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3_0030_0010_0030_0040_0040
라. 토성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가) 구릉성
검단리유적의 환호에 매몰된 토층 상태가 하층은 地山土에 가까운 흙이며 상층은 부식토였다. 이는 본래 환호 주변에 있던 토루의 흙이 환호의 내측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환호 안쪽에 토루를 쌓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0822)
나) 중국계 토성
(가) 방형
國內城(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현 집안진에 위치하며, 集安縣文物保管所(진안현문물보관소)에 의해 1975년 5월부터 1977년 5월까지 발굴되었다. 규모는 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로 전체 성벽 둘레는 2,686m이다. 성의 형태는 거의 방형이며 방향은 155°이다.
<그림 9>국내성 평면도
발굴조사에서 남벽과 북벽의 성벽 하부에서 한 줄의 견고한 토루가 확인되었다. 토루의 폭은 7∼8m, 높이 1.7∼2m였으며 단면은 弓形(궁형)이고 토질은 진흙에 모래가 섞인 황갈색인데 거기에 소량의 자갈이 섞여 있었다. 흙다짐 할 때 생긴 구멍은 보이지 않았으나 토루안에서 불탄 흙과 灰坑(회갱)이 확인되었다. 토루내의 출토유물로 보아 초축 연대를 전국시대에서 고구려 건국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0823) 대체로 한대유적이 아닌가 추측된다.
雲城里土城(운성리토성):황해남도 은율군 운성리 갈말리마을 동쪽 경사면 중턱에 위치하며,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1962년 4월에 발굴되었다.
<그림 10>운성리토성 평면도
무덤은 토성 남쪽 야산에 있는데 백수십 기가 하나의 떼로 이루고 있고, 무덤과 토성과의 거리는 400m 안팎이다. 토성은 동서로 길게 놓인 장방형이며 규모는 동서 100m, 남북 60m이고 둘레는 355.7m이다. 지표로부터 40㎝ 깊이에서 두께 20㎝ 안팎의 검은 진흙층에 동서 20m, 남북 15m 정도의 관청자리가 확인되었다. 이 집자리에는 주춧돌들이 발굴되었고 이들 사이에는 막돌들과 기와조각·질그릇·쇠칼·쇠낫·뼈화살촉 등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한편 동벽 밖 1.5m 거리에서 폭 8m, 깊이 1.4m의 해자 자리가 확인되었으며, 해자 안에서 성 안에서 나온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질그릇이 나왔다.0824)
風納洞土城(풍납동토성):서울 송파구 풍납 2동에 위치하며,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 의해 1964년과 1966년에 발굴되었다. 1964년 조사 당시 성벽 규모는 북벽 약 300m, 동벽 1,500m, 남벽 200m, 유실되고 남은 서벽의 남쪽벽이 약 250m 정도로 전체 길이가 2,250m쯤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나 본래의 성벽은 3.5∼4㎞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 포함층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졌다.0825) 축성 연대는 3세기 말경 정도로 추정되며 백제 초기 유적으로 보고 있다.
<그림 11>풍납동토성 평면도
(나) 부정형
樂浪土城(낙랑토성):평양시 낙랑구역 낙랑동에 위치하며 1934·1935·1937년 3차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었다.0826) 광복 후에도 몇 차례 발굴된 듯한데, 1968년에는 토성 동쪽 대지 300㎡ 정도를 추가로 발굴하였다.0827)
<그림 12>낙랑토성 평면도
성의 규모는 남북 약 550m, 동서 약 650m 정도이고 실측도에 나타난 전체 성벽 둘레는 1,935.2m, 면적은 209,988.24㎡(63,521평)이다. 주변에는 동서 약 8㎞, 남북 약 4㎞에 걸쳐 2,700여 기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성안에서는 건물의 주춧돌과 기단을 비롯하여 벽돌을 깔은 도로, 하수구, 벽돌로 쌓은 네모난 留水址(유수지) 및 우물터 등이 발굴되었다. 이 성의 초축 연대는 기원후 1세기로 보고 3세기까지 사용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게 주장된 바 있다.0828)
所羅里土城(소라리토성):함경남도 금야군 새동리에 위치하며 규모는 764m 정도이고, 성안에서는 집자리가 발굴되었다. 특히 8호 구덩이에서 유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구덩이의 규모는 폭 3m, 길이 5.6m 정도의 장방형 구획안 지표로부터 1m 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2m 깊이에 이르기까지의 지층에서 청동촉, 철촉, 세형동검 십자형 검파두식과 수레 부속품인 일산대끝, 乙자형기, 철부, 철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0829) 8호 구덩이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후반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0830)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 이른시기의 방어시설은 토성, 목책, 환호, 녹각시설, 해자 등이 있었다. 기능면에서는 토성과 목책이 중심이 되고, 환호, 녹각시설, 해자 등은 보조적인 경우가 많았다. 각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토성은 구릉성과 중국계 토성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검단리유적에서는 환호 안쪽에 본래 토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본의 야요이시대 환호 취락유적에도 토루가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도 구릉 상부에 위치한 취락에 취락의 주위를 두른 토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토성 단독으로 사용되었을 경우도 있겠지만 환호, 목책, 녹각시설 등과 결합되었을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중국계 토성은 평면형태가 방형과 부정형으로 구분되어지나 성격은 비숫한 것 같다. 즉 이런 계통의 토성은 중원지방으로부터 중국세력이 동북지방으로 뻗어나감에 따라 요동·만주지방에서 그들의 지방행정 중심지의 관아가 있는 치소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토성은 한반도에도 전파되어 예성강 이북지역에서는 전술한 운성리토성, 낙랑토성(토성동토성), 소라리토성을 비롯하여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의 어을동토성(성현리토성), 황해남도 신천군 청산리의 청산리토성, 황해북도 봉산군 문정면 지탑리의 지탑리토성(당토성)이 알려져 있다.0831) 이들 토성들은 대부분 벌판 가운데 위치하며 부근에 강이 흐르고 전망이 좋은 그리 높지 않은 둔덕에 자리잡고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이다. 둘레는 400∼500m 정도이고 성문은 대체로 남쪽에 1개가 있다고 한다.0832)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규모면에서 운성리토성의 성벽 둘레가 355.7m, 어을동토성 532.9m, 소라리토성 764m로 소형에 속하고, 청산리토성 1,800m, 낙랑토성 1,935.2m, 지탑리토성 2,257.3m로 대형에 속한다. 대형에 속하는 토성들은 남한과 일본학자들이 낙랑토성을 낙랑군치소, 지탑리토성을 대방군치소, 청산리토성을 낙랑군 남부도위의 치소였던 소명현치소로 보는 주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한편 이들 토성 가운데 대형 토성에 속하는 낙랑토성, 지탑리토성, 청산리토성들이 평지성이라는 점도 앞서의 소형 토성들의 지형이 약간 높은 둔덕에 입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 주목된다. 또 최근 운성리토성과 어울동토성에 외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들 토성 주변에는 운성리토성과 같이 많은 곳은 100여 기, 소라리토성과 같이 적은 곳은 약간의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낙랑토성 주변에는 2,7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0833)
이들 토성의 초축 연대는 운성리토성이 기원전 2세기경으로 가장 이른 시기인 것 같고, 사용 시기는 대체로 기원후 4세기 초까지이다. 이러한 중국계 토성은 한성백제기에는 전술한 풍납동토성이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의 토성리토성, 충북 청원군 북일면 정북리의 정북리토성을 낳게 하고, 일본 환호 취락에도 영향을 주어 사가현(佐賀縣) 덴도우산(千塔山)유적처럼 환호의 평면이 방형으로 나타나게 된 듯하다. 한성백제기의 토성 규모는 풍납동토성이 약 3.5∼4㎞(추정) 정도로 초대형에 속하고, 토성리토성 727m, 정북리토성 655m로 소형에 속한다. 모두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상에 위치한다.
둘째, 목책유적으로서 확실한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미사리유적과 송국리유적뿐이다. 기둥구멍 규모는 미사리유적의 것이 직경 40㎝ 정도이고 깊이는 20㎝ 내외로 평면이 둥근 형태이며, 기둥구멍의 간격은 60㎝였다. 송국리유적의 기둥구멍은 평면 형태가 원형과 (장)방형이 혼재하였다. 즉 (장)방형이면서 대형은 폭 130∼140㎝, 깊이 110㎝였고, 원형도 보이나 대부분 방형인 중간 크기의 것은 폭(직경) 100∼110㎝, 깊이 50∼70㎝였으며 원형과 방형으로된 소형의 것은 폭(직경) 70∼80㎝, 깊이 40∼50㎝였다. 기둥구멍내의 기둥은 30㎝ 내외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기둥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았으나 130㎝, 180㎝, 220∼240㎝ 사이였다. 특히 57지구에서 확인된 평면 토층의 양상으로 보아 기둥사이에 橫帶를 설치하고 점토벽을 만든 것이 아닌가 보인다고 한다. 기둥구멍은 대부분 수직으로 팠으며 기둥구멍의 바닥은 흙다짐한 것과 적심석을 한 것이 있었다.
셋째, 녹각시설은 鹿砦施設(녹채시설)이라고도 부르는데 송국리유적에서는 출입구의 좌우측에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의 야요이(彌生)시대 유적인 요시노가리(吉野ケ里) 환호 취락유적에서도 출입구에 이러한 시설을 한 것이 보고된 바 있다.0834) 녹각시설은 백제의 대전 월평동유적에서도 확인되고,≪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후에 소멸된 것으로 되어 있다.
넷째, 환호유적은 청동기시대 것으로 검단리유적, 송국리유적, 덕천리유적이 있고 철기시대 것으로 대성동유적, 봉황대유적, 양산 패총유적과 삼국시대 것으로 가음정동 패총유적, 봉황대유적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규모가 왜소한 편이고 취락 전체를 두른 완전한 환호유적은 검단리유적뿐이다. 나머지는 국부적으로 일부만 발굴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중국내에서는 앙소문화기부터 환호 취락유적이 보고된 바 있으나, 우리 것을 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데는 아직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 환호 취락유적이 100여 개 이상 보고되었는데, 이들 유적은 우리로부터 전파되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특히 환호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이른 시기 방어시설이 식량생산 단계0835)인 청동기시대부터 출현하는 점은 주목되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식량생산으로 개인이나 집단이 부를 집적하게 되자 집단간에 쟁탈이 심화되었다는 데에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다섯째, 운성리토성이나 낙랑토성에는 망루지가 보고 되었으나 이것들이 망대지인지 망루지인지는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야요이시대 환호 취락유적과 비교할 때 우리 나라도 이 시기의 망루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다.
여섯째, 앞서 언급한 토성유적에서는 강이나 하천을 자연해자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운성리토성에서는 성벽 밖으로 폭 8m, 깊이 1.4m의 인공해자가 발굴되었다. 이 토성이 평지성이 아니고 능선 경사면의 둔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해자의 확인은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閔德植>민덕식
주
0822) 鄭澄元·安在晧, 앞의 글, 18∼19쪽. 釜山大 博物館, 앞의 책.
0823) 集安縣文物保管所,<集安高句麗國內城址的調査與試掘>(≪文物≫1, 1984), 47∼54쪽.
0824) 리순진,<운성리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 4, 사회과학출판사, 1974), 220∼223쪽.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조선유적유물도감≫2;고조선·부여·진국편(1989), 170∼172쪽.
0825) 金元龍,<風納里土城內住居層>(≪考古美術≫5-9, 1964).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집자리유적을 발굴하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자문회의 자료>, 1997년 4월 11일자 1∼7쪽 참조).
0826) 朝鮮古蹟硏究會,<昭和九年及同十年度土城址の調査>(≪古蹟調査槪報 樂浪遺蹟 昭和十年度≫, 1936), 33∼47쪽.
―――,<樂浪土城址の調査(槪報)>(≪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 1938), 103∼115쪽.
0827)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3), 153쪽.
0828) 고고학연구소,≪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7), 118쪽.
황기덕 외,<기원전 5세기∼기원 3세기 서북조선의 문화>(≪고고민속론문집≫ 3, 사회과학출판사, 1971), 37쪽.
최근에는 축성시기를 기원전 2세기로 오려 보려는 주장도 있다(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앞의 책, 98∼99쪽).
0829) 박진욱,<함경남도 일대의 고대유적 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 4, 1974), 170∼173쪽.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위의 책, 180∼181쪽.
0830) 박진욱, 위의 글, 181쪽.
0831) 閔德植,<發掘調査資料로 본 우리나라 이른시기의 防禦施設>(≪韓國上古史學報≫ 21, 1996), 84∼85쪽.
0832)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조선고고학개요≫(1977), 143쪽.
리순진·장주협, 앞의 책, 84쪽.
0833) 리순진·장주협, 위의 책, 83쪽.
0834) 佐賀縣敎育委員會,≪吉野ケ里遺跡≫本文篇(1990), 9·464쪽.
0835) 환호 취락의 성립배경을 기본적으로 안정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鄭漢德,<東아시아의 環濠聚落>,≪蔚山檢丹里마을遺蹟≫, 451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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