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8_0050_0060_0030_0010_0030
다. 중기 성곽(전기 평양성)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3) 성곽 > (1) 고구려 성곽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 15년(427) 천도하였다고 알려진 도성지는 안학궁 성지(安鶴宮 城址)와 대성산성(大城山城)·청암리토성(淸岩里土城) 등이 위치하고 있는 전기 평양성(前期 平壤城)이라고 하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안학궁성지는 평양 북동쪽 약 12㎞ 떨어진 평양시 대성구 안학동(大城區 安鶴洞) 대성산성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958년부터 발굴 조사된 안학궁성은 일면의 성벽이 약 622m의 방향(方形) 토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2,480m 447)이며, 면적은 30여 만㎡이다. 발굴자료를 복원하면 성벽의 하 폭은 평균 4∼8.8m, 높이는 8∼10m이며, 상 폭은 4.4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북쪽에 각 1개소, 남문은 3개소, 도합 6개소이다. 성안에는 52채의 집자리 가운데 궁전터가 5채이며, 5개의 건축군으로 분리되고 있다. 중심선상의 남쪽 건축군은 남궁(南宮), 가운데 것을 중궁(中宮), 북쪽 것은 북궁(北宮), 동쪽 것은 동궁(東宮), 서쪽 것을 서궁(西宮)이라 부르고 있다. 448)
대성산성은 평양시 대성구 대성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의 남문을 나서면 안학궁 성지가 있다. 성의 둘레는 7,218m, 449) 면적은 약 2,723㎢로 위나암성과 거의 같은 규모의 석축산성이다. 성안에는 20개소의 문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남문지 뿐인데, 문의 기단 길이는 20m, 폭은 14m, 높이는 1.5m 정도이다. 성안에는 건물 터, 창고 터, 장대지, 연못, 雉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50) 이 산성의 축조 연대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 451)로 보고, 427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바로 이 대성산성이며, 고구려가 멸망하던 7세기 중엽까지 평양지방의 방어진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청암리토성(淸岩里土城)은 현재 평양시 대성구 청암동(淸岩洞)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3,675m, 면적은 523,030㎡(158,217평) 452)의 토성이다. 북·동·서 3문이 부설되어 있으며, 성안에서 팔각형탑(八角形塔)을 중심으로 한 일탑삼금당식가람(一塔三金堂式伽藍)이 발굴 조사되었고 투각화염문 금동관이 출토된 바 있으며, 고식의 와당(瓦當)과 국내성(國內城)에서 발견된 초석(礎石)과 같은 양식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427년 장수왕 때 천도한 평양성(平壤城)이 바로 이 청암동토성이라고 주장하고, 대성산성과 짝을 이룬 성지로 판단하여 청암리토성지를 전기 평양성(前期 平壤城)으로 보고 있는 견해가 있다.453) 한편 안학궁성에서 출토된 토기와 와당들이 4세기 말 5세기 초까지 올라감을 근거로 해서 이곳이 전기 평양성의 근거지며, 대성산성이 세트를 이루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454)(<그림 2>).
<그림 2>평양지방 고대성곽 분포도
447) 魏存成, 앞의 글, 33∼34쪽.
閔德植,<高句麗 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國史館論叢≫39, 國史編纂委員會, 1992), 13쪽에는 2,488m로 상호 8m의 차이가 있다.
448) 成周鐸, 앞의 글(1994), 240쪽.
杉山信三·小笠原好彦, 앞의 책, 18∼26쪽.
閔德植, 위의 글, 43쪽.
그런데 필자가 1995년 9월 학술발표차 奈良에 갔을 때, 이곳의 조사보고서를 낸 바 있는 千田剛道는 안학궁지에서 출토된 숫막새개와는 고려시대 것이 분명하므로 이 건물지는 고려시대 건물지라고 주장했다. 앞으로의 복구사업과 조사를 기대한다.
449) 成周鐸·閔德植·杉山信三·小笠原好彦의 앞의 글에서는 7,076m로 기록하고 있으나, 魏存成은 앞의 글에서 7,216m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450) 杉山信三·小笠原好彦, 앞의 책, 37∼39쪽.
451) 채희국,<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유적발굴보고≫9, 사회과학출판사, 1964), 52∼56쪽.
452) 閔德植, 앞의 글, 7쪽.
453) 이같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日人 關野貞이며, 이 후 千田剛道·田村晃一·田中俊明 등은 청암리 토성지를 前期平壤城으로 보고 있다
杉山信三·小笠原好彦, 앞의 책, 26∼28쪽.
454) 북한학자 崔羲林·채희국 등의 주장으로, 이 의견에 閔德植도 따르고 있으며 魏存成도 같은 의견이다
閔德植, 앞의 글, 30쪽.
'고구려 > 성,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의 압록강 하류 진출과 방어체계 운용 - 임진수 (0) | 2024.09.12 |
---|---|
라. 후기 성곽(후기 평양성 = 장안성) - 우리역사넷 (1) | 2024.09.10 |
나. 전기 성곽 : 국내성, 위나암성 - 우리역사넷 (0) | 2024.09.10 |
가. 초기 성곽 : 오녀산성 - 우리역사넷 (1) | 2024.09.10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고구려 도성 축조 기사 - 우리역사넷 (1) | 2024.09.10 |