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초기 성곽 : 오녀산성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3) 성곽 > (1) 고구려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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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주몽(朱蒙)집단이 졸본천(卒本川) 부근에 이르러 정착한 곳은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성(遼寧省 桓仁縣城) 동북쪽 8.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알려져 있다. 오녀산성은 표고 800m의 험준한 산 위에 축조한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남북 길이 약 1,000m, 동서 너비 약 300m의 장방형(長方形)의 산성인데 3면이 험준한 산으로 막혀 있고 동쪽만이 트여져 있으며 渾江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동·서·남 3곳에 문지가 남아 있고, 성안에는 ‘천지(天池)’라고 불리우는 연못과 ‘점장대(點將臺)’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성안에서는 석기(石器)·도자기(陶磁器)·철기(鐵器) 등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산성 남쪽 5㎞ 떨어진 곳에 고구려 초기의 무덤이 있어서 이 산성이 고구려 초기의 성터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442)
그리고 환인현성 서쪽 4㎞ 떨어진 혼강 맞은편에 하고성자고성(下古城子古城)이 있다. 동쪽 성벽은 강물에 씻겨 내려가 없어지고 말았으나 서·남·북 3면의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그 길이는 약 600m의 판축토성(版築土城)이다. 성안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귀면문와당(鬼面紋瓦當)이 출토된 바 있으며, 근년에는 석모(石矛)·석부(石斧)·석촉(石鏃)·철촉(鐵鏃)·도기편(陶器片) 등이 출토되었다. 이곳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고구려시대와 遼·金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주거지역에 고구려가 축성한 것으로 판단되며, 遼·金시대까지 사용해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지 부근에도 오녀산성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초기의 고분군이 있어 고구려 초기 성터로 판단하고 있다. 즉, 朱蒙이 紇升骨城에 거주했다고 하는 곳이 이곳이 아닌가 하는 견해이다. 평지에 있는 이 성은 산 위에 축조한 오녀산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터로 보고 있다.443)
* 석모(石矛): 돌창 / 석부(石斧) : 돌도끼
442) 魏存成,<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 北方文物雜志社, 1985), 28∼29쪽.
李殿福·孫玉良,<高句麗的都城>(≪博物館硏究≫ 1期, 吉林省博物館, 1990), 36∼38쪽.
―――,≪中國內의 高句麗遺蹟≫(車勇杰·金仁經 譯, 學硏文化社, 1994), 19∼24쪽.
東潮·田中俊明,≪高句麗の歷史と遺跡≫(中央公論社, 1995), 82∼83쪽.
東潮,≪高句麗考古學硏究≫(吉川弘文館, 1997), 417쪽.
443) 주 4)의 논문 및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成周鐸,<韓·中 古代城郭築造에 관한 比較史的 考察>(≪中國都城發達史≫, 學硏文化社, 1993), 235∼239쪽.
―――,<韓國의 古代都城>(≪東洋 都市史속의 서울≫, 서울시정개발연구원, 1994), 38∼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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