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전기 성곽 : 국내성, 위나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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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유리왕(琉璃王) 22년(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축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국내성은 현재 길림성 집안현(吉林省 集安縣) 경내에 있는 성터로 비정되고 있으며, 위나암성은 집안현 서북쪽 2.5㎞ 떨어진 환도산(丸都山) 위에 있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일명 환도성/丸都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두 성은 우리 나라 역사상 축성 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성곽이다.
* 현재 길림성 집안현(吉林省 集安縣) -> 길림성 집안시(吉林省 集安市) 
 
국내성의 성벽은 동면 554.7m, 서면 664.6m, 남면 751.5m, 북면 715.2m로 전체 성벽의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서 약간 긴 편이다. 동서로 통하는 4개의 문지와 남북으로 통하는 2개의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문지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그 기저부의 폭은 7∼8m, 높이는 1.7∼2m 정도이다. 4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14개소의 치성(雉城)-마면(馬面)을 부설하고 있다. 1975∼77년 발굴 당시 석축 성벽 하부에서 토축(土築) 부분이 확인되어 한대(漢代)에 축조된 현치소(縣治所)의 토성지(土城址)에 석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석축은 2차에 걸쳐서 수축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동문지 밖에 건물터에서 ‘태녕태세(太寧太歲)’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는데 이는 미천왕(美川王) 26년(325)에 해당된다. 고구려는 유리왕때 이 성으로 천도해 온 이후 장수왕(長壽王)때 평양(平壤)으로 천도할 때까지 424년 동안(유리왕 21년∼장수왕 15년) 이곳을 근거지로 해서 국력을 신장해 왔으며,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 나오는 통구성(通溝城)이 바로 이 국내성(國內城)이라고 하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444)
 
위나암성은 표고 676m의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만이 트여 있는데 이곳에는 옹성문(甕城門)이 부설되어 있으며, 그 앞으로 통구하(通溝河)가 흐르고 있고 국내성이 환히 내려다보인다. 성벽의 둘레는 약 7㎞, 동쪽 성벽의 높이는 6m 정도의 석축산성이다. 성문은 5개소이며, 성벽의 위쪽으로 통도(通道)가 있고 왼쪽으로는 보조 성벽이 부설되어 있다.445) 성안에는 ‘점장대’와 ‘음마지(飮馬池)’로 불리는 연못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성의 축조방법은 건타루식(乾打壘式) 축조방법으로 국내성의 단순 석축 축조방법과는 다르다. 이곳에서 수습된 숫막새개와를 통해서 얻어진 자료를 가지고 이 개와사용의 중심 연대를 4세기 후반 초까지 보는 한편 상한선을 3세기초, 하한선을 5세기초까지 보는 견해도 있다.446) 평지의 국내성이 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이 산성에 들어와서 농성 대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성과 산성이 한 세트를 이루는 성제(城制)를 고구려는 초기부터 채택하고 있다(<그림 1>).
 
* 건타루식(乾打壘式) 축조 - 돌로 한쪽을 겉쌓기 하고 속에 진흙과 자갈을 넣고 다져서 담을 쌓는 방법으로 위에서 본 외면쌓기에 해당한다. 오녀산성(五女山城), 환도산성(丸都山城), 흑구산성(黑溝山城),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https://blog.naver.com/jsy1851/221599567035

 

* 성제(城制) : 성 쌓는 규범, 제도

<그림 1>국내성과 위나암성(환도성) 위치도
 
 
444) 魏存成, 앞의 글, 32∼33쪽.
445) 魏存成, 앞의 글, 32∼33쪽.
成周鐸, 앞의 글(1994), 40∼42쪽.
杉山信三·小笠原好彦, ≪高句麗の都城遺蹟と古墳≫(同朋舍, 1992), 11∼13쪽.
李殿福, 앞의 책, 24∼35쪽.
東潮·田申俊明, 앞의 책, 91∼99쪽.
446) 服部敬史·千田剛道·寺內威太郞·林直樹,<高句麗都城と山城>(≪靑丘學術論集≫第 5集, 韓國文化硏究振興財團, 1994), 35∼37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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