이사장 취임식 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태민 씨의 혐의 사실을 믿으며, 언니는 속고 있다"는 취지로 발언을 했다.

당시 박지만 씨도 인터뷰를 통해 "원래는 최태민 씨와 큰 누나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시작한 것"이라고 '탄원서'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최태민 씨는 당시 <우먼센스>와 처음으로 인터뷰를 한다. 최 씨는 "여러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원래 내게는 개인 사무실도 없었고 (박정희 육영수 기념사업회, 육영재단 등과 관련해) 아무런 결재 권한도 없었다"고 말했다. 최 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에 몸 담고 있었다. 기념사업회 조직이 새마음봉사단의 조직을 복원시킨 것이어서 최 회장이 고문을 맡았다는 것이다. 최 씨는 이 인터뷰를 통해 "최면술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등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당시 이 매체는 박근혜 후보 인터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최(태민) 고문은 이미 몇 개월 전에 완전히 손을 뗀 분입니다. 이미 물러나 있던 분에게 나가라고 하는 얘기는 무슨 의미죠? 이게 뭡니까?(이 대목에서 근혜 씨의 목소리는 약간 높아졌다. 또 몸이 불편한 듯 몸을 자주 뒤로 젖히며 오른 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만졌다) 최 고문이 기념사업회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한다고 주장한다는데 제가 나이가 몇입니까?"

▲ 19일 경북 영주시 희수사추모관법당에서 거행된 故 육영수 영부인 85주기 탄신제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과 남편인 신동욱 박사가 합장하고 있다.ⓒ뉴시스

박지만, 근령 씨 버리고 박근혜 후보 측에 서다

이 때만 해도 근령 씨와 지만 씨는 같은 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된다. 2001년 서울 성동교육청은 육영재단 감사를 통해 당시 부실 운영 등을 문제삼고 박근령 이사장 승인 취소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박 씨는 육영재단 운영에 계속 간여해 왔다. 근령 씨가 백석대 교수를 지내고 있던 14살 연하의 신동욱 씨와 지난 2007년 2월 약혼을 하면서 박지만 씨는 근령 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육영재단 분쟁과 관련해 박지만 씨 주변 인물들이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 것 역시 이 무렵이다.

2007년 약혼 이후 7월 지만 씨의 '그림자'로 불리기도 하는 정용희 씨와 박근혜 후보의 5촌 조카 박용철 씨는 중국 칭따오에 간다. 신 씨는 당시 "지만 씨의 비서실장 정용희 씨가 박용철 씨에게 나를 중국에서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폭로를 한다. 근령 씨와 자신의 결혼을 막으려고 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주 칭따오 한국 영사관은 "신동욱이 단란주점과 호텔에서 환각제를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공안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외교통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신 씨 일행은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신 후 성매매를 하려다가 공안의 조사를 받았다. 석방된 신 씨는 그날 밤 호텔밤에서 속옷만 입은 채 창문에서 뛰어내려 허벅지 골절상을 입었다.

이후 이 사건은 재판에 넘겨졌고, 재판부는 신 씨가 주장한 '살인 교사' 의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신동욱 씨는 육영재단 경영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사장에서 물러난 근령 씨가 육영재단 사무처장을 자임하며 '출근 투쟁'을 시작하자 박지만 씨 주변 인물들이 강제로 근령씨를 끌어내는 '육영재단 폭력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후 박 후보와 지만 씨의 관계는 돈독해졌지만, 근령 씨와 관계는 멀어졌다. 어제의 적과 동지가 서로 바뀐 것이다.

이후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지난해 9월에는 박용철 씨가 사촌에 의해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박 씨를 살해한 사촌은 이후 나무에 목을 매 숨졌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둘째 형인 박무희 씨의 손자들이다. 육영재단을 둘러싼 세 남매의 역사는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점철돼 있다.
 
/박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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